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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륙순환 도시주의] 바당 가는 길
  • 강준호
  • 환경과조경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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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이전과 이후 해녀의 도구들

 

 

“바당서 나오당 다쳐시녜”

바당밭으로 들어가는 길 위 이씨 삼춘(삼촌의 제주 방언)의 한 팔이 굽어 있었다. 푸른 깁스가 무심히 그의 팔을 감쌌다. 수확한 물건을 들고 오던 삼춘은 젖은 현무암에 미끄러졌고. 그 와중에도 삼춘은 성한 한 팔로 갈퀴를 쥐고 사락거리는 검붉은 톳을 바당밭 앞 시멘트 도로에 펼치고 있었다. 해녀는 바다와 땅을 오간다지만 인간은 본래 땅 위에 사는 동물이다. 숨을 쉴 수 있고 두 발로 설 수 있는 안정적인 2차원의 땅과는 달리, 바다는 잠시 숨을 참고 방문하는 중력과 부력 사이의 3차원 공간이다. 그 둘을 오가는 데는 다양한 기술(테크닉과 테크놀로지)이 필요하다. 호흡을 참고 내쉬는 기술(숨비질), 한기를 견디는 기술, 물건을 채집하고 물 밖으로 운반하는 기술(테크닉)부터 물에 떠서 잠시 기댈 곳이 되어주는 테왁, 잡은 물건을 넣는 망사리, 고무옷, 물안경과 같은 도구, 몸을 덥히는 불턱이나 목욕을 할 수 있는 탈의장, 바당밭 진입로와 해녀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와 같은 기반 시설까지(테크놀로지). 이러한 기술들은 다양한 관습과 제도와 맞물려 바당밭을 오랫동안 가꿔왔다.

 

첫 번째 글 “잠수하는 풍경”에서 필자는 해륙순환 도시주의를 해녀가 땅과 바다를 연결시키듯 건축과 조경이 수면 위아래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부가)생산물들을 호혜 교환하는 지역적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과 제도로써 고무옷과 금채기, 바당밭 진입로와 물마중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필자가 참여한 물마중의 경험을 통해 땅과 바다를 연결시키는 기술로써의 ‘길’과 해녀 공동체와 바깥 사회를 연결하는 사회적 연결로써의 ‘길’을 새롭게 상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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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리 해녀 건축 풍경

 

 

고무옷과 금채기

땅과 바다를 오갈 수 있게 하는 많은 기술 중에서 해녀의 물질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1970년대 고무옷의 도입이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녀들은 물적삼과 물소중이라고 부르던 무명이나 광목 소재의 작업복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물질에 최적화된 디자인이었지만 젖은 무명이나 광목은 바다 속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해녀들은 물에 들어가기 전, 중간, 후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는 길목에 불을 피우는 자리인 불턱을 만들었다.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들어가도 작업 시간은 30분에서 한 시간 내외였다. 자신의 숨 길이와 추위로 인한 작업 시간의 한계가 자연스럽게 바당밭의 고갈을 방지했다.

 

하지만 짧은 물질과 불턱으로 몸을 녹이던 작업 리듬이 고무 잠수복의 도입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사온 고무옷을 입은 해녀들이 3~5시간 작업을 하며 4배에서 5배 더 많은 물건을 수확하자 이 기술의 도입을 반대하는 해녀들이 생겼다.(각주 1) 그들은 갑자기 증가한 생산성으로 인해 “물건이 씨가 말라”버릴 것을 걱정했다. 고무옷 도입을 찬성하는 해녀들은 고무옷이 가져온 열적 편의(thermal comfort)와 생산성의 향상,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했다. 해녀 공동체는 이러한 논쟁을 고무옷과 함께 자원 고갈을 방지할 여러 제도를 도입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간 불문율로 존재했던 관습을 ‘공동어장관리규약’으로 문서화해 물질 시간을 제한하고, 계절에 따라 건질 수 있는 물건의 종류와 크기 등을 규정하고, 자치 기구를 두어 이 규칙을 집행·감독했다. 예를 들어 해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뿔소라의 경우 산란기인 6월부터 9월까지 채집을 금했고(금채기), 7cm 이하의 소라는 잡거나 판매하지 않음으로써 지속가능하게 했다. 채집하는 양을 조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녀는 바당밭에 ‘씨’를 뿌리기도 한다.

 

바당밭 내의 ‘자연 양식장’을 두어 소라나 전복, 해삼의 작은 개체들을 풀어주고, 이것이 자랄 때까지 그 구역에서 물질을 금지했다.(각주 2) 또한 해초의 경우, 돌미역이나 톳, 그리고 비료로 사용하던 듬북까지도 특정 기간에는 채집을 금지해 이것이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녀들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 바당밭을 보존해올 수 있었다.(각주 3)

 

유학생에서 일손으로

2020년 9월 27일, 종일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지만 별반 건진 것 없이 돌아가는 길이었다. 검은 현무암이 펼쳐진 해안가 멀리 작은 검은색 매스가 서 있었다. 오름을 닮아 둥근 지붕을 가진 단층 건물은 현무암으로 마감되어 있어 마치 그곳에서 솟아난 듯 했다. 정면에 걸린 ‘제주시수산업협동조합 삼양어촌계 잠수탈의장’이라는 손글씨 현판이 정겨웠다. 문을 두드리니 한 해녀가 나왔다. 그는 몸이 안 좋아 물질을 나가지 못했다면서도 내가 해녀 건축과 풍경을 연구한다고 말하자 탈의장과 불턱을 보여주었다. 탈의장에는 여럿이 동시에 씻을 수 있는 큼직한 공용 목욕탕이 있었고 작은 거실, 그보다 더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쓰지 못한다는 불턱은 옆집 창고가 입구를 막고 있어 접근이 어려웠고 태풍에 반쯤 무너져 있었다.

 

어느덧 동료들이 물에서 나올 시간이 되었다며 따라가겠느냐고 묻기에 냉큼 따라나섰다. 해안가 돌길을 따라 걸으니 멀리 해녀들이 물 밖으로 망사리를 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뒤로는 20대로 보이는 관광객 두 명이 해안가 의자에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급히 사진을 마저 찍고 망사리를 건져내는 데 손을 보탰다. 소라가 가득 담긴 망사리는 20kg은 거뜬히 나가는 듯했다. 망사리 그물을 들면 그 사이로 튀어나온 소라뿔이 몸을 찔렀고, 거기서 떨어지는 물이 현무암을 더 미끄럽게 했다. 겨우 언덕을 올라 도로 위 리어카에 실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사이,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해녀들에게서 수확의 흥분과 땅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신 차리고 보니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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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마중 지도

 

“게난 여기서 뭐햄서(그러니까 여기서 뭐하느냐)?” 한 삼춘이 뒤에서 리어카를 밀며 물었다. 미국서 건축 공부하는데 해녀의 디자인과 풍경을 연구한다고 하자 별반 말이 없었다. 이후 이어지는 질문들. “결혼은 해시냐(했느냐)”, “여자 친구는 이시냐(있느냐)”, “무사 머리는 여자추룩 그자락 길렁다념서(왜 머리는 그렇게 여자처럼 길게 하고 다니느냐)?” 결혼은 아직이며 여자친구는 없다고 하자, 삼춘들은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그 원인이 내 머리 길이 때문이라는 명쾌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아찔하고 흥겨운 대화에 함께 웃다 보니 탈의장에 도착했다. 삼춘들은 즉시 소라를 크기에 따라 분류하고, 일부는 삶아 살만 꺼내고 껍질을 버렸다. 생물로 팔 것은 바닷가 웅덩이를 창고 삼아 그 속에 넣어 보관했다. 일이 끝나가자 이씨 삼춘이 수고했다며 내게 작은 문어 한 마리와 소라를 검은 봉지에 싸주었다.

 

해녀가 바다에서 나올 때 마중 나가는 것을 ‘물마중’이라고 한다. 보통 이때 육지에서 기다리던 남자들이 물건을 건지고 옮기는 일을 돕는다. 물에서는 부력으로 뜨던 물건들이 물 밖에서는 무거워지기 때문에 일손이 더 필요한 것이다. 내가 갔던 날도 한 할아버지가 나와서 물건 건지는 일을 함께했다. 그날 우연히 물마중을 나가게 된 인연으로 나는 삼양 삼춘들을 자주 찾아 만나고일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삼춘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3월쯤 아예 삼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한동안 삼춘들을 볼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갈 때마다 다음에 찾아오라며 돌려보냈고, 포기할까 고민하던 2021년 4월 14일, 장문의 편지를 써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찾아갔다. 텅 빈 탈의장 주변을 걷다 보니 잠수회장이었던 이씨 삼춘이 저 멀리 바당밭 진입로에서 날 보고 손짓했다. 팔에 깁스를 한 삼춘은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 대신 수확한 톳을 한 팔로 고르게 너는 중이었다. 시간 있으면 도우라는 말에 오랜만에 쓸모가 있어진 나는 그날부터 삼일 내리 삼춘들과 톳을 수확했다. 보통은 남편이나 아들 등 다른 남자들이 일을 돕는다는데, 삼양 3동에서는 첫날 임금을 받고 일하던 한 남성을 제외하고는 오직 나와 대여섯명의 삼춘들이 전부였다.

 

톳 수확은 물의 흐름을 따라간다. 썰물이 시작되면 삼춘들은 톳을 수확해서 빨간 포대에 담은 후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간다. 어느 정도 무거워지면 포대를 근처에 두고 계속 전진한다. 밀물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돌아오면서 하나씩 육지로 옮긴다. 톳이 파도에 떠내려가기 전에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쉴 수 없다. 삼춘들은 계속 톳을 담고, 나는 계속 뭍으로 날랐다. 20kg 내외의 톳 한 포대를 들고 현무암 지대를 지나가는게 쉽지 않았다. 현무암 표면은 거칠지만 물과 이끼로 미끄러웠고, 겉에서 보기에는 안정적이어도 밟으면 흔들리기 일쑤였다. 이씨 삼춘처럼 나도 넘어져서 바지가 찢어지고 무릎이 까졌다. 일하는 게 영 불안한 나를 보며 삼춘들은 길을 일러주었다. ‘보기엔 다 검은 돌이지만, 걸어 보면 흔들리지 않는 길이 있다.’ 오직 노동으로 익힌 길. 3일차 작업이 끝나자 머리 긴 일꾼이 쓸 만했는지 늘 까칠하던 한 삼춘이 번호를 쓰고 가라고 했다. 그러곤 빳빳한 오만 원 권 두 장을 쥐어 주며 내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근대화가 한창이던 1980년대 제주, 해녀들은 바당밭 작업로를 포장함으로써 바당밭 풍경을 바꿔 나갔다. 검은 현무암 사이로 회백색 시멘트가 틈을 메꾸었고, 두터운 선이 되어 바다와 육지를 가름했다. 그 길 위로 해녀들은 조금이나마 안전하게 걸었고, 물차(운송 트럭)는 해안가 더 깊이 들어와 바다 창고에서 물건을 건져 갔다. 하지만 시멘트 포장은 돌 틈에서 살아가는 소라와 거북손, 게와 같은 생물의 서식지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시멘트의 생산과 운송, 폐기에 있어서도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두 환경을 연결하는 다른 길도 있지 않을까?

 

해륙순환 도시주의적 제안은 소라 껍데기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소라나 전복 껍데기는 대부분 재활용되지 않고 바닷가 주변이나 폐기장에 버려진다. 192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 이러한 껍데기를 가공해 단추로 재활용하는 공장이 제주에 있었지만 1980년대에 문을 닫으면서 껍데기는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다.(각주 4)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많은 음식점의 경우에는 해산물 껍데기를 모아 폐기물 업체에 넘기는데 이 중 일부만이 비료나 자개의 재료로 재활용됐다.(각주 5)이를 해결하기 위해 2020년 제주도는 몇 마을에 분쇄기를 도입해서 껍데기를 갈아 비료로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다양한 기관들이 자원화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각주 6)나는 뿔소라 껍데기를 조간대 길의 골재로 사용해보는 것을 상상해본다.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뿔소라 껍데기는 겉에 나있는 뿔과 나선형의 형태 덕분에 압력이나 충격에 강하다.(각주 7)또한 그 껍데기를 쌓았을 때 뿔이 맞물리고 단단하게 결합한다. 해녀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에 3차원 지오넷을 설치하고 그 속을 소라 껍데기로 채우는 것이다. 이런 길은 해녀들의 작업을 조금이나마 덜 위험하게 하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은 관광객이나 다른 주민에게 산책로가 될 수도 있다. 그 길 위에서 해녀가 아닌 사람들도 땅과 바다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면, 바다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이 조금 더 쉬워진다면, 더 많은 사람이 해녀의 일에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며 파도와 사람들의 걸음으로 소라 껍데기가 깨지고 부서졌을 때, 그 길을 새롭게 채우는 것도 하나의 의례가 될 것이다.

 

해녀 공동체는 신규 해녀의 부재, 물질 소득과 농어촌 인구의 감소 등의 이유로 사라져가고 있다. 해녀 평균 연령은 이미 2020년에 70대를 넘어섰고,(각주 8)제주 해녀 인구는 1970년 1만 4,143명에서 2023년 2,839명으로 급감했다. 해녀학교가 신규 해녀를 양성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촌계에 가입해 해녀가 되기란 어렵다. 최소 물질 일수를 채워야 하고 기존 공동체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각주 9)직업인으로서 해녀를 양성하는 것이 해녀의 소멸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조금 느슨하고 열린 공동체는 어떤가? 길 위해서 만나는 것이 시작이 될 수 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해녀가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이웃으로, 관광객이 아니라 물마중 나오는 지인으로서. 조금씩 우연히 함께 걷다 보면 연결될 테니.


**각주 정리

1. 고광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속의 해녀 연구”, 『무형유산』 6, 2019, p.232. 김경돈, 류석진, “비배제성과 경합성의 순차적 해소를 통한 공유의 비극의 자치적 해결방안 모색: 제주도 동일리 해녀의 자치조직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20(3), 2011.

2. 안미정, 『제주 잠수의 어로와 의례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문화전략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07, p.119.

3. 엘리너 오스트롬, 『공유의 비극을 넘어』, 알에이치코리아, 2010. 해녀 공동체가 어떻게 오스트롬이 정리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의 여덟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는 노우정의 『제주 해녀공동체의 특성과 지속가능한 마을어장 관리』(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를 참조.

4. 장태욱, “군수시설에서 통조림공장, 도시재생까지 요동치는 근대 유산”, 「서귀포신문」 2019년 3월 18일.

5. “버려지던 굴, 조개 껍데기 새로운 소득원 된다”, 해양수산부 보도자료, 2023년 1월 12일.

6. 김태홍, “서귀포시, 소라, 성게 껍질 해양오염방지 농가 퇴비로 재활용… 파쇄기 지원”, 「제주환경일보」 2022년 2월 28일.

7. 권예슬, “자연계 최고로 단단한 소라껍데기의 비결은”, 『동아사이언스』 2016년 2월 18일.

8. 이진호. “‘은퇴자가 신규해녀의 10배, 제주 해녀 인구 3000명대 붕괴’ 소멸해가는 해녀, 그 속의 작은 움직임들 지켜내야”, 「한경」 2024년 3월 25일.

9. 위의 글


강준호는 존재와 제도가 만든 풍경을 읽는 건축가다. UCLA에서 건축과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에서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 교수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해안 지역의 기후 변화 인식을 조사했다. 현재 건축가와 정원사로 일하며 조경과 건축을 함께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junho_s_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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