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건설왕’이라 하지 않고 ‘건축왕’이라 했을까? 책장을 덮고 든 첫 번째 의문이다.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의 시대”라는 부제목처럼 정세권은 1920년대에 북촌, 익선동, 창신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한 부동산 개발업자다. 그가 지은 한옥 단지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면 한옥 집장사로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의 활동은 단순한 집장사와는 거리가 멀다. 전통 한옥에 근대적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하여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주거 문화를 일대 개선했으니, 그 업적이 결코 폄하되어선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적지 않은 분량은 조선물산장려회를 기반으로 한 그의 민족운동에 할애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건축왕일까? 사라지지 않는 의문을 안고 북촌의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이 한옥도 정세권이 지은 것일까를 궁금해하면서….
안국역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계동 골목의 한옥 게스트하우스는 생각보다 컸다. 마당이 꽤 넓었고, 한옥의 고풍스러움도 느껴졌다. 대문에서 보았을 때 마당의 왼편에는 유리 통창이 시선을 끄는 사랑방이, 오른편에는 별채가 자리 잡고 있다. 전면의 본관 건물에 안방, 큰방, 건넌방이 있으니 객실만 다섯 개에 이른다. 각 객실마다 별도의 화장실이 딸려 있고, 거실과 부엌은 물론 사무실도 별도로 있을 정도로 작지 않은 규모다.
우리가 머문 곳은 별채다. 기역자 형태의 원룸 구조로,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장 독립적인 공간이다. 목소리가 유난히 큰 어떤 멤버를 위해 굳이 별채를 골랐다고 한다. P가 다음 독회 책으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를 추천했을 때, 누군가 북촌의 한옥에서 독회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 근사한 계획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2017년에서 1920년대로 잠시 동안의 타임 슬립을 시도했다.
우리는 애써 주인장에게 이 한옥이 언제 지어진 것인지를 묻지 않은 채,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별채의 안쪽에 작은 상을 펴고 둘러앉았다. 대개는 책을 고른 사람의 아주 짧거나 혹은 꽤 긴 발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는데, 이 날은 달랐다.누군가 던진 감상평 탓이다. 한마디로 아쉬움! 그러자 일제히 아쉬웠던 점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전개였다. 오고가는 말들의 처음과 끝에는 “일반 독자였다면 흥미로울 수 있었겠지만”이란 단서가 자주 달렸다.
본문만 199쪽인 두껍지 않은 책인데 “책의 절반 이상이 정세권이 경성을 만드는 스토리가 아니라, 정세권이란 인물에 할애되었다”, “기대했던 경성이란 도시의 개발 이야기가 너무 부족했다”, “물산장려운동에 얼마나 많은 자금을 쓰고 노력했는지, 우리는 궁금하지 않다”, “도면을 더욱 보완해야 했다”, “기대에 못 미쳤다. 얕고 거친 추적이었다. 건축이나 도시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3장은 생뚱맞았다. 그 동기가 도시개발과 연계되었다면 모를까”와 같은 독후 소감이 이어졌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하지만 이 책 덕분에 북촌의 한옥 지붕 아래에 모여 앉은 우리는 서로의 한옥에 대한 추억을 엿보기도 하면서, 이 책의 장점에도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경성 건축왕’이란 단어를 접했을 때의 호기심은 누구랄 것 없이 컸다. “정세권이란 인물을 발굴하고 조사하고 추적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저자의 노력은 기억할 만하다.” 어떤 이는 프레시안에 연재될 당시의 글을 읽은 적도 있어서, 한 권으로 묶인 단행본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고 한다. 특히 앞부분에 대한 호감도는 모두 높았다. 한 멤버가 120쪽 밖에 읽지 못했다는 고백을 하자, 필요한 부분은 모두 읽은 셈이라는 다독임이 뒤따랐다. 결국 정세권을 알게 된 점이 가장 큰 수확이란 점에 의견 일치! 게다가 디벨로퍼의 저항 운동이라니!
개인적인 또 하나의 소득은 ‘경성 3왕’의 존재를 알게 된 점이었다. “일제시대 경성의 대자본가들은 ‘왕’이라는 타이틀로 불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화신백화점 소유주로 1930년대 조선 최대 갑부 소리를 들었던 박흥식이 있는데, 그는 ‘유통왕’이라 불렸다. 그에 필적할 만한 부를 축적한 인물에 ‘광산왕’이었던 최창학이 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경성 3왕이라 불린 인물이 ‘건축왕’ 기농 정세권이다. 정세권은 한옥집단지구를 경성 전역에 걸쳐 건설하면서 단기간에 대자본가로 성장했다.”(각주1)
토론 중 가장 고개가 끄덕여졌던 대목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일상의 삶’이 영위되었다는 엄정한 사실이었다. 이 지점에서 L이 이야기했다. “어려운 사람은 부리는 사람만 바뀔 뿐 어려운 일상은 그대로다. 그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든. 토지의 서희처럼 어쩌면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보다 일제강점기에 한 경제 행위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처음의 의문에 답할 차례다. ‘건설왕’이 아닌 ‘건축왕’으로 칭한 (대단하지 않은) 까닭은 독자들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인 우리가 잠시 머문 한옥은 정세권이 지은 집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지나치게 크고 넓기 때문이다. 멤버 중 한 명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다. “다섯 살 때 삼선교 장수마을에서 살았다. 도심형 한옥 주택인 ㅁ자 집이었다. 마당에 볕이 한 줌만큼 들어왔다. 지독히 좁고 어두운 마당이었다. 정세권이 지었을 법한 집이다.” 저녁 9시, 우리는 책을 덮고 계동 골목을 빠져 나와 간단한 뒷풀이를 하고 헤어졌다. 남자 사람들은 집으로, 여자 사람들은 다시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1.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2017,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