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일의 일이다. 전날의 숙취가 남아있었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기계적으로 씻고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는 하루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주 잠깐 망설인 순간은 자동차 문을 열고 핸들을 잡았을 때다. ‘아, 오늘부터는 파주가 아니라 일산으로 출근해야지!’ 경로를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고는 액셀을 ‘힘껏’ 밟았다. 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첫 날이니까. 그렇게 환경과조경이 아니라 나무도시 편집장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구청에 가서 서류 접수를 하고 받아든 나무도시의 사업자등록증에는 아내의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편집장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요즘 같은 종이책 멸종위기 상황에서는 원대한) 꿈을 지키기 위해 발행인 직함을 아내에게 양보(?)한터였다. 딸아이의 주민번호를 외울 때처럼 사업자등록번호를 되뇌었다. ‘일사일영삼… 일사일영삼… 일사일영삼…’, 업태는 제조업, 종목은 출판. 조경설계사무소는 업태가 서비스업이지만, 잡지나 출판은 제조업이다. 그 차이는 쉽게 말하자면, 조경설계사무소는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 인건비만 해결하면 되지만, 출판사는 임대료와 인건비는 물론이고 제작비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책이라는 물리적인 제품을 제조하려면 저자 인세, 인쇄비, 용지비, 출력비, 제본비 등을 지불해야 하니까. 편집장 명함을 (생전 처음) 내 돈 주고 팔 때만 해도 참 신이 났었는데, 첫 책의 제작비 지급 시점이 다가오니 제조업의 숙명이 실감났다.
언제였더라?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화장을 글로 배웠어요’ 따위의 유머가 유행한적이 있다. 나는 출판사 창업을 책으로 배웠다. 『편집자란 무엇인가 - 책 만드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1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 - 23인의 출판편집자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편집자의 세계』,2 『편집에 정답은 없다 - 출판 편집자를 위한 철학 에세이』,3 『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4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5 『편집자 분투기』,6 『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7 『소설거절술 - 편집자가 소설 원고를 거절하는 99가지 방법』8
(이 책은 도대체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다)을 비롯해서 ‘편집자’를 키워드로 한 책들이 지금도 내 책장 한 칸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대부분 창업을 목전에 둔 시기에 사들인 책들이다. 그런데 그게 결정적 패착이었다. 무엇보다 키워드 선택이 옳지 않았다. ‘출판 마케팅’을 키워드로 한 책을 주야장천 읽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제대로 잘 만들면 잘 팔린다’는 명제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아름다운 문구가 아니었다. 편집자가 출판사를 차리면 10명 중 7~8명은 망하고, 영업자가 출판사를 창업하면 10명 중 7~8명은 성공한다는 속설이 유독 내게는 해당하지 않을 거란 기대 역시 허황된 것이었다. 잘 만드는 것보다 잘파는 것이 중요했다. 잘 팔아야 다음 책도 만들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책을 잘 못 만든 탓은 아닐까 하는 반성은 새 책이 나온 후 3개월 뒤에는 어김없이 했다. 다음 책은 꼭 잘 만들어보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번 호 특집을 준비하며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연 9인에게 부가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창업에 필요한 준비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이런 예를 덧붙였다. ‘예: 꿈, 첫 번째 일거리, 10년의 사업계획서, 재무 지식, 동업자, 플로터, 책상 등등.’ 창업 자금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준비물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면서 잠시 시계를 거꾸로 되돌렸다. 한창 창업 준비를 하던 2009년의 어느 날로 말이다. 나는 무엇을 준비했더라? 아마 이런 것들이었을 거다. “적극적 지지까지는 아니지만 대놓고 말리지는 않았던 아내의 불안한 동의, 그 불안을 해소하고자 준비한 20종의 출판 아이템과 10명의 필자 리스트,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서가 한 칸을 내가 편집한 책으로 채우고 말겠다는 (불가능하지만 이루고 싶은) 꿈, 누가 봐도 근사해 보이는 원목 테이블, 사무실 2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책꽂이….” 아 그렇지, 제작비 부담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도 빼놓을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내가 창업을 고민하며 샀던 책들은 대부분 2009년에 출간되었다(각주 1번부터 5번까지). 전후 10년 동안의 데이터를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편집자’를 키워드로 한 양질의 책이 그렇게 1년 동안 쏟아진 해가 없었다. 어떤 모종의 세력이 나의 출판사 창업을 부추기기 위해 작정한 것이 아닌가 싶은, 허황된 음모론을 지금까지 내가 주장하는 이유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정성껏 욕심껏 오래 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창업을 꿈꿨던 까닭은.
누군가 ‘그래서 창업을 권하는 것이냐’라고 정색하며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배움을 주었던 어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쓰여 있었다. “과연 출판 창업에 모범 답안이 있을까. 대개 있다고들 한다. 창업 자금 3억 원, 첫 책을 출간하기전에 완성 원고를 세 가지 정도 준비하고 첫 책 출간 이후 1년 안에 열 종(혹은 3년 안에 서른 종) 이상 낼 자신이 있다면 창업해도 된다. … 창업 자금이 많을수록, 완성된 원고를 많이 확보할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9 단, “완성된 원고” 앞에 생략된 단서가 있다. ‘일정한 독자층이 있는 완성도 높은’ 원고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이 모범 답안은 7년 전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출판동네는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기록적으로 경신’하고 있으니 현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출판사 창업을 꿈꾸며 관련 도서를 사들이고 창업 강좌를 듣고 선배를 만나 꼬치꼬치 캐묻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답변이 잿빛 일색이더라도 말이다. 나만은 다를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니까(실제로는 할 줄 아는 일이 그것뿐이어서 창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할 줄 아는 일’은 ‘하고 싶은 일’로 포장된다. 물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경우도 많다).
조경설계사무소를 새로 연 9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읽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6년 전의 고민과 떨림과 설렘이 오버랩됐다. 별 재미도 없는 해묵은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다. 참, 각주 9번의 글을 쓴 김홍민 대표는 저런 모범 답안을 일러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창업 자금 9,000만 원, 준비된 원고 한 종”10만 달랑 들고 북스피어란 출판사를 차린 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신나게 흥이 넘치게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