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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맥락 무시하기
맥락의 이름으로
선유도공원, 청계천, 감천문화마을, 한양도성 길, 하늘공원, 서서울호수공원, 북한산 둘레길, 광화문광장, 북서울꿈의 숲, 이화동 벽화마을. 요 근래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다양한 조경 공간들이다. 프로젝트의 성격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고 디자인 방식도 전혀 다른 이 공간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얼핏 보면 서로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맥락context이다. 요즈음 좋은 디자인이란 곧 맥락을 잘 고려하고 반영한 디자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화제가 되는 새로운 조경 작품이나 공모전 당선안의 설명을 보면 대상지에 남아있는 지형이 되었든, 인근 마을의 설화가 되었든, 그곳에 찾아오는 철새들이 되었든, 항상 맥락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영화를 중간부터 보면 전후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맥락과 소통할 수 없는 설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좋은 설계는 맥락을 존중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명제가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가 않다. 오랫동안 맥락을 무시하는 태도가 좋은 설계의 당연한 전제였다면 믿겠는가? 그리고 이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설계의 가치이기도 하다.
맥락이라는 새로운 바람
잠시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하고 언제부터 맥락을 중심으로 설계의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자. 맥락이 설계의 중요한 가치로 대두하게 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설계에서 맥락이 지니는 의미를 편견 없는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날 조짐은 이미 1960년대부터 건축계를 중심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몇몇 선구적인 건축가들의 개별적인 실험에서 시작된 모더니즘은 곧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어 서구의 근대 문명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국제주의의 이름으로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로 전파되어 건축과 도시는 물론,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한다. 1960년대는 성기 모더니즘이 건축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시기였다.1 국제주의, 더 넓게는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적인 건축 운동인 모더니즘이 내세운 가치는 새로움과 보편성이었다. 새로움과 보편성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거의 모든 과거의 가치가 부정되고 지역의 특수성은 배격당했다. 이렇게 모더니즘은 거의 반세기 동안 인간의 정주 구조에서 맥락을 철저히 지워왔다. 모더니즘 거장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1960년대 들어서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모더니즘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결과는 거장들이 꿈꾸어오던 이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마을과 도시를 구성하던 골목들은 그리드 형태의 차도로 정리되었고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사람들의 소리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지붕의 모양을 보면 어느 동네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색 있던 건물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콘크리트 박스형 건축물들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공간이 되었다.
모더니즘이 유일한 건축적 양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를 어쩔 수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비서구권 건축가들의 괴리감은 더욱 컸다. 유럽과 미국의 젊은 건축가들 역시 모더니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모더니즘은 최소한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양식이었다. 그러나 제3세계의 건축가들에게 모더니즘은 서구에서 수입된, 어쩌면 강요되었을 지도 모르는 이질적인 양식이었다. 1960년대 정치적으로 과거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을 무렵 오히려 그들의 도시와 삶은 다시 근대화와 국제화라는 명분으로 종속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은 그들의 맥락을 파괴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서있었다.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왕국인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왜 지중해의 이상을 담은 수평창과 평지붕을 사용해야 하는가? 누구보다 강렬한 태양과 색채를 가진 멕시코에서 왜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회색과 백색의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동안 목조로 건물을 지어오던 일본에서 콘크리트와 철골의 건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그들의 건축을 시도한다.2 맥락이 다시 중요해진다. 그리고 완전한 제국을 완성했다고 자부했던 성기 모더니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새로움과 보편성보다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맥락을 중요시한 젊은 건축가들의 작업들은 이후 이론가들에 의해 맥락주의contextualism, 혹은 지역주의regionalism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된다.3 그리고 이 새로운 흐름은 모더니즘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선봉에 서게 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모더니즘이 끝났다는 선언은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이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제 거장들이 떠난 모더니즘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합 전선을 구성했던 후계자들은 모더니즘의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해야했다. 이때 역사, 의미, 상황, 장소성, 지역성, 정체성 같이 모더니즘이 부정했던 가치들을 포괄하는 맥락의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 맥락의 대두와 함께 조경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주목받기 시작한다.4
솔직히 말하자면 20세기 전반부에서 조경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근대 도시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공원이 근대적 의미의 조경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는 했지만, 인간의 정주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조경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경은 도시와 괴리된 낙원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그 모든 형태의 변화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공원은 극도로 열악해져만 가는 산업도시에 대한 구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면죄부를 주기도 했으며, 모더니즘이 과거의 맥락을 모조리 파괴해가는 과정에서도 이를 정당화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다가 맥락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에서 경관은 모더니즘이 장악했던 반세기 동안 잃어버린 가치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된다. 왜냐하면 맥락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경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관을 만드는 조경의 역할 역시 재조명받게 된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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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기억 속 서가의 풍경
‘정조의 상림십경’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즘은 책은 읽지 않고 음악이나 듣고, 드라마만 보며 산다. 그래서 ‘네 놈이 읽은 책을 뱉어내라’는 죽비를 맞았을 때 궁한 마음에 이십여 년 전에 읽었던,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그들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먼저 이해를 구한다. 내 낡은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다 혹여 길을 잃더라도 당신은 명주실 되잡고 무사히 빠져나가시길 바란다.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있듯이 책 속에도 수많은 길이 있다. 그리고 어느 길로 접어드는가는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낸 운명 같은 일이다. 스치고 지나갔던 옷자락이 나중에 다시 만나 환하게 밝아지는 일은, 책의 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십여 년 전쯤, 짧은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사실 그 글은 연속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한 편만 쓰고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 와서 그 글을 어떻게 쓰게 되었을까 되짚어보니 꽤나 오랜시간 적잖은 만남이 거기에 얽혀 있었다.
1984년과 1985년 사이의 어느 날이었을 게다. 자주 가던 다방에서 사람들 틈에 있던 그녀는 ‘그’의 시를 내게 알려주었다. “갈 봄 여름 없이, 처형 받은 세월이었지 / 축제도 화환도 없는 세월이었지…”1로 시작되는 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2는 이 숨 막히는 시까지. 폭력과 저항이, 절망만큼이나 희망을 길어 올리던 그 시절을 실험적 언어와 도저한 슬픔으로 그려내던 황지우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고, 그의 네 번째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서 ‘산경山經’을 노래했을 때 기꺼이 그를 따라 『산해경山海經』3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와는 그즘에서 헤어지게 됐지만 말이다.
기원전 3~4세기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산해경』은 크게 ‘산경’과 ‘해경’으로 나뉘는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상상의 지리서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만 측정 가능한 위치와 상상의 동물, 불가해한 일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은이도 없이, 오랜 세월 주석만 첨삭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동아시아 정신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려 낸 책, 그저 이야기로만 듣던 해태며 봉황, 주작이 전부였던 내게 오백 리씩 가면 나타나는 그 많은 동물들이 멸종된 고대 생물로 느껴지는 떨림이었다. 글을 옮긴 정재서는 역자 서문과 그의 책 『동양적인 것의 슬픔』에서 고전이 담고 있는 다의적 함의와 여러 층위의 중첩을 풀어헤치며 “구조의 금간 틈, 차이에 대한 눈뜸은 항상 모든 지배적 언술 체계 내에 존재하는 이항 대립을 의식하는 시각으로부터 발생된다”4고 일깨웠다. 그리고 서구에 의해 타자화 되고, 다시 중국에 의해 타자화 되었던 중국 중심의 세계주의에 대한 독해를 위해 서쪽으로 2,765리 가면 만날 수 있는 사이드Edward W. Said를 불러들였을 때 ‘고조선에서 중화문화권에 속했다고 하는 조선까지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품으며, 예전에 스치며 지나듯 읽었던 먼지 덮인 문학잡지5를 다셔 펼쳐보게 되었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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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태도, 접촉면 경관
1 사실 기고를 마음먹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조경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설계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기획 의도와 조금 더 먼저 이 길을 가고 있는 선배로서 조경을 시작하는 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편집진의 말을 수차례 들었음에도 맘이 내키지 않는 다. 학교를 벗어나 업으로서 조경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10년 남짓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여전히 헤매고 있는 풋내기 조경가가 지면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무모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2 “왜 요새 블로그1에 글 안 올리세요? 예전엔 종종 들어갔었는데.” 오랜만에 방치해 두었던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한동안 꽤나 정성들여 글이며 자료를 올렸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뜸해졌다. “요샌 바빠서. 정신이 없네.” 사실 바쁜 일상에 쫓겨서가 아니다.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생각들을, 여전히 진행 중인 실험들을 글로 적는다는 것이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 싶어진 것이다. 나는 신입사원 면접을 할 때마다 좋아하는 조경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다. 지원자의 설계적 성향을 파악해 보기 위함인데, 언젠가 한 친구가 “OOO이라는 우리 학교 선배요. 그 선배만큼 열정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답했다. 그때는 ‘이 친구는 아는 조경가도 한 사람 없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지나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태도’를 이야기 한 것이었다. 유명 작가의 작품집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멋진 디자인이나 철학보다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느낀 친한 선배의 ‘열정’이 더 큰 힘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지금 조경을 시작하는 그들에게,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열정’은 언제나 과정을 의미하며, 태도를 지배한다.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애쓰고 있는지가 오히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용기를 내본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들은 나의 조경에 대한 태도, 아직은 어설픈 과정의 이야기들이다.
3 “형, 형이 하는 설계는 잘 모르겠어요. 다이어그램도 이해가 잘 안 되고요. 꼭 그렇게 어렵게 조경해야 되나요” 몇 해 전이다. 한 후배 녀석이 우리 회사에서 제출한 설계공모 도판을 보았는지 술자리에서 묻는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설계공모 작업들은 잘된 설계안이 아닐뿐더러,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다이어그램은 복잡하고, 디자인은 매우 거칠고 개념적이며,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충분치 않으니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운 좋게 여러 작업들이 당선은 되었지만, 대상지에 대한 합리적인 해법과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명쾌하게 제시해야 하는 설계공모의 결과물로서는 사실 낙제다.
4 기술사사무소 렛의 장종수 소장님과의 개인적인연으로 시작하게 된 설계공모 작업들2은 나로서는 참 행운이었다. “우린 목표가 2등이야. 그냥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하자고.” 진심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고 하시니 맘은 편하다. 사실 당시 진행된 국내 설계공모 작품들을 보면서 항상 아쉽다고 느끼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동안 내가 배우고 공부해 온 해외의 많은 설계공모가 그러했듯, 설계공모는 작품을 통해 설계자만의 디자인 사고와 새로운 설계 기법, 여러 가지 도시적·사회적·철학적 때론 정치적 담론까지도 공론화할 수 있는 ‘설계안 이상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 시절 지겹게 보아왔던 라빌레뜨 공원이나 다운스뷰파크, 프레시킬스 뿐만 아니라 근대적 공원의 시작이자 최초의 공원 설계공모격인 센트럴파크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잘 뽑아진 결과물로서의 공간적·경관적 형태와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것은 좋은 설계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좋은 설계공모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5 또 다른 한 가지는 대상지(site)를 대하는 설계자의 태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대지와 설계안의 괴리감이다. 흔히들 우리가 설계해야 할 대상지는 백지가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설계는 직접적인 설계 대상인 대지, 그 장소에 담긴 경관(landscape)이라는 실체(substance)를 ‘탐구’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외부와의 물리적·비물리적 관계성 및 맥락성(context)을 통해 그 땅의 개념적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려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하다. 게다가 하이브리드라는 시대적 흐름은 개념이나 이론, 디자인 철학이나 방법론까지도 조경이 아닌 외부로부터 차용되어야 더 ‘쿨‘한 것으로 몰아간다. 경관이라는 실체에 대한 탐구와 내부로부터의 고민 없이 밖으로의 팽창만을 꿈꾸는 조경은 걱정스럽다. 우리가 의무감처럼 행해왔던 많은 분석 리스트 중에 순수하게 조경만의 언어로 대상지를 들여다보는 분석 방법은 몇 가지나 있는가? 그것만으로 우리만의 디자인을 이끌어 내기에 여전히 충분한가? 그리고 그것들은 디자인으로 잘 발전되어 왔나?
6매번 설계공모 작업 때마다 고민하고 전달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우리가 항상 다루어야 하는 땅에 관한 이야기,‘그 장소만의 경관 체계(landscape system)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 나갈 것인가’와 해석된 경관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롭게 들어오는 이종(異種)의 조직 속에서 작동 가능한 새로운 경관,즉 변이적 경관(landscape cultivar)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파주운정지구 도시기반시설 조경설계공모(2007)에서는 대상지의 경관을 형성해 온 기작과 새롭게 형성되는 도시의 기작을 중첩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 대지에 순응하며 도시 조직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경관을 제안하고자 하였고,강북생태문화공원 설계공모(2008)에서는 대상지 내부의 자연 조직과 도시 조직이 만나는 추이대 형성 과정을 통해 대상지의 경관을 조직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체계인 메타스케이프(metascape)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충북혁신도시 설계공모(2008)에서는 대상지에 존재하는 일상적 경관 중 가장 마이크로한 경관 요소들을 찾아 이들의 재조합을 통해 경관 중합체(landscape polymer)라는 대상지만의 경관이 내재된 변이적 경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고,하남미사지구 설계공모(2009)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대상지의 경관을 지배해 온 농지의 미세 지형과 시스템,조각 숲의 구조와 기능을 새로운 공원의 기반적 시스템(infrastructural system)으로 적용해 보고자 하였다.
내곡 보금자리지구 조경설계공모(2010)에서는 지형 구조가 도시의 공간감과 스케일,생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서울의 팽창 과정을 되짚어 봄으로써 알아보고자 하였고,송산그린시티 철새서식지 설계공모(2011)에서는 대상지를 여러 유형의 비오톱 조합체로 인식하고,대체 서식처로서의 작동을 위한 필수적인 비오톱을 선정하고 이들의 이식(grafting)과 복제(cloning),재조합(re-organization)을 통한 단계적 서식처의 복원을 제안하였다.
7물론 지금까지 해온 나의 작업들이 깊이 있는 논쟁을 끌어낼 만한 것들이 못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경관을 바라보는 일관된 가치관’을 가지고 설계에 접근하려고 애써 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어 놓는 사람들이,설계자의 가치관들을 각자의 설계 언어로 꾸준히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이 더욱 많아지길 바란다. 또 그러한 노력들이 현장에서 설계 작업을 실제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 설계가들은 매일 생각하고,시도하고,시행착오를 거친다. 조경이라는 실용적 학문에 있어서 이러한 피드백의 과정은 더 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이며,설계자 개개인이 자기만의 경관을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우리나라 조경의 스펙트럼이 더 다양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8경관은 하나의 장소가 작동하기 위한 공감각적 시스템이다. 사실 경관은 마치 수백만 개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작은 톱니바퀴들처럼 그곳만의 조직으로 오랫동안 서로 맞물려 작동하며 만들어진 커다란 아날로그시계와도 같다. 경관은 시간을 거슬러 하나의 장소가 작동되어 오던 그 장소만의 역사적·사회적·생태적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담아낸다. 씨앗이 토양과 소통하며 뿌리를 내리고 환경―비,바람,기온,습도 등에 반응하며 그 장소만의 식생을 이루는 것처럼, 인간이 대지와 소통하며 경작을 하고 길을 내고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경관은 그 속에 담겨있는 요소들 모두가 서로 반응하며 지금껏 만들어온 ‘장소와 요소, 요소와 요소들 간의 소통’에 의한 결과물인 것이다.
또한 경관은 이러한 장소의 시스템으로부터 파생된 2차적 무형의 산물, 즉 공간에 대한 감흥을담는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그때의 분위기나 느낌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워했던 경험처럼,경관은 한 장소의 소리,향기,촉감,공간감,문화,역사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장소만의 고유의 공기를 담는 공감각의 매체(synaesthetic media)다.
9변이적 경관(landscape cultivar). 우리가 설계를 해야 하는 대상지는 오랜 시간 땅과 소통하며 그 장소만의 공감각적 경관을 담고 있는 물리적 바탕이기도 하지만,동시에 앞으로 이 땅을 이용하게 될 새로운 이용자들과도 지속적으로 소통하여야 할 시간적 매체(temporal media)이기도 하다. 이때 대상지의 표면(surface)은 단순히 경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실재하는 지형적 베이스(topographic base)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대상지의 역사,문화,생태계를 포함하는 이 땅의 ‘과거의 기억’을 유일하게 담아내며 현재와 관계를 맺어주는 오래된 사진 앨범과 같다. 우리들 스스로 항상 되뇌는 말처럼,‘조경’이라는 작업이 단순히 대지를 ‘화장’하는 일이 아니기 위해서는 우리의 설계가 단순히 미학적 가치를 넘어 이 땅의 경관이 가지고 있는 내재된 경관,그 기억을 드러내고,그것이 이 땅에 들어올 새로운 조직과 유연히 작동할 수 있도록,두 조직 간의 상충(contradiction)을 경관적으로 중재(arbitration)하는 작업이 되어야함을 이야기한다. 변이적 경관이란 ‘변이’라는 말 자체가 담고 있는 것처럼 ‘본질’,이 땅의 ‘경관적 정체성’을 벗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지의 기억이 말끔히 지워진 새로운 ‘B’라는 제3의 경관이 아니라 ‘조건과 입장이 다른 여러 켜들이 얽혀서 생성적 배역을 해나가는 조경의 역할3’,즉 ‘A-1’의 경관인 것이다.
10접촉면 경관(interface landscape). 벌써 10년 전이다. 나의 블로그 타이틀이기도 한 이 용어는 대학원에서 MVRDV의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내 가슴에 박혀 버렸다.“세계는 세계와 우리의 접촉면의 관계 안에서 변화한다. 세계의 한계는 우리 접촉면의 한계다. 우리는 세계의 실체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의 접촉면 과 상호작용한다.”4
그들이 꺼내 놓은 이 단어는 내가 그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한 해법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왜 대상지의 경관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해 주었다. 사실 ‘접촉면’이라는 우리말보다 ‘인터페이스’라는 외래어가 더 익숙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핸드폰,인터넷,각종 프로그램,게임 등 우리는 하루에 수십 가지의 인터페이스를 만난다.
우리가 매일 쓰는 포토샵의 바탕화면은 버전 업이 될 때마다,새롭게 바뀐 디자인에 놀라워하기도 하지만,바뀐 아이콘 위치에 곧 당황스러워 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포털사이트 역시 어떤 사이트의 홈 화면은 잘 정리되어 쉽고 정확하게 그날의 정보를 전달하는 반면,어떤 곳은 쓸데없거나 잘못된 기사들을 제공해 오히려 시간만 허비시키거나 사건에 대한 오해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조경 설계라는 작업은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웹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할 때,사용자는 ‘인터페이스 화면’이라는 유일한 매개면 만을 통해서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능과 정보와 소통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상지’ 역시 이용자가 한 장소에 담긴 다양한 경관적 정보들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적 매개면(environmental agency)이며,설계자가 어떠한 경관적 잠재력을 읽어내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땅에 대한 의미와 이용자들의 이해는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하고 있는 ‘조경’이라는 작업은 대상지와 이용자 사이의 역사, 문화, 생태 그리고 공감각적 감흥을 포괄하는 접촉면 경관을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것을 통해 이 땅의 가치를 이해하고, 경관과 소통하고, 장소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의미 깊은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11‘또 대상지?’ 사실 진부한 것은 대상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만의 눈으로, 보다 창의적으로 대상지를 깊게 들여다보고, 각자가 읽은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밖으로부터의 언어들과는 차별되는 우리만의 디자인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고 의미 있어지지 않을까.
각주 1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www.cyworld.com/interface_landscape)”란 이름의 개인 블로그를 2004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조경 설계에 관심 있는 동료나 후배들과 나의 고민과 자료를 공유하고 싶단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늘 나의 조경 사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수학 소장(아뜰리에나무)의 열정을 좇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각주 2
이번호에 소개하는 설계공모 작업들은 SWA Los Angeles재직 당시 기술사사무소 렛과 개인 자격으로 협업하였거나, 이후 기술사사무소 렛의 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작업한 것들이다. 그중 파주운정지구 도시기반시설 조경설계공모(나군, 2007), 강북생태문화공원 설계공모(2008), 충북진천·음성 혁신도시 조경설계공모(A구역, 2008)는 당시 SWA 동료였던 서울시립대학교 김영민 교수와 함께 작업하였다.
각주3
정욱주,“상충의 도시, 생성의 층위”,『LAnD: 조경·미학·디자인』,도서출판 조경, 2006.
각주 4
Peter Weibel, “Architecture as Interface”, MVRDV, MVRDV at VPRO, Actar, 1998. 재인용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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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래리 기키 & 채드 기키
올드 컨트리 마켓
연중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원시 자연으로 널리 알려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대표적 관광지, 밴쿠버아일랜드Vancouver Island에는 쿰스Coombs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인구 천여 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평범한 시골 마을은 아닌 것이, 연간 1백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올드 컨트리 마켓Old Country Market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겐 비단 물건을 사거나 간식을 먹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
지난 40여 년간 수많은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낸, ‘풀이 무성한 지붕sod roof과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을 구경하는 일’이다. 처음엔 그저 대책 없이 자라는 풀을 일일이 자르기가 귀찮아 올려놓은 염소들은 어느덧 “Goats on the Roof지붕 위의 염소”라는 브랜드로 정착될 만큼 유명해졌고, 지역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며, 변방의 작은 마을 쿰스를 세계에 알리는 아일랜드 스타일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운전을 하던 사람들도, 지붕 위에서 어슬렁거리는 염소들을 보면 일단 차를 세우고 잠시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린이들에겐 너무나 신기하고 즐거운 광경일 것이다. 현재 활동 중인 네 마리의 염소들은, 피치스Peaches, 포피Poppy, 캐러멜Caramel, 엉클 베니Uncle Benny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미 은퇴(?)한 놀Knoll과 토트Tott가 있다. 염소가 보이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할 만큼, 아이들에게 네 마리의 염소는 꼭 만나봐야 할 슈퍼스타에 가깝다.
1950년대에 노르웨이에서 캐나다로 이민 간 크리스티안 그라틴Kristian Graaten과 그의 아내 솔베이그Solveig는 1973년, 과수원에서 직접 수확한 과일들을 한적한 도로변에 놓고 팔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 허기진 관광객들을 위해 햄버거를 메뉴에 추가하면서, 그들은 작은 마켓 건물을 지으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고향 릴레함메르Lillehammer에서 일상 풍경이었던 녹색 지붕을 떠올렸다. 노르웨이의 시골에서는 경사진 언덕에 기대 헛간을 짓고, 지붕이 대지와 연결되도록 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흙과 풀로 덮인 지붕은 겨울이면 단열재가 되고, 여름엔 증산 작용으로 인해 냉각 효과를 볼 수 있다. 연로한 부부는 아들인 스베인Svein과 앤디Andy 그리고 사위인 래리 기키Larry Geekie의 도움을 받아 소박한 건물을 지었다. 당시에는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염소지붕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가판대에서 시작한 올드 컨트리 마켓은, 이제 슈퍼마켓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 가게, 125석 규모의 카페테리아,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채소 가게, 서핑보드숍, 훈제연어 델리, 베이커리, 수입 식품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기프트 숍, 모종과 원예 식물을 판매하는 화원, 중국 골동품 가게, 패션 부티크 등 다양한 업종들이 성업 중이다. 여름 휴가철이면,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도로변 갓길 수백 미터 뒤까지 차를 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유일한 불만은 이곳이 언제나 지나치게 붐빈다는 것이다. 올드컨트리 마켓 덕분에 주변의 소매점들 또한 덩달아 혜택을 보고 있다. 비즈니스의 성공을 짐작할 수 있는 일면으로, 사장 래리 기키의 가족들은 동절기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세계 곳곳으로 긴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와 좋은 제품들을 다시 올드 컨트리 마켓으로 들여와 판매하고 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염소를 보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한다. 날씨가 춥거나 혹은 염소가 집에 들어가 버리거나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염소는 조각품이나 벽화가 아닌 살아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지붕 위의 염소들은 사람들의 바람이 무엇이든 간에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한다. 물론 염소를 볼 수 없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사실 마켓 운영의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염소를 보겠다며 다시 찾는 손님들도 많고, 얼굴만 빼꼼히 내밀던 염소가 풀을 뜯으러 등장이라도 하면 그 자체가 이벤트가 되기 때문이다. 염소를 여러 번 보았다 해도 무생명의 물체와 달리 하나의 작은 생명의 면모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다시 보아도 여전히 지루하지 않다. 사실 ‘지붕 위의 염소’에서 실제 염소의 출현은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 콘셉트 자체가 귀엽고, 그들이 지붕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직접 눈으로 염소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광경으로부터 우리는 잊고 있던 시골에 대한 향수와 지역성 그리고 편안하고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 지붕 위에서 염소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슈퍼마켓이라면, 그 내부 또한 한 번쯤 들여다봐야 할 만큼 재밌는 곳이 아니겠는가. 이건 어떨까하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지붕 위 염소의 성공은, 창의성이란 지역과 자본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래리 기키의 아들이자 삼대 째 가업을 잇고 있는 채드기키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생으로, 그룹한 뉴욕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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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원의 8경
다시, 정원을 말하다
어울누리뜰
2010년 가을, 서울그린트러스트의 스무 번째 ‘우리 동네 숲’으로 조성된 이 정원은 20년 넘게 방치되어 있었던 잡초 밭을 휴식 뿐 아니라 텃밭 활동, 가드닝 활동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한 프로젝트였다.
서울그린트러스트에서 마련해준 설계비를 종잣돈으로 필자와 복지관 간의 기부와 매칭의 룰을 만들었고, 마스터 가드너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정원을 관리해줄 가드너가 필요했던 복지관과 학생들과 함께 정원실습을 할 공간이 필요했던 필자 간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져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정원에는 많은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 정원이 스스로 자라난 것도 있고,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보태져 지금의 모습으로 가꿔나간 부분도 있다. 호미질만 신경 쓰고 기록에 소홀하다보니, 지난 3년 동안 남긴 것은 사진과 수목 거래 명세서들뿐이다. 준공 당시 96주의 수목과 7,860본의 초화를 심었고, 완공 이후 지금까지 45주의 관목과 2,830본의 초화를 추가로 식재하였다. 이것은 구매한 물량이고, 주변 경사지에서 채집해 오거나 씨를 받아서 퍼뜨린 초화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은 식물들이 이 정원에서 자라고 있다. 그밖에도 모름지기 정원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조각 한 점과 물확 한 점을 들여와 나름 정원의 구색을 갖추었다.
아직 노련함과는 거리가 있어서 구상한대로 정원이 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놈들은 계속 비실거리고, 어떤 놈들은 너무 왕성해서 이제는 뽑아내야 할지경이며, 이에 더해서 잡초들은 항상 왕성하게 자라서 분위기를 부산하게 만들고 있다. 잡초도 삶의 투쟁을 하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서로의 운명이 엇갈렸으니 어쩌겠는가. 계속 나고 계속 뽑고…. 정원이 유지되는 한 반복될 작은 전쟁이다. 볼만한 정원 사진 한 장 갖고자 하면 수 시간 품을 팔아야 가능하다.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정원에 대한 희망은 포기한지 오래다. 정원은 사람 손때가 층층이 묻어있는 인공물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다. 그린 섬Green Thumb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 과정상의 즐거움도 적지 않다. 가꿈의 대가로 정원이 돌려주는 소박한 보상이랄까. 식상한 방식이지만 현 시점의 ‘어울누리 뜰의 소소한 8경’을 선정하여, 이 정원이 필자에게 되돌려준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한다.
1景 겨울의 스산함 속의 봄기운
겨울의 허전함이 나쁘지만은 않다. 설계를 하다보면 클라이언트들은 겨울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꽃이나 열매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지만 앙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봄기운이 막돌기 시작하기 직전까지 겨울의 정원은 밋밋하고 허전하다. 하지만 이내 돌단풍, 돌나물 등 손톱만한 새순들이 웅성대기 시작하고, 신록이 정원을 덮는 데는 몇 주 걸리지 않는다. 항상 경이로운 봄의 원기 왕성함은 스산한 겨울이 있어서 대비되고 증폭된다. 겨울이 겨울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과대한 노력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정취를 연출하기 위해서 수크령, 억새 등의 그라스 등과 큰꿩의비름처럼 꽃대가 녹지 않고 겨울을 버티는 초화들이 역할을 다하고 있다. 새순이 와글대는 초봄에 이들을 잘라주며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2景 보라 보라 보라 보라
늦가을 심어둔 구근류는 초화 팀의 선두 타자다. 크로커스가 아직 겨울 분위기인 정원에 듬성듬성 보라를 선보인다. 이어서 무스카리가 방울방울 보랏빛을 선보인다. 무스카리가 타석에서 물러설 즈음 매해 영역을 넓히고 있는 아주가가 비슷하지만 또 다른 보라색을 뿜어낸다. 4번 타자는 자란이다. 우아한 자태의 자란은 매력적인 보라 꽃의 정점을 찍는다. 물론 이 순서를 알고서 플랜팅을 한 것은 아니고 가꾸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쨌든 보라 정원의 연출 순서 아이디어를 덤으로 얻게 되었다. 4, 5월의 어울누리뜰은 보라다.
정욱주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였고, 올린 파트너십(Olin Partnership)과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조경가로 활동하면서 대규모 도시 공원, 대학 캠퍼스 마스터플랜프로젝트 등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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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책으로 말하다
다시, 정원을 말하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길을 잃다
2005년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 해였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 언저리의 어느 날이었고, 겨울이었다. 모임에 참석했던 누군가 “정원 일은 봄이 아니라 겨울부터 시작되는 법”이라며, 정원 책을 위해 마련된 겨울 모임을 반겼다. 세 명의 필자와 한 명의 편집자가 마주 앉아 세 시간여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리가 파할 무렵 새로운 기획안이 싹텄다. 세 명의 저자가 1/3씩을 맡아 『유럽 정원박람회를 가다』란 제목의 책을 펴내려던 애초의 구상을 백지화한 대신, 세 명의 필자가 각기 한 권씩의 책을 따로 펴내기로 한 것이다. 첼시 플라워 쇼로 대표되는 영국의 다양한 정원 축제와 매년 개최 장소가 바뀌는 독일의 정원박람회는 그 배경과 성격이 꽤 상이하고,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관련 내용이 풍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맡기로 한 권진욱 교수 역시 쇼몽 가든 페스티벌과 관련된 자료 축적이 상당한 상태였다. 그렇게 해서 『영국의 플라워 쇼와 정원 문화 - 정원 디자인의 최신 경향과 실험적 사례들』(윤상준, 2006년 4월 15일 출간)과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 정원박람회가 만든 녹색도시를 가다』(고정희, 2006년 6월 10일 출간)1를 두 달 간격으로 잇따라 펴냈다.2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정원 관련 도서를 기획해보고자, 틈 날 때마다 대형 서점의 정원 서적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당시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는 적어도 세 군데 코너는 돌아야 정원 신간을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가장 많은 종수를 자랑하는(?) 정원 가꾸기 실용서는 ‘여행·취미·생활·건강’코너에, 몇 종 되지 않았던 정원 이론서와 전원주택 정원처럼 건축(집짓기)과 관련된 정원 만들기 책은 ‘과학·기술공학’ 코너에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찾기 어려웠던 책은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한 정원 에세이였다. ‘소설·시·에세이’ 코너에 비치된 이 책들은 출간 직후 한창 잘 팔리는 시기에는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어 손쉽게 확인이 가능하지만,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물론 출간 당시 일간지 북 섹션을 비롯해 여러 경로를 통해 관련 정보가 퍼져나가기에 대부분은 출간 여부를 인지하게 되지만) 출판사 이름 가나다 순서대로 혹은 책 이름 가나다순으로 자리를 부여 받기 때문에 검색을 하지 않으면 쉬이 발견할 수 없다. 도서검색대에서 ‘정원’이란 키워드를 입력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검색을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정원’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 중에서 정원과 관련 없는 책이 최소 10배 이상은 된다. 또 ‘정원’을 출판사 이름에 사용하고 있는 곳도 서너 곳 있을 뿐만 아니라, 필자 이름에 ‘정원’이 포함된 경우도 적지 않다. 끝없이 이어지는 검색 결과를 몇 차례 클릭하다가 상세 조건 검색을 시도하지만,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다. 건축 도서가 아주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책부터 대중적인 에세이까지 비교적 가까이 몰려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일례로, 서현 교수의 『빨간 도시』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같은 에세이도, 건축 이론서도, 건축 비평서도, 건축기사 문제집도, 구조와 설비를 다루는 실용서도, 집짓기 책도 모두 ‘과학·기술공학’ 코너의 건축서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물론 건축가 조한의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처럼 ‘인문·역사·문화’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이는 일부러 의도했을 가능성이 크고), 어떤 건축가는 왜 건축 책이 ‘예술’ 코너가 아니라 ‘과학·기술공학’ 코너에 있냐며 발끈할 수도 있겠지만, 길 잃은 아이마냥 이 코너 저 코너를 기웃거리다 검색 한 번 하고 다시 새로운 코너로 발걸음을 옮길 때면, 절로 투덜거림이 삐져나온다. 그렇게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몇 차례 돌다가 ‘정원은 과연 무엇인가’란 근원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물은 적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기특한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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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가능한 정원의 꿈, 콘크리트 공원과 텃밭
3인 3색 정원 단상
현 시대 한국의 일상에서 정원이 차지하는 의미나 형식을 쉽게 떠올리기란 힘들다. 자연의 일부를 떼어 주거 공간 속에 조형적 모양새로 인위적으로 옮겨놓은 게 정원일 것이다. 정원은, 현실적으로 자연에서 격리된 동시대인에게 자연과 통하는 해방구를 제공했다.
하지만 필자가 동시대 한국의 시공간과 정원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건, 우리의 주거 문화를 지배하는 일반론이 정원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주거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아파트는 물론 이거니와 오피스텔과 원룸까지 무수한 거주 공간이 정원의 자리를 배려하지 않은 채 설계되기에, 몰개성한 복층 구조의 건축물이 일반적이다.
내가 거주하는 곳 인근에 보라매공원이 있다. 정원이 개인 거주지 안에 작은 녹지를 조성하는 것인데 반해, 공원은 정원이라는 개인 사유지를 공공 영역으로 확대한 버전일 것이다. 연못, 잔디 광장, 다목적 운동장 따위를 패키지로 묶어 시민들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보장하는 보라매공원의 원래 목적은 군사 교육 기관이었다. 과거 공군사관학교 터를 보수하면서 용도를 공원으로 변경시키고,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인 보라매를 공원 이름으로 따온 것이 현재 보라매공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계의 유수한 공원들 역시 처음부터 공공을 위한 놀이터로 설계된 건 아니었다. 왕족과 귀족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사냥터가 공화정이 들어서면 서 시민에게 공간을 내주게 된 것이 동서양 공원들의 일반적인 과거사인 점을 감안할 때, 공원은 소수 최고위급 인사들이 보유한 커다란 정원이었던 셈이다. 정원의 먼 선조로 흔히 예시되는 네바문 무덤 벽화도 마찬가지이다. 당대에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은 이집트서기 출신 네바문의 무덤 안 벽화에는 정원이 묘사되어 있다. 이 벽화를 통해 기원전 정원의 윤곽을 추적할 수 있다. 직사각형 호수와 그 주변으로 가지런히 심은 수목들이 기원전 정원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이는 현대적 정원과 큰 틀에서 차이가 적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이 서구의 정원과 변별되는 바위 정원rock garden의 전통을 갖는데 반해, 한국 정원 문화에 관해 검색하면 복층 구조의 동시대 주거 문화 때문인지 윤보선 고택, 성락원, 운보의 집, 대원군의 별장이었으나 고급 한정식당으로 변형된 석파랑 정도만 간신히 잡힌다. 모두 동시대 현존 인물의 정원으로 규정하기 힘든 사적지이거나, 혹은 준 공공을 위한 장소들이다. 사유지 정원의 확대 버전인 공원이 동서 공히 왕족과 귀족의 놀이터를 위해서 녹지를 조성했다는 사실로부터, 현대적 미술관의 기원인 루브르 박물관의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면서 루브르 궁전을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는 장소로 용도 변경해서 썼다.
반이정은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로 『중앙일보』, 『시사IN』, 『씨네21』, 『한겨레21』 등에 미술 평론을 연재했고,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사 칼럼을 연재했다.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세종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취미 이상의 애착을 지닌 자전거 마니아로도 알려져 있다. 쓴 책으로 『새빨간 미술의 고백』 외에 『아뿔싸, 난 성공하고 말았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2.0』,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가지 매력』, 『웃기는 레볼루션―‘무한도전’에 대한 몇 가지 진지한 이야기들』, 『나는 어떻게 쓰는가』, 『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등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에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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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원, 천천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찾아올 문화
3인 3색 정원 단상
중세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1375)의 소설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돌던 중세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배경이다. 이야기는 열 명의 젊은 남녀가 흑사병이 퍼진 도시, 피렌체를 떠나 가까운 시골 마을인 피에솔레의 한 저택에서 보름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매일 밤 저택의 정원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열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날의 최고의 이야기꾼을 선정하는 놀이를 했다. 보름이긴 하지만 일주일 중 하루는 합창의 시간으로, 또 다른 하루는 신의 날로 정해 쉬었기 때문에 딱 열흘간, 열 사람의 총 백 개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책의 제목이 ‘열흘’이라는 뜻의 데카메론이다.
여기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물론 소설 자체를 분석하기 위함은 아니다. 정원 이야기를 하고 싶다. 보카치오는 이 소설을 실제로 흑사병이 돌던 1348년부터 구상했고 병이 잠잠해진 1353년에서야 원고를 탈고했다. 그러니 흑사병을 피해 시골의 주택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설의 설정은 단순한 이야기 전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어찌해볼 수 없는 재앙 속
에서 보카치오가 상상해낸 혹은 실제로 해보았을 현장상황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싶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사실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검은 쥐가 옮기는 전염병인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인구의 30~60%를 잃게 된다. 통계상으로만 짐작해도 두 사람 중 하나, 4인가족이라면 그중 반이 병으로 죽은 상황이다. 나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 사람들은 병에 걸린가족을 돌보는 대신 이들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보카치오가 이런 상황 속에서 시골 저택의 정원을 떠올렸다는 것이 놀랍고 신선하고 그리고 참 당연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때의 내가 보카치오의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도 전염병이 들끓는 도시를 떠나 시골집에서 큰 안식과 위로를 받지 않을까 충분히 상상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 예를 들 수도 있다. 나의 어머니는 지병인 당뇨 합병증으로 1년간 투병을 하시다 결국 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진단을 받고 어머니께서 가족에게 한 부탁은 자신을 병원에서 꺼내 어머니의 친정인 충남논산의 시골집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건 생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담긴 마지막 소망이었다.
오경아는 방송작가 출신의 가든 디자이너로 다양한 영역과의 협업을 통해 독창적이면서도 상호 조화로운 정원의 세계를 꿈꾸는 중이다. 16년간의 방송작가 활동을 접고 2005년 영국으로 떠나 The University of Essex에서 조경학을 공부했고, 이후 2012년 귀국해 정원 전문회사 오가든스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네이버캐스트에서 연재한 정원 콘텐츠를 엮은 『정원의 발견』을 비롯해 『소박한 정원』, 『영국 정원 산책』 등 다수의 정원 관련 서적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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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살구나무 아저씨였다
3인 3색 정원 단상
창이 없는 집은 무덤이다. 그래서 죽음은 미니멀한 풍경이다. 종묘가 그렇다. 왕의 죽음들이 늘어 서 있는 풍경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과 달리 극단적이다. 처음 지하철을 설계한 사람들은 지하에 풍경이 있을 리 없으므로 창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철이 풍경이 없는 땅 밑을 다니는 교통수단이라는 것만 생각했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걸 놓쳤다. 아무 볼 것도 없는 밖이지만 사람들은 창을 원했다. 지하철에 창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창은 바깥을 보기 위한 통로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내면이 가 닿는 깊이가 있다. 그 깊이는 바로 자기의 깊이다. 창을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내면을 자주 들여다 볼 용기가 없거나, 여유가 없는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란 말이 있다. 시계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남들의 삶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창은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가 닿는 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창을 통해서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본다. 창을 보고 있는 시선은 그래서 깊다.
창이 건물의 높이에서 안과 바깥의 드나듦과 넘나듦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과 연결한다면, 정원은 건물의 바깥에서 우리를 자신의 내면에 있게 한다. 자신의 정원에 서 있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들어 와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조선 정원이 다른 정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조선 정원은 조성자의 안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일본 정원처럼 자연을 모사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 정원처럼 대상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지 않는다. 조선 정원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조선 정원은 건축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원 자체로 독립적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땐 건축이 정원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니, 많은 경우 조선 건축은 정원의 한 대상이다. 조선의 건축은 정원에 포함되고, 정원은 원림에 포함되고, 원림은 산수에 포함된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큰 그림이 산수지리山水地理다.1 조선의 건축은 산수지리-원림-정원-집의 순으로 접근해 간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려서 집의 자리를 잡고, 거기에서 다시 집안에서 바깥으로의 시선을 창을 통해 구현하고, 그 바깥에 내면을 표현한다. 그것이 조선의 정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조성자의 삶의 통찰, 철학적 배경이 없을 수 없다. 또 그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 상징이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조선의 정원은 간단하다. 연못,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가 상징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산수와 만나면 더 큰 이야기가 된다. 그 옛날 한양과 같이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도 인간의 삶과 자연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산수지리의 원리가 지켜졌기 때문이다. 정원이 없어도 도시 자체가 산수지리의 맥락에 있었고, 그 큰 흐름 속에서 집들이 자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성호는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1년 『공간』에서 건축평론신인상을 받으며 건축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텃밭정원 도시미학』(공저), 『반하는 건축』을 썼다. 현재 건축실험집단 EON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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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되새겨야 할 정원의 정체성
다시, 정원을 말하다
정체성 혼돈의 시대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근본적 질문중 하나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유사 이래 수많은 종교와 철학 또는 예술 분야에서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 질문은 우리 앞에 정답 없는 물음표로 남아 있다. 어쩌면 수학 공식 풀이와 달리, 명쾌하게 답을 찾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회를 정의하고, 그 사회에 속해있는 인간을 정의해왔다. 18세기 이전에는 사회의 변화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사회적 콘텐츠 또한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가치관에 대한 정의 역시 다양성보다는 깊이 있는 사고를 토대로 내려졌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사회를 둘러싼 모든 속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고,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콘텐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우리 사회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물리적·정신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정체성의 혼란(때로는 이러한 혼란을 미적인 가치로 표현하기도 하지만)을 야기하기도 했다. 덕분에 다양한 가치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깊이 있는 가치를 상당 부분 놓쳐버리는, 그래서 이제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 가벼운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21세기 들어 발생하고 있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이러한 정체성의 부재, 또는 혼란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빠른 성장’이 만들어 놓은 성과물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그 성장에 따르는 혼란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이후, 정원garden은 시민 사회의 성장과 함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으며 빠르게 발전하는 듯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정원의 정체성, 통제의 그늘
지금의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정원 열풍’을 바라보면, 바람은 불고 있으나 방향성을 잃은 채 지독한 편가르기 양상마저 보이고 있어, 시대적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마치 엄마와 아들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원 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정원의 정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정원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즐거움”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순수한 즐거움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자연과의 공존 또는 소통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울타리를 두르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연을 통제하며 정원을 만들어 왔다.
과거 자연의 어마어마한 위력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자연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정원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는 통제라는 권력의 단편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사회적·경제적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원은 자연스럽게 힘 있는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18세기 영국에 불기시작한 풍경화식 정원 열풍은 프랑스의 인위적인 정원이 자연과의 공존을 방해한다는 반성에서 출발해 자연을 닮은 정원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은 노예들의 노동력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의 공존은 이루었을지 몰라도 사람들 간의 공존은 오히려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힘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준규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친 후, 삼성에버랜드에서 10년간 조경 디자이너로 근무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011년 좀 더 깊이 있는 정원 공부에 뜻을 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University of Essex, Writtle School of Design에서 정원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Intangible Garden Heritage’를 주제로 박사 과정 중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 정원을 영국에 소개하고 있으며, 푸르네정원문화센터 이사와 월간 『가드닝』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