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식물 문답』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쓸쓸한 풍경을 상상했다. 잘 팔리지 않아 서점 한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 악성 재고로 분류돼 쓰레기 처리장으로 보내지는 모습, 멀쩡한 새 책을 빨아들이는 파쇄기의 새까만 입.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출간을 준비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원고를 보내고 나면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다.
책의 마지막 꼭지 ‘좋은 시절이 끝날 때’는 이 생각들을 뿌리치려고 쓴 글이다. 책이 크게 실패해도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다짐을 담았다. 위안이 됐던 걸까. 이후로 쓸쓸한 풍경을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독자가 아니라 나를 위한 글을 책으로 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 꼽는 독자를 만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여전히 어떤 걱정이 생기면 내게 필요한 이야기를 노트에 적거나 그려 둔다. 그렇게 노트를 채운 뒤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고 잊어버린다.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언젠가 노트 한 권을 꺼내 먼지를 후 불어내고, ‘나를 위해서라면 좀 어때.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이라고 적을 수 있기를.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