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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최악의 하루
남산은 길이다
  • 환경과조경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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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은 뉴욕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뉴욕을 찬양하며 도시의 일상을 탁월하게 묘사해 왔다. 일찍이 1970년대부터 우디 앨런은 뉴욕이 서부의 도시들과 달리 어디나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인 점을 매력으로 꼽았다. 걸어서 식당에 가고 걸어서 센트럴 파크를 지나면 박물관이 나오고 학교가 나온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거리와 공원을 걸으며 시시한 농담부터 진지한 철학까지 나눈다. 센트럴 파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우디 앨런은 뉴욕의 상징일 뿐 아니라 시대극을 촬영할 때도 별다른 장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변함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은 어떨까. 우선 서울은 걸어서 다니기에 물리적으로 너무 넓다. 사대문 안으로 좁혀보아도 아직은 보행자에게 친절한 도시는 아니다. 서울의 거리는 빠르게, 자주 변한다. 그래도 센트럴 파크 이상으로 긴 시간 동안 서울을 상징해온 남산이 있다.

 

1950~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는 남산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당시 영화 속 남산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영화 도입부는 남산에서 조망되는 서울의 변화를 스케치하거나, 등장인물들이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다.

 

남산은 산이자 공원이다. 한국인은 산을 신성시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남산에 올라 임금이 사는 궁궐을 내려다보거나 나무를 꺾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서울을 한눈에 조망하는 일은 근대적 체험인 셈이다. 사대산 중 하나였던 남산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울의 경계에서 중심이 되었다. 산이면서 공원이기 때문에 보존과 이용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계속 충돌해 왔다. 넘쳐나는 관광객으로 곤돌라를 설치하는 것이 생태 보존에 도움이 될지 더 많은 이용으로 훼손이 가중될지 여전히 논쟁 중이다. 남산은 북한산처럼 본격적으로 등산복을 입고 오르는 산도 아니고 센트럴 파크처럼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공원도 아니다. 한양도성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둔 시점이어서 남산의 특성을 하나로 규정하기는 더 복잡해졌다.

 

몇 달 전 씨네21김혜리 기자와의 대담에서 실제로는 체감하기 어려운 한강이 가진 깊이의 속성을 영화를 통해 발견한 적이 있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관념 속 남산에서 의 가능성을 환기해 준다. 남산은 하이힐을 신고도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자, 도시를 내려다보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원이며, 조선 시대에 쌓은 도성을 체험할 수 있는 도시 유산이다. 번잡한 도심을 피해 서울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최악의 하루는 서촌과 남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하루 동안 펼쳐지는 가벼운 소동극이다. 제한된 시공간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 은희(한예리 분)는 서촌에서 배우 수업을 마치고 걷던 중에 길을 찾는 일본 작가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진다. 오늘 처음 본 일본 남자 A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B와 잠시 사귀다 헤어진 남자 C를 남산의 길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은희는 드라마 촬영 중인 B를 만나기 위해 서촌에서 남산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 한참 기다리다 만나지만 말다툼을 벌이다 헤어진다. 은희가 전망 데크에서 찍은 사진을 SNS를 통해서 보고 C가 갑자기 찾아온다. 그와는 B의 눈을 피해 잠시 사귀다 한 달 전에 헤어졌다. 유부남인 C는 은희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매달린다. 은희는 BC에게 거짓말을 하며(말하는 순간은 진실로 보이지만) 각각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며 BC가 동시에 무대에서 사라지고 모든 것이 엉켜버린 최악의 하루가 지날 때쯤, 서촌에서 헤어졌던 A가 거짓말처럼 등장한다.

 

김종관 감독은 걸을 때 생기는 건강한 에너지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B에게 남산은 삶의 현장이자 아줌마들로 붐비는 곳이고, C에게는 은희와 사랑을 속삭이던 추억의 장소다. A는 관광객 모드로 서울의 상징인 남산에 올랐다. 우연과 의도, 진실과 거짓, 설렘과 권태, 추억과 현실, 이 복잡한 감정들이 남산의 길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다 마법같은 해피엔딩을 맞는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201611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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