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아 ([email protected])
부산 황령산자락 물만골에 자리한 ‘부산물만골벙커’는 일제강점기부터 동굴의 형태로 전쟁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1968년 군 작전 시설로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계속 방치됐다. 최근 부산시는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서 벙커 재생 사업의 행정적 지원을 추진 중이었고, 지하 벙커와 그 일대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던 경동건설은 지하 벙커와 지상 대지의 연계 개발을 계획했다.
지난 3월 부산국제건축문화제조직위원회의 주관으로 ‘부산물만골벙커 국제아이디어공모’가 개최되었고 8월 15일 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1등작에는 다비데 디 프란코Davide Di Franco와 누리아 베르날 리베라Nuria Bernal Rivera의 ‘더 리본, 오가닉 컬처 파크The Ribbon, Organic Culture Park’가 2등작에는 주디 청Judy Cheung의 ‘마운틴 오브 컨템퍼러리 아트 부산Mountain of Contemporary Art Busan’이, 3등작에는 미하엘 에프레모브Mihael Efremov의 ‘케이브 타운Cave Town’, 프란시스 우Francis Wu의 ‘라이프스타일 리제너레이션 Lifestyle Regeneration’, 헤수스 헤르난데즈Jesus Hernandez의 ‘오픈 벙커Open Bunker’가 선정되었다.
부산물만골벙커는 재개발 중인 고층 아파트 단지, 부산 시청, 저소득 밀집 주거지인 ‘물만골마을’ 등이 있는 접근성이 좋은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벙커를 부산의 독특한 명소로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요구됐다. 주변 쇠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경제적인 면의 타당성도 고려해야 한다. 개미굴처럼 얽힌 구조, 연간 평균 온도 12.9˚C 등 벙커가 가진 독특한 장소성의 고려 유무도 중요한 평가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황령산 정상의 봉수대, 전망대 등의 관광 자원과 자연환경을 적절히 연계 및 활용한 계획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편, 공모 발주처인 경동건설은 기본적인 검토와 추후 논의를 거친 뒤 당선자와 함께 실시설계를 진행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부산물만골벙커 국제아이디어공모’의 심사평을 요약·정리한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콘셉트나 메시지가 강한 전달력이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쉽다. 특히 벙커의 활용에서 출발한 공모임에도 불구하고 벙커에서 유래한 개성 있는 콘셉트의 제시가 다소 미흡했다. 주변 자연환경의 생태성이나 경관성을 향상해 지하 공간을 외부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프로그램의 제시나 조형적인 시도도 부족했다. 프로그램의 창의성과 생태적 환경성, 단계적 개발 가능성과 실행성 측면에서 완결성을 갖춘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것은 본 프로젝트의 입지와 맥락이 갖는 한계 그리고 아이디어 공모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 있다.
1등작
역동적인 자연 경관 기반 시설을 표현한 작품으로, 산꼭대기를 둘러싸는 건물과 동선을 계획했다. 땅의 풍경과 문화 프로그램이 벙커를 연결하고,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제공하면서 천연 대지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다. 건축 개발 과정이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추후에는 프로젝트를 단순화하여 ‘리본’이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방법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등작
참신한 개념과 아름다운 형태를 보여주는 계획안이다. 가장 단순한 접근 방식으로 벙커와 산을 개발해 문화 명소를 제안했다. 열린 튜브 형태의 구조물 하나가 산을 관통하며 ‘겸손한 존재감’을 표현한다. 이 구조물은 중요한 기반 시설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자연 경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과 야생 동물, 식물을 위해 다양한 대지의 특성에 주목했다면 더 좋은 안이 되었을 것이다. 주차 및 전망 탑은 도발적이지만 대지에 전반적으로 적용된 최소주의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
3등작
‘케이브 타운’은 아름다운 개념과 도면을 보여준다. 이 계획안은 기존의 주거 유형에서 형태적 전략을 끌어와 발전시켰다. 하지만 산의 절반을 없애야 하기에 자연환경에 미칠 영향이 우려됐다.
‘라이프스타일 리제너레이션’은 산이라는 대지 조건에 가장 감각적으로 접근했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의 바탕을 이루는 도시와 기반 시설에 대한 생각 또한 훌륭하다. 벙커 입구에 제안된 극장과 한국 전통 탈 전시장 프로그램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파빌리온의 형태와 재료에 대한 전략이 다소 임의적으로 느껴져 아쉽다.
‘오픈 벙커’는 아름다운 도면과 벙커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프로젝트를 브랜드화하고 사용자가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막혀 있는 벙커의 체계와 반대로 열린 벙커를 개발한다는 접근 방안도 강력하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접근 방식이 결과적으로 산의 생태계를 크게 파괴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도시적인 전략을 더 발전시켰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