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 망국의 빛이 드리워지고 조선 건국의 조짐이 보이던 혼란스러운 시기인 14세기 말 15세기 초, 유럽에서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핏빛이 가득한 전쟁이 한창이었다. 바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루아르Loire 강변의 건물들이 요새 역할을 해준 덕분에 프랑스는 영국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요새는 아름다운 루아르 강변을 바라보며 오랜 전쟁의 피로를 푸는 오락과 휴양의 장소로 거듭나게 되었다.
프랑스 서남쪽, 길이 200km의 강변을 따라 위치한 인구 2,000명의 작은 마을 쇼몽에는 매년 30만 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간다. 세계 3대 정원 축제인 쇼몽 국제정원 페스티벌Chaumont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이 열리기 때문이다.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9개의 루아르 고성The Loire Valley between Sully-sur-Loire and Chalonnes 중 쇼몽 성Château-Chaumont에서는 1992년부터 쇼몽 국제 정원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이 축제에서는 작가의 개성이 담긴 정원뿐만 아니라 고성 곳곳에 전시된 예술 사진, 설치 예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축제는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열리며 올해는 한국 설치미술가 이배의 작품과 한국과 프랑스 작가의 합작품인 ‘대단원을 위한 정원Le Jardin du Dernier Acte’, 2015년 조성된 ‘한국 정원Le Jardin Coréen’등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기라도 하는 듯 한국의 색채를 축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다가올 세기의 정원
쇼몽 국제 정원 페스티벌은 매년 독특한 주제로 진행된다. 올해의 주제는 ‘다가올 세기의 정원Gardens from the coming century’으로 미래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프랑스에서 개최한 축제이니만큼 프랑스 작가의 참여율이 높지만, 국제 정원 페스티벌의 명성에 걸맞게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스위스, 미국, 벨기에, 캐나다, 한국 등 다양한 나라의 작가가 출전했다. 매년 300~400개의 출품작이 등록되고 그 중 25개 내외의 작품만이 실제 정원으로 구현된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특별한 자부심을 갖는 데, 축제를 준비하는 조직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관람객의 분위기가 여느 정원박람회와 다르기 때문이다. 진행위원회는 산업의 진흥을 위해 여러 물품을 모아 놓고 판매·선전하는 박람회와 구별되도록 작품 조성 의도를 부각시키고 관람객의 집중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정원을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이 관람하는 방문객의 모습은 쇼몽 국제 정원 페스티벌을 세계 조경가가 참여하고 싶은 3대 정원 축제로 만든 힘이다. 다가올 세기, 미래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2016 쇼몽 국제 정원 페스티벌에서 각기 다른 관점으로 표현된 24개의 작품을 통해 미래의 정원을 만나볼 수 있다.
케 비에네 라 플뤼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는 지구의 환경을 걱정하는 관점에서 표현한 ‘케 비에네 라 플뤼Que Vienne la Pluie’는 미얀마의 인레Inlé 강에서 영감을 얻어조성됐다. 마치 거대한 맹그로브mangrove 아래에 생긴 터널에 휴식 공간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이 정원은 하나의 실험장으로, 자연이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으며 인간이 자연 안에서 자유로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올해 쇼몽 국제 정원페스티벌에서 창작상Le prix de la Création을 수상하였다.
익스플로시브 네이처
미래의 환경이 아무리 척박해져도 자연은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 적응해나갈 것이다. ‘익스플로시브네이처Explosive Nature’의 거대한 구조물 틈새 사이사이에는 씨앗 폭탄Seed Bombs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식물이 자라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환경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요소로 표현됐다. 인간의 힘이 아닌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정원이 조성되는 모습을 통해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정원으로 디자인 및 혁신적인 아이디어상Design et idées novatrices을 수상하였다.
대단원을 위한 정원
안지성 작가가 참가한 한-프 합작팀의 ‘대단원을 위한 정원’은 트랑스포자블상Le prix du Jardin transposable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자연이 거의 남지 않은 2250년에 고가로 소비되는 제품이 된 자연을 느끼기 위해 극장을 찾아야만 하는 미래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같은 트랑스포자블상을 수상한 ‘누 아이언스 투 오 자르댕Nous Irons tous au Jardin’과 식물의 색채 및 조화상 Palette et harmonie végétales을 수상한 ‘르 자르댕 데 에멜장스 Le Jardin des Emergences’를 선보였다.
몇 백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정원박람회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지만, 3.5헥타르의 공간에 24개의 정원이 조성된 쇼몽 국제 정원 페스티벌이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정원 축제가 된 이유는 정원을 조성하는 작가의 철학과 개념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원을 단순히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다룬다. 또한 작가의 철학과 주제에 대한 개념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어떻게 물리적으로 표현되는지에 주목한다. 매년 사회적인 이슈 혹은 즐거움, 원죄와 같이 철학적인 주제를 선정해 정원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에 전 세계 조경가의 꿈의 무대가 될 수 있었다.
올 여름 프랑스 파리 혹은 유럽으로 휴가를 계획하고 있다면 쇼몽 국제 정원 페스티벌에 한번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왕이면 쇼몽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도록 여유롭게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매년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빛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저녁 축제가 열리는 데, 올해도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