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신작로를 걸어온 할머니는 마을 어귀 서낭당이 보이자 비로소 허리를 폈다. 숲 기스락을 개개면서 휘돌아나가는 개울에는 난간 없는 콘크리트다리가 있었으며 그 다리를 건너기 전 숲 기스락 한편에는 당산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 정월 초이틀 동제를 지내고 나무 밑동에 둘러놓은 하얀 한지는 한여름 뙤약볕에도 눈부셨다. 넉넉히 두 아름은 넘을 듯한 당산나무는 고묵은 소나무였다. 소나무 보굿은 지난 세월만큼 깊게 패이고 또 그만큼 켜켜이 도드라졌다. 할머니는 자잘한 돌멩이들로 울멍줄멍 탑을 쌓아놓은 당산나무 앞에 서자 가만히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친 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하얀 코고무신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그렇게 잠깐 멈춰 서서 땀을 들이고 숨을 고른 할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기다랗게 가로놓인 콘크리트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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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평안하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해가 시작된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정갈한 마음으로 모여 평안과 안녕을 정성들여 빌며 제사지내던 마을 입새에 있던 서낭당 당산나무는 그러나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조차 없었으며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난간을 두른 거대한 콘크리트다리가 들어섰다. 또한 그 개울에는 콘크리트 옹벽 같은 보가 만들어져 물길을 가두면서 그예 늙은 소나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누구도 마을이 생긴 어느 해부터 세세연년 자리를 지켜오던 서낭당이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숲정이 깊은 어느 계류 기스락 말라죽은 소나무 앞에서 여전히 그 옛날처럼 정월 초이튿날이면 모여서 동제를 지냈지만, 어린 사람들은 마을제사를 지내는지조차 까맣게 몰랐다.
당산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면서 정결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모였던 마을 사람들 자취뿐만 아니라 풍습이 없어지면서 언어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한 마을에 살면서 골목길에서건 마을 신작로 안길에서 먼발치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사람 사이에 흔한 예의였지만 지금은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누가 누군지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마을 당산나무, 둥구나무가 있었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몰풍스러운 풍경이었다. 어쩌면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들 수 있었고, 서로 얼굴 맞대고 장기도 두고, 장기 두는 곁에서 훈수도 두면서 또 한편으로는 끼리끼리 속살거리기도 하면서 서로들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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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고 구석진 우리 동네를 비롯한 시골 마을, 많아야 30~40가구이고, 대부분 운동할 기력조차 없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살고 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지자체’에서는 운동기구를 갖춘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느티나무며 크게 자란 소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어느 공원에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하얀 꽃을 피우는 해당화를 심어놓기도 했다. 나무든 꽃이든 나라 밖에서 들어오기도 하고, 나라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품종조차 굳이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을 심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을 안팎에 공원을 만들 때에라도 그 지역에서 자생하는 품종을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 어느 도시를 가든 똑같은 벚나무 가로수길, 똑같은 소나무 명품길로 통일하지 말고. 요즘은 또 이팝나무 가로수길이 유행이었다.
마을 사람들 안녕을 바라며 모자라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해 흙을 돋워 숲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던 조상들이 있었다. 거창한 비보풍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콩 세알을 심었던 그 심정으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으면 그 아니 넉넉하고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