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은 책은 읽지 않고 음악이나 듣고, 드라마만 보며 산다. 그래서 ‘네 놈이 읽은 책을 뱉어내라’는 죽비를 맞았을 때 궁한 마음에 이십여 년 전에 읽었던,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그들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먼저 이해를 구한다. 내 낡은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다 혹여 길을 잃더라도 당신은 명주실 되잡고 무사히 빠져나가시길 바란다.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있듯이 책 속에도 수많은 길이 있다. 그리고 어느 길로 접어드는가는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낸 운명 같은 일이다. 스치고 지나갔던 옷자락이 나중에 다시 만나 환하게 밝아지는 일은, 책의 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십여 년 전쯤, 짧은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사실 그 글은 연속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한 편만 쓰고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 와서 그 글을 어떻게 쓰게 되었을까 되짚어보니 꽤나 오랜시간 적잖은 만남이 거기에 얽혀 있었다.
1984년과 1985년 사이의 어느 날이었을 게다. 자주 가던 다방에서 사람들 틈에 있던 그녀는 ‘그’의 시를 내게 알려주었다. “갈 봄 여름 없이, 처형 받은 세월이었지 / 축제도 화환도 없는 세월이었지…”1로 시작되는 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2는 이 숨 막히는 시까지. 폭력과 저항이, 절망만큼이나 희망을 길어 올리던 그 시절을 실험적 언어와 도저한 슬픔으로 그려내던 황지우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고, 그의 네 번째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서 ‘산경山經’을 노래했을 때 기꺼이 그를 따라 『산해경山海經』3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와는 그즘에서 헤어지게 됐지만 말이다.
기원전 3~4세기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산해경』은 크게 ‘산경’과 ‘해경’으로 나뉘는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상상의 지리서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만 측정 가능한 위치와 상상의 동물, 불가해한 일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은이도 없이, 오랜 세월 주석만 첨삭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동아시아 정신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려 낸 책, 그저 이야기로만 듣던 해태며 봉황, 주작이 전부였던 내게 오백 리씩 가면 나타나는 그 많은 동물들이 멸종된 고대 생물로 느껴지는 떨림이었다. 글을 옮긴 정재서는 역자 서문과 그의 책 『동양적인 것의 슬픔』에서 고전이 담고 있는 다의적 함의와 여러 층위의 중첩을 풀어헤치며 “구조의 금간 틈, 차이에 대한 눈뜸은 항상 모든 지배적 언술 체계 내에 존재하는 이항 대립을 의식하는 시각으로부터 발생된다”4고 일깨웠다. 그리고 서구에 의해 타자화 되고, 다시 중국에 의해 타자화 되었던 중국 중심의 세계주의에 대한 독해를 위해 서쪽으로 2,765리 가면 만날 수 있는 사이드Edward W. Said를 불러들였을 때 ‘고조선에서 중화문화권에 속했다고 하는 조선까지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품으며, 예전에 스치며 지나듯 읽었던 먼지 덮인 문학잡지5를 다셔 펼쳐보게 되었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