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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달콤한 나의 도시
  • 환경과조경 2014년 10월

퇴근길, 『환경과조경』 사옥이 자리 잡고 있는 파주출판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려 합정역에 내린다. 그리곤 서너 정거장 남짓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날씨 좋은 요즘 그 길가는 각양각색의 가게에서 내놓은 테이블로 가득하다. 나는 폴딩도어를 열어젖히고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쳐가며 꿋꿋하게 길을 걷는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전통 시장이 있는 길을 누비기도 하고, 구석구석에 있는 서점이나 카페를 눈여겨보며 나름의 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두건을 쓰고 연탄불에 황태를 굽고 있는 젊은 가게 주인을 발견하면 집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간혹 ‘저 주인은 나를 기억할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른 후 집으로 들어간다. 생활의 터전을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동네로 옮기고 보니, 나의 일상적 즐거움이 ‘동네 생활’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부쩍 강렬해졌다. 이는 과거의 골목길과 그에 얽혀있는 끈끈한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는 또 다른 정서다. 이런(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아닌) 동네의 매력은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와 곳곳에서 소비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있다. 나의 자잘한 일상의 팔 할은 집 밖의 여러 상점과 카페, 세탁소와 공원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들은 모두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도시 생활의 매력은 상업 공간과 공공 영역이 맞물리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란 생각이 체감으로 더욱 공고해지는 요즘이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7. 29~9. 28)을 개최했다. ‘이상향理想鄕’을 주제로 한 동아시아 산수화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였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 일대의 절경을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주자의 은거처를 이상화하여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파생된 ‘도원도桃源圖’ 등이 전시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실경이든 상상 속의 경관이든 자연(산수)의 모습이 이상향으로 제시된다. 이런 회화 작품 가운데 개인적인 하이라이트는 단연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였다. 마치 추억의 그림인 ‘윌리를 찾아라’를 보는 듯 8폭의 병풍 가득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태평성시도’에는 무려 2,12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8세기에 조선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에는 성안 도시의 번창한 상점과 화려한 건물, 각종 행렬과 놀이, 작업 활동이 묘사되어 있다. 연못과 화분이 들어찬 주택 정원이 있는가하면, 각종 꽃이나 포목 등을 파는 상점이 있고,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천 준설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마디로 도시 생활의 활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이러한 건물과 사람들의 복식이 조선의 것은 아니다. ‘태평성시도’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시대 풍속화’전에서였는데, 당시에도 작품명을 어떻게 붙일지, 과연 조선의 화가가 그린 것은 맞는지 등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수미의 연구2에 따르면 이 ‘태평성시도’는 중국 도성 내 번화한 정경을 묘사한 그림인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명대본明代本과 중국의 풍속화인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의 도상을 조선의 상황과 생활양식에 맞게 변형하고,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전해온 첨단 문물에 대한 정보가 반영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형식과 주제를 가진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비록 중국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현실과 차원을 달리하는 별도의 세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로서의 이상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태평성시도’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넘실대는 등 변화로 꿈틀대는 18세기 조선의 도시적 삶에 대한 기대가 드러난다. 은거隱居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니라 소비와 문화의 측면이 강조된, 즉 도시성(도시적 삶)이 극대화된 공간으로서 도시가 이상향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경훈 교수(국민대학교 건축대학)는 저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3에서 ‘걷기’야말로 도시성의 총체이며, 인도와 거리를 메우고 있는 상점이야말로 가장 도시적이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든다고 역설한다. 신사동 가로수길을 보자. 이 거리에는 독특하고 세련된 상품을 진열한 상점과 소위 핫한 카페들이 즐비하다. “상점의 쇼윈도는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데다, 무엇보다 ‘걷게 하는’ 도시의 장치로서 의미가 크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찬사를 보내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도 “도시에서만 가능한 전형적인 삶을 포착하고 스타일을 찾아냈다.

주인공들은 걸어서 출근하고, 걸으며 사랑하고, 거리에서 이별하거나 옛 애인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거의 매회 주말 아침에 모여서 브런치를 즐기며 서로의 지난 한 주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이 도시성을 갖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까닭은 상업적 건축을 배격하는 근엄하고 엉뚱한 체면과 현실적이지 않은 청렴 의식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시골과 도시The country and the city』4에서 베르길리우스에서 현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목가시에서 과학소설까지를 망라하는 다양한 시대의 방대한 텍스트들이 대체로 시골을 진정한 공동체의 모델로 설정하고 있으며, 또 그 공동체가 ‘이제 막’ 사라졌음을 한탄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이 방대한 텍스트들이 소멸을 아쉬워하는 공동체는 언제 어디서도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연으로’를 외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의 미덕을 모르는 덜 된 인간쯤으로 취급받는 것도 불편하다. 아마도 그래서 이상향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만난 ‘태평성시도’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그림은 도시의 삶이 결코 저열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향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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