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16년의 첫 달이 끝나가고 있다. 새해가 오면 으레 지난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일 년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약속을 잡고 해야 할 일과 사고 싶은 것 등의 목록을 적었다. 새해 준비의 마지막은 책상에 앉아 지난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2015년 버킷 리스트’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로 여러 항목이 줄줄이 달려 있다. 실천에 성공한 항목 옆에는 별이 그려져 있고, 그렇지 못한 항목 옆은 텅 비어 있다. 별의 개수를 세며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다가 문득 한 항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봉평 메밀꽃 축제 다녀오기. 몇 년째 버킷 리스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별이 그려져 있지 않은 항목 중 하나다.
아직 메밀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메밀꽃에 대한 환상이 있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글로 배웠어요’라는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다양한 시리즈 중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와 ‘화장을 글로 배웠어요’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무언가를 ‘글’로 배운다는 것에 있다. 글로 배운 화장법은 갓 스무 살이 된 대학생을 아줌마로 만들고, 글로 배운 연애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엉망으로 망쳐놓았다. 글로 배웠기에 생기는 환상과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의 갭이 웃음을 유발했다. 많은 사람이 공감했고 이는 실제 연애를 못하는 사람을 돕는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연애를 글로 배운 한 남자의 서툰 연애보고서』1라는 책의 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메밀꽃에 대한 환상도 이처럼 만들어졌다. 나는 메밀꽃을 책으로 배웠다.
사실 『메밀꽃 필 무렵』은 1990년대 컴퓨터를 좀 배웠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접해볼 수밖에 없는 글이다. 한컴타자연습(1997년도 버전)이라는 타자 검정 프로그램에 사용됐던 소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방과 후 컴퓨터 수업을 들었고,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 항상 타자 연습을 했다. 『메밀꽃 필 무렵』은 따옴표가 많아서 타자를 치기 까다로운 글이었고, 제한된 시간 내에만 타자를 쳐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 때문에 항상 소설의 초반부만 읽게 되었다. 장터를 들볶는 열기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소설의 전부인 줄 알고 지내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책을 제대로 읽었다. 그때 이 책이 여름 낮의 시골 풍경으로 가득 찬 소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소설은 매력적인 인물, 흥미진진한 이야기, 섬세한 심리 묘사 대신 낭만적인 시골의 풍경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 이효석이 평창에서 보고 자란 시골 장터, 논 사이로 가느다랗게 뻗은 길, 그 위를 나귀와 함께 걸어가는 노인 등 생생한 시골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소설이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밤중의 산길이 뿜는 묘한 매력은 장돌뱅이허생원이 동이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놓게 만든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2 시적으로 표현된 밤하늘을 밝히는 달과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풍경은 소설의 어설픈 부분을 모두 메꾸어 버린다.
본래 물레방앗간은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농촌의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묘사는 허생원과 어떤 여인이 물레방앗간에서 나눈 하룻밤의 사랑을 순수하고 애절한 장면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 관계로 인해 태어난 동이가 아버지와 같은 장돌뱅이라는 직업을 택해 살아가고 그 아버지와 우연히 시골 장터에서 만나게 된다는 서사 구조의 부족함도, 왼손잡이는 유전적 형질이 아니기에 허생원과 동이의 부자 관계를 암시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만약 인물의 설정이 독특하거나 이야기의 인과 관계가 명확했다면 이효석의 탐미적인 풍경 묘사가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생원과 동이의 대화로 더듬어지는 희미한 과거의 이야기가 산길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든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3이라고 한 허생원의 말처럼 말이다.
푸른 달빛과 청량하게 울리는 나귀의 방울 소리가 내게 메밀꽃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빛나는 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만지면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손에 남은 꽃의 잔해를 핥으면 짠맛이 날 것 같다. 서늘한 가을이라기에는 이른 9월에 열리는 봉평 축제에 다녀오면, 메밀꽃에 대해 품고 있던 환상의 일부가 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평 메밀꽃 축제 다녀오기’를 ‘2016 버킷 리스트’에도 적었다. 그 옆에 별 표시가 새겨질지 그 여부는 내가 환상이 아닌 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