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어느 때인가부터 일 때문에 속이 쓰리면 인류사 책을 짬짬이 읽었다. 저마다 두꺼운 책 중 앞부분, 정원과 조경의 시작이 궁금해서 시간을 거슬러갔다.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대략 1만 년 전 농업 혁명이 일어나던 때다. 여기서 실용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를 따져서 농업과 정원을 엄밀히 구별한다는 것은 꽤 난감한 주제다. 그보다는 우리 인류가 나름의 목적과 의도를 지니고 자연을 가꾸는 행위를 시작했다는 데 초점이 있다.
사들인 여러 권의 책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은 것은 올해 인문학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상당 기간 올라 있던 『사피엔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저자 유발 하라리는 1만 년 전 지구에서 벌어진 혁명에 대해 다소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알고 보면 농업 혁명은‘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것이다. 몇몇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밝혀졌듯이 초기 농업인의 영양 섭취와 건강 상태는 이전 시기 수렵 채집인에 비해 상당히 열악했다. 농경을 시작한 결과 정착 생활을 하고 발아 단계의 도시와 문명을 창조했지만, 어찌되었든 농지를 돌보기 위해서 전에 없던
가혹한 노동이 줄기차게 필요했다. 인류라는 종의 관점에서는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었으니 진화의 법칙에서는 성공한 셈이지만, 인간 개체의 입장에서는 처절하게 실패한 혁명이었다. 인류가 거대한 진화의 법칙에 속은 것이다. 더 매몰차게는 밀이나 쌀을 비롯한 일부 곡물의 성공적인 생존 전략에 인류가 선택 당했을 따름이다(고정희의 책 제목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는 이런 의미에서 더욱 절묘하다).
150억 년 전 물질과 에너지가 모인 아주 작은 점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대폭발하면서 생겨나 지금도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 언젠가는 다시 수축하면서 원래 블랙홀로 돌아가기까지 우주론과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시간과 공간. 그 망망한 흐름 속에서 잠깐 미미하게 살다가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 셈이니 인간의 비루한 삶이란 애초부터 그랬던 것이다. 또 지구에 터를 잡은 생명체라면 어쩔 도리 없이 도도한 진화의 법칙에 매일 수밖에 없다. 법칙으로 환원되는 세계는 치밀하고 지루하며 끔찍하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작은 출구 하나를 열어 두었다. 터키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는 약 1만 2천 년 전의 유적이다. 20여 곳에 달하는 기념물을 이루는 돌기둥은 총 200개 이상이고, 가장 큰 것은 무려 높이 5.5m, 무게 7톤이었다. 또 미처 완성하지 못한 50톤의 돌기둥이 근처 채석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이 유적의 건설 시기가 농경의 시작보다 앞선다는 사실이다. 또 이 유적에서30km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은 밀의 변종이 최초로 생겨난 발상지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수렵과 채집을 겸하던 모종의 집단이 어쩌다가 먼저 공동체를 이루고, 종교를 비롯한 자신의 문화와 신념 체계를 만들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아직까지 목적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기념물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예상 밖으로 농업 혁명은 실용적 목적보다는 이런 사회 문화적 동력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로지 과학의 법칙으로만 인간 환경을 설명할 수 없다. 초기 인류사를 통해서 짐작하는 정원과 조경의 탄생은 대략 이런 풍경이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8년째 조경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느슨한 설계연대를 지향하는 스튜디오 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7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정원, 어린이 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놀이터, 가로 공원, 호텔 조경설계 및 감리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나중에 그 곳에 머무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땅에 뿌리를 박고 실천하는 조경 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철새협동鳥합』을 여럿이 함께 쓰고, 제프 마노의 『빌딩블로그』를 함께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