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조경가 한 명은 이렇게 얘기했다. 숲에서 놀아보지 않은 자는 설계하지 말라고. 그만큼 숲은 자연을 다루는 우리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고, 사전 같은 참고 문헌이 되기도 하며,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숲에 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느끼고 해석하는 근본적인 무기를 하나 더 구비한 셈인지도 모른다.
화담숲은 LG상록재단이 구본무 회장의 아호를 따 만든 비영리 수목원이다. 부담스러운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계절에 따라 바뀌는 숲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기꺼이 또 하루를 내어주고 싶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산자락의 남쪽 사면 760,330m2(약 23만 평)에 걸쳐 4,300여 종의 식물이 공존하는 화담숲은 여느 산림에 비해 종 다양성이 높다. 자연 상태로 두었다면 분명히 경쟁과 도태 때문에 유지하기 힘든 숫자일 테다. 그렇다면 이곳은 보전된 자연 산림이라기보다 정성스럽고 치밀하게 디자인되고 꾸준히 관리되는 정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겹게 얘기하는 숲’이라는 의미의 화담숲. 그러나 화담숲에서는 ‘말하기’보다는 ‘걷기’에 몰입하게 된다. ‘걷다’라는 행위는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가 찬양해왔듯, 생각과 감성을 단순하고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깨워내고 세상과 나를 감각적으로 또 사유적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만의 고유한 특권이다. 두 발로 걷게 되면서 하늘을 보게 되고, 땅과 하늘을 잇는 존재로서의 독자성을 갖게 된 것은 인류사의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공원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픽처레스크 정원 양식을 떠올려본다.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하나의 이상적인 자연을 만들고자 했던 인류사적 욕구인 픽처레스크 정원은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걷는다는 행위, 그로 인해 풍경 속의 내가 그림을 주체적으로 편집하여 연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로소 화폭에 담긴 풍경화를 우리를 둘러싼 공간으로, 현실로, 일상으로, 문화 영역으로 바꿔주었다.
화담숲은 참으로 걷기 좋은 곳이다. 편안한 경사를 유지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계획된 일련의 산책로와 데크구조물은 움직임의 방향을 틀어 새로운 주제원으로 몰입시키거나, 근경과 원경을 교차로 바라보게 만들어 숲을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릉이 많은 한국적 픽처레스크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많은 날에 가면 등 떠밀려 올라가야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풍경 속으로 점멸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의 무희적인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많을 때에만 나타나는 순례의 경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산 체험 방식인 등산은 일정한 경사를 앞으로, 직선적으로 걷는 것이다. 한편 화담숲에서 걷는 행위는 계속적인 시선의 굴절과 그에 따른 경관 체험의 반전을 동반한다. 숲을 디자인하는 것은 숲 자체의 디자인과 더불어 숲을 걷는 움직임을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 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