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편집은 물론, 행사 준비로 정신없던 9월이 끝나가고 있다. 곧 2017 서울정원박람회도 마무리된다. 잡지 마감을 이유로 박람회 기획이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일을 돕고 나면 고단해져 머리 붙일 곳만 있으면 잠들어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보다는 덜 피곤했기 때문일까, 사실 대학생일 때만 해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소위 말하는 개꿈도많이 꾸고, 적어도 한두 시간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상(망상)에 수십 번 뒤척였다. 그런 생각도 곧잘 했다. 만약 나에게 시간 여행이 허락된다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대부분 과거의 나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주자는 불온한 결말로 끝을 보았는데, 3년 전 어느 날부터는 이런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로 돌아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까 봐 두려워서. 몇 날 며칠 TV 뉴스를 채웠던 바다와 그 한가운데 놓인 배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회사 인근 식당은 점심시간이면 모두 채널을 뉴스에 고정해 놓았다. 처음에는 화면을 주시하느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뉴스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무리에 있었다. 우리의 시선을 밥그릇에 붙들어 놓은 건 일종의 무력감이었다.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나의 무력함, 그 사실을 깨달은 데서 오는 불편함. 그때 처음으로 삶이 허무해졌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나는, 운이 없으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삶을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퍼뜩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출간된 1990년대 말도 그 당시와 닮아있던 걸까, 이 책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냉소적이고 삶에 어떤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허무주의자처럼 보이고, 작품의 톤 역시 상당히 관조적이다. 줄거리는 간결하다. 화자인 ‘나’는 자살을 원하는 사람을 물색해 자살을 돕고 그 대가로 그들의 이야기를 받는다. 이 책에서 ‘나’가 수집한 이야기는 ‘유디트’와 ‘미미’라는 여자의 삶으로, 이 둘은 모두 자살에 성공한다. 즉 작품 제목의 ‘나를 파괴할 권리’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어떤 틀을 부순다거나 자신을 진창에 빠트리는 것을 넘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끊을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끌고 가본 적 없는 유디트와 항상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는 예술가 미미. 그 둘은 제 삶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삶을 이어 나가게 할 어떤 목표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건 자살뿐이다. 매번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유디트는 자살 계획을 세우며 처음으로 “확연히 다른 면모”(각주1)를 보여준다.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각주2)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메우려는 듯 항상 입에 물고 있던 추파춥스도 잊은 채, 그녀는 자살 방법을 검색하고 있는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다. 죽음을 계획하며 삶의 기운을 되찾는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지나온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기회를 얻지 못한 그들에겐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처음으로 얻은 자신에 대한 결정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살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교만한 권리이기도 하니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게 죽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책을 덮은 뒤 우울함을 닮은 허무함이 일상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은 비극이라기보다 후련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각주3)라는 ‘나’의 말처럼 그들은 다른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자신을 구원했다. 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만족스러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맞은 그들의 얼굴이 평온해 보이는 이유가 ‘죽음’ 때문인지 자신이 직접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인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각주4)라는 물음은 갖은 몸부림에도 바뀌지 않는 상황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도망치거나 회피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를 따라갈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각주5)야 할 것이다. 3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최근 일어나고 있다.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상황의 변화를 목격한 만큼, 내 앞에 3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버튼이 나타난다면 망설임 없이 누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를.
1.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2017, p.71.
2. 위의 책, p.71.
3. 위의 책, p.133.
4. 위의 책, p.134.
5. 위의 책,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