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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가출하자, 조경 3세대
  • 환경과조경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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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조경가 30인의 성장사와 비전을 다룬 이번 호의 특집 ‘조경가로 자라기’를 준비하며, 그리고 그들이 보내온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20년 전 영화를 떠올렸다. 그들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거나 10대였던 1994년의 영화다. 스테판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탈출’자가 들어가는 제목, 자유를 강조하는 진부한 모토,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비를 맞는 포스터는 ‘빠삐용’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감옥 영화의 아류일 거라는 첫인상을 준다. ‘감옥 안의 혹독한 환경과 비인간적 실태를 과장해서 스케치할 테고, 결국엔 아주 극적으로 탈출하겠지, 뭔가의 정치적 냄새가 약간은 배어 있을 거고….’ 하지만 쇼생크 탈출은 빠삐용의 재탕이 결코 아니다. 감옥 쇼생크는 장기수로 가득하다. 화면의 쇼생크는 몇 가지 위협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안하다. 그 극한의 위협이라는 것도 반사적으로 몸 사리고 조심만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정도다. 이 감옥에서 삶의 목적은 감옥 외부로부터의 격리다. 감옥 외부를 향한 자유를 저당 잡힌 채 감옥 안에서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쇼생크의 생활에는 내일에 대한 긴장이나 경쟁이 가져오는 불안이 없다. 그곳의 생활은 규칙적이고 단조롭기때문에 불확실성이 불러오는 공포도 없고 책임 때문에 갖게 되는 삶의 무거움 역시 없다. 이런 감옥에 인간은 길들여진다. 쇼생크는 그러한 길들여짐이 초래하는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길들여진 인간에게 탈출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무용지물이다. 운이 좋아 형기를 덜 채우고 석방된 노인 죄수들이 감옥 밖에서 겪는 부적응은 불안에서 공포로, 공포에서 자살로 이어진다. 이런 길들여짐은 이데올로기이거나 심리적 변화이기에 앞서 습성의 일상적 조작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셸 푸코는 근대의 미시적 권력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감옥을 실례로 든다.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늪과 같은 감옥을 뛰쳐나가기 어렵게 된다. 게으르고 안일하며 권태로운 감옥의 습성에 의해 그 외부의 세계는 지워진다.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은 그 안의 존재로 제한되고 그 밖을 향해서는 모든 것이 차단된다. 그래야 감옥에 머물 수 있다.

감옥의 의미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군대로, 학교로, 전문 분야나 집단으로. 우리의 ‘조경’과 ‘조경학’도 쇼생크와 다름없는 감옥이다. 조경 1세대는 제 발로 쇼생크로 걸어들어 왔다(물론 다른 감옥의 1세대도 다 그러하겠지만). 그들은 좋은 안전울타리 속에 좋은 감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틀 속에서 길들여져 갔다.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편안한 감옥이 있었던 것이다.

조경 2세대는 아마 1세대의 감옥에 불만을 느꼈을 것이다. 저 철망만 통과하면 좀 더 나은 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는 낭만적인 낙관에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불확실한 자유보다는, 새로운 내일의 책임보다는 길들여짐을 선택하는 게 백배 낫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군의 2세대는 앞 세대가 가꾸어 온 감옥을 벗어나고자 여러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갈래의 길들을 여기서 나열하는 건 그들이 맞이한 또 다른 길들여짐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그들 역시 길들여짐의 평화를 체득하게 되는 길 위를 걸었다. 감옥을 뛰쳐나오기보다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다고 혼동한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위험을 감수하고 ‘피가로의 결혼’을 감옥 안에 바람처럼 울려 퍼지게 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의 ‘영원한 순간’처럼, 그 순간에 도취된 모든 수인囚人들은 자신이 감옥 밖에 서 있다고 느낀다. 이 조경 2세대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혼동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자유라면, 그것은 자유의 길들여짐에 대한 궁색하고 초라한 인정에 불과하다.

쇼생크에서 앤디의 존재는 메시아와 다를 바 없다. 그는 감옥의 습성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 내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브룩스 도서관’은 감옥 안에 존재하는 감옥의 외부였다. 쇼생크에 단순히 매몰되어가던 수인들은 이 도서관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본다. 이 세계는 격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유일한 세계였다. 그렇지만 그 세계에 누구보다도 만족한 인간은 앤디 자신이었을 것이다. 20년을 버텼다. 탈옥을 결단한다. 하지만 탈옥 ‘이후’의 준비를 결코 간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를 향한 ‘영화적’ 실험이 앤디를 반긴다.

조경 3세대,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시작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경 3세대, 그들은 앞선 두 세대의 감옥을 극복해야 한다. 감옥과 탈출의 상징성이 너무 과격하다면 이렇게 말해 보자. 지키느라 불안하고 넓히느라 피로한 집안―조경―을 ‘가출’해 제대로 된 가문을 한번 일으켜 보자고. 우선은 앤디가 되어야 한다. 찬찬히 치밀하게 준비하고 감옥 안부터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앤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앤디의 탈출이 다다른 곳은 막막하고 막연한 공간이었다. 온통 비어있는 바다와 모래사장에는 허무한 호흡만 가득했다. 영화는 애써 기적적인 자유를 서사적으로, 낭만적으로 극화했지만, 앤디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세상과의 완전한 절연이었다. 비존재의 확인이었다. ‘부자유의 부재’와 ‘자유의 존재’를 명증하게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가출이 참다운 가출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선 어떻게 가출해야 할지, 우리는 안다.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조경 3세대가 길들여짐을 뛰어넘어 자유를 품는 ‘가출’의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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