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이 끝나기 전, 급한 마음으로 책 몇 권을 구매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문학잡지 두 종의 정기 구독도 신청했다. 연말 준비로 가벼워진 지갑을 걱정하면서도 십만 원에 가까운 돈을 기꺼이 지불한 건 순전히 이 꼭지, ‘편집자의 서재’ 때문이었다. 격 달로 돌아오는 ‘편집자의 서재’는 나에게 기사 쓰기와는 또 다른 부담을 주는 코너다. 오롯이 책에 대한 감상만으로 잡지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워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또 괴로운 일이었다. 2016년 11월, 입사 일 년을 맞이한 나는 불안해졌다. 고작 여섯 권의 책을 소개했을 뿐인데 서재가 바닥난 것이다. 허겁지겁 인터넷을 뒤져 채운 도서 구매 목록은 일종의 보험이자 새해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을 그럴듯하게 써보겠다는 계획. 한동안은 곳간에 곡식을 가득 채워 넣어 겨울 날 준비를 마친 농부처럼 든든했다.
야심 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첫 번째 책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워서, 다음 책은 게으름 때문에 다 읽지 못했다(주말에 TV에서 끊임없이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과 대학로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공연은 또 어찌나 재미있는지). ‘오랫동안 묵혀두어 종갓집 씨간장처럼 발효된 첫사랑 카드’도 없는 나는 대신 오래된 기억을 쥐어짜 고등학교 시절 읽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교코』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욕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관심거리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아 장래 희망을 적는 란을 앞에 두면 한참을 고민하곤 했다. 당시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반납해주며 바코드를 찍는 일이 멋져 보여 도서부에 들었고,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봉사활동을 하러 점심시간 도서관을 찾았다. 기대와는 달리 도서관을 찾는 학생 수는 극히 적었다. 따분함에 도서관 이곳저곳을 서성이다 우연히 일본 문학 소설 코너에서 『교코』를 만나게 됐다.
욕심에 비해 특출한 재능이 없던 내게 교코는 단박에 선망의 대상이 됐다.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수수하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가진 교코. 일본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는 그는 때때로 긴 팔다리를 이용해 “럼을 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타는 목마름과 함께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빠트리는 춤을 추는 댄서가 된다. 항상 차분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에게도 뜨거움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룸바와 차차차, 맘보. 수준급 댄서도 한두 번만에 따라하기 힘든 춤을 교코에게 가르친 건 일본에 GI(Government Issued)로 파병됐던 호세 코르테스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여덟 살 교코에게 춤은 단순히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됐다. “난 줄곧 혼자라고, 혼자라고만 생각하면서 자랐어. 호세와 춤을 춘 것은 단지 다섯 달 뿐이야. 혹시, 나를 잊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호세는 나를 도와주고 구원해 주었어, 그냥 춤을 가르쳐주었을 뿐이니까 나의 이런 말이 좀 과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 르쳐주었으니까, 그렇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그런 것을 가르쳐주었으니까.” 장장 다섯 페이지에 걸쳐 묘사되는 교코의 춤사위를 보고 있으면, 호세가 떠난 뒤에도 철조망 앞에서 혹은 빈 공터에서 호세가 가르쳐 준 스텝을 연습하는 교코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교코는 호세를 만나기 위해 겁도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호세를 찾아다니고, 호세를 만나고, 호세가 에이즈에 걸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호세를 피자를 팔던 빨간 밴에 태워 그의 고향으로 데려다주는 여정이 교코를 만난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영화로 치면 일종의 로드무비다. 갈대를 흩트리는 바람처럼 교코는 짧은 만남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잔뜩 헤집어 놓는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의 꿈을 떠올리고, 편견에 싸여 있던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호세가 교코에게 “다가가 에이즈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처럼” 심어준 춤은 교코를 통해 사람들에게 번져 나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유치하지만 아직도 종종 나에게도 언젠가 교코의 춤처럼 나를 뜨겁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꾼다.
입사한 지 일 년여가 흘렀다. 편집실 한 편에 놓인,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잡지 14권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글쓰기는 여전히 어렵고, 두 달 뒤 찾아올 ‘편집자의 서재’ 꼭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미래는 지금, 이미 벌써 당신의 손에 있다 … 나는 여태 어딘가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 옛날에는 그것이 피로하고 초조했지만 이제 괜찮다. 길 위에 있을 때만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는 교코의 말을 떠올리며 한 가지를 약속하려 한다. 4월호 ‘편집자의 서재’는 내 게으름으로 포기해 버린 책,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다.
* 환경과조경 346호(2017년 2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