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 식물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는 과실수는 인간과 가장 오래, 깊게 인연을 맺고 사는 지구의 생명체다. 특히 사과나무는 그리스·로마의 신화는 물론이고 여러 종교의 성경에도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인류의 문명과 인연이 깊다. 현재 사과는 재배종이 7천여 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데 여러 ‘품종’으로 불리는 이 다양한 사과는 인간에 의해 변형된 식물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자생종과는 다르다. 한때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은 최대 사과 재배지였다. 그 흔적이 아직 가로수에도 남아 있지만, 도시 뉴욕의 상징이 사과라는 것도 이를 잘 증명한다. 지금도 사과는 좀 더 크고 단맛이 강화되도록 끊임없이 재배종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래 자연에서 생존했던 야생의 사과는 잊혀졌다. 지나친 유전적 변형이 일어난 품종 사과나무가 급속히 자생력을 잃어가고 단맛의 증폭이 다른 영양분의 결핍을 일으키는 등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품종 사과의 어머니격인 야생 사과는 카자흐스탄 인근의 중앙 유럽 산악 지대에서 자라는 ‘말루스 푸밀라(Malus pumila)’로 최근 밝혀졌다. 물론 이 야생 사과의 특징은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사과 품종들과는 매우 다르다. 열매도 작을뿐더러 그 맛도 시고 떫어서 지금의 사과 맛이 아니다. 먹기에 적당하지 않지만 이 야생 사과는 재배종 사과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고 사과 고유의 특징을 다시 복원하는 데 꼭 있어야 할, 생물학적으로 귀한 식물이다. 사과나무뿐만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인류와 식물은 그야말로 동고동락해 왔다. 애증과 공생의 고리가 아주 깊고 복잡하다. 인간은 식물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에 식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지만, 식물 입장에서도 인간이 아니었다면 지구 전체에 지금과 같이 번식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인간만큼 식물을 파괴하는 생명체도 없지만 인간만큼 식물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생명체도 없는, 서로에게 참 묘하고 복잡한 공생 관계다. 사과나무에 얽힌 자생종과 재배종의 문제가 최근에는 정원에서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