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우림에 잔디밭을 조성한다면? 고개가 갸웃거린다. 지역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싱가포르의 조경 사례다. 지난 7월 30일 제일모직 건설사업부 조경디자인 그룹(구 삼성 에버랜드)의 렉처 시리즈 강연자로 나선 황윤혜 교수(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조경대학원)는 “싱가포르는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정작가지고 있는 자원을 간과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잔디밭은 없어서는 안 될 굉장히 중요한 장소로 문화적, 사회적, 교육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반면 싱가포르에서 잔디는 1년 내내 녹색이지만 앉아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잔디 관리를 하는 사람들만이 밟는 공간이다.” 고온다습한 열대 기후의 싱가포르는 식물 생육 조건이 좋아 나무가 크고 우거진다. 잔디 문화는 이러한 정글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인데, 90% 이상의 녹지가 이 지역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영국 풍경화식 정원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황 교수는 조경이 타 디자인 분야에 비해 강조되는 특징으로 장소 특정성을 꼽았다. 지역에 따라 문화와 환경, 관심사가 각기 다른데, 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이 장소 특정성의 기본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장소 특정성의 개념을 네 가지 키워드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범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서로 다름, 부조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디자이너가 꿈꾸는 계획이 아니라 대상의 요구를 충족해야 한다. 과정과 실행을 중요시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의 주민에게 조경가가 생물 다양성이나 녹지가 주는 삶의 여유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맥락에서 벗어나는 행위라고 경계했다. “그들에겐 큰 공원을 갖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이렇듯 주어진 맥락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조경가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황 교수는 지난 5년간 동남아시아 도시(싱가포르, 마닐라, 프놈펜 등)에서 추진해 온 세 가지 연구의 과정을 ‘자생경관과 저관리 조경’, ‘의식주 조경과 생존 조경’, ‘고밀도 도시를 위한 다기능 조경’이라는 주제로 설명했다. ‘자생 경관과 저관리 조경’ 연구의 연장선에서 시작한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건축대학 옥상 경관 프로젝트는 ‘열대우림의 잔디밭 깎기를 멈추고 그냥 두면 어떻게 될까’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이 옥상은 1년 뒤근사한 정원으로 탈바꿈했고, 생물 다양성을 품는 생태적 능력도 월등히 향상되었다. “시간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수용하고 관리의 일부를 설계 원칙으로 고려하려는 시도는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 황 교수는 또한 건물의 옥상이 이러한 자생식물을 활용한 서식지로 이용된다면 작은 도시 국가의 생태적 징검다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놈펜에는 프랑스 NGO가 저소득층 아이들의 자립을 위해 설립한 PSE 직업기술학교Pour un Sourired’nfant가 있다. 이곳은 기부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데, 3천 명이 넘는 학생에게 제공할 식자재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황 교수가 이끄는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연구 팀은 이러한 실정을 파악하고 이용되지 않는 외부 공간을 활용해 키친 가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버스 대기장으로 쓰이던 공터는 세 가지 식물이 함께 자라는 고성능 농장으로 변모했고, 오토바이 주차장의 지붕과 벽면, 트렐리스를 이용해 다양한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교사와 학생도 함께 참여하면서 캠퍼스 곳곳에 버려진 공간이 식재료를 얻는 공간이 되었다. 텃밭은 요즘 정원에 공식처럼 등장하는 요소지만, 지역적 맥락을 고려하여 정말 필요한 부분을 채웠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는 빠르게 개발되고 고밀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황 교수는 이렇게 고밀화 된 도시를 위해 부족한 땅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다기능 조경’의 적용을 제안했다. 싱가포르 아파트의 단지 구조는 외부가 녹지로 둘러싸여 있고 안에는 아스팔트 주차장이 있는데, 그 주차장 면적이 축구장 몇개 규모에 이르기도 한다. 황 교수는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이 낮엔 대부분 사용되지 않는다는 데 착안하여, 주차장에 공원과 놀이터의 기능을 더한 다기능 주차장을 제안했다. 이렇듯 조경 공간이 여러 가지 기능을 품을 수 있도록 계획하는 것이 고밀도 도시를 살아가는 조경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올해 렉처 시리즈의 대 주제는 ‘조경 식재의 새로운 담론’이다. 그간 주로 이야기되어 왔던 식물의 생리나 관리보다는, 도시적 차원에서 식물의 이용과 전략을 강조한 황윤혜 교수의 강연은 식재 부문에서 자칫 소홀할 수 있었던 사람과 장소에 대한 중요성을 재환기했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