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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와 사분원의 원작자를 찾아서 ‘파사르가다에’에 가다
지금 이슬람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바로 그 지역에서 ‘파라다이스’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동쪽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의 스페인 안달루시아까지 보석 같은 이슬람의 파라다이스 정원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늘 공존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기후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한반도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 사실상 반도 전체가 낙원과 같았다. 뒷동산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면 낙원이 따로 없었다. 고대 그리스 등 지중해 유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기후대의 숲 속에 자리 잡고 살았던 유럽인에게도 자연 환경이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굳이 사방에 담을 두르고 지하수를 퍼 올려 연못에 물을 대고 큰 나무들을 심어 그늘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살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낮이면 지옥의 불구덩이로 변하는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정원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지옥 불과 낙원의 개념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불구덩이와 모래바람을 피해 사방에 담을 두르고 별개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왜 하필 그런 곳에서 살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시작은 까마득한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정주하여 농사를 짓고 부족 국가를 형성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실제 남아 있는 흔적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페르시아 제국 때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지금의 이란이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가 합세하여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음은 지난달에 이미 언급했다.1 그 후 융성했던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 미아의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지금의 터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팽창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왕이 키루스 2세(B.C. 590년경~530년)였다. 사람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불렀다. 구약 성경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기도 하다. 당시 이웃 나라들의 소식은 물론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강대국의 왕들이 구약에 자주 언급된다. 공중 정원을 지었던 산헤립 왕이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도 여러 번 악역으로 등장한다. 키루스 대제의 경우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의외로 선한 역을 맡았다. 구약에 언급되는 타국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바빌론을 정복하고 나서 마침 그곳에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바빌론을 항복시켰다고 기록했다.2
이렇게 제국의 주인과 왕조가 바뀌는 사이, 에덴동산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던 아시리아의 정원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로 전승되었다. 도시 건설, 건축, 물 관리 기법 역시 물려받았다. 키루스 대제는 현재 이란 남서부 산악 지대의 파르스Fars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파사르가다에Pasargadae’라고 불렀는 데 지금의 시라즈에서 약 13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로써 세상의 중심이 동쪽의 이란 고지대로 이전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사르가다에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유적지로 등재되어 있지만, 담장의 흔적과 궁터, 매머드 사이즈의 기둥, 키루스 대제의 무덤 외에는 남은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곳에서 이른바 ‘사분원four gardens’의 최초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분원이란,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의 정원이 네개로 분열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반대로 네 개의 정원이 하나로 모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3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분원을 탄생시킨 페르시아가 동서남북의 땅을 통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네 개의 강과 네 개의 하늘을 합쳐 웅대한 제국을 이루었노라’는 자랑과 이념이 배어 있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처음부터 정원에 중점을 두고 설계했다. 건물에 정원이 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다.4 가로 240m, 세로 200m 규모의 터를 높은 담으로 둘러쌌으며 이 방대한 정원 공간을 여러 단위로 나누고 그 안에 궁궐의 전각을 드문드문 배치했다. 이런 배치법은 오히려 창덕궁 등 동양의 궁궐을 연상시킨다. 큰 전각은 사방을 주랑으로 둘렀으며 작은 건물에는 앞뒤로 거대한 문주를 만들어 붙여 정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큰 전각들은 왕의 처소 혹은 알현실로 쓰였을 것이고 작은 누각들은 연회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석조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며 전각과 누각을 서로 연결했다. 수로의 중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원형 혹은 사각형의 석조 연못들이 배치되었다. 전각들 사이의 정원은 이렇게 수로가 중심이 된 사분원으로 단정하게 장식했지만, 건물 뒤편의 넓은 땅에는 수렵원을 조성했다. 사자부터 노루, 사슴 등 온갖 사냥감이 득시글거렸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아시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전통이었다. 키루스 대왕은 소년 시절 수렵원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담장을 몰래 넘어가 산에서 사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키루스와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왕들의 정원 집착증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가 증언한 바 있다. 페르시아 왕은 가는 곳마다 우선 정원부터 만들고 보았는데 그 정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과 식물이 가득차 있었다고 했다.5 물론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을 써서 남긴 것은 아니고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폰(B.C. 430년경~354년경)이 기록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어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왕도 없고 담 높은 정원도 없던 그리스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구 페르시아어로는 ‘pairi-daeza’라고 했다.6 크세노폰으로서는 발음을 비슷하게 하여 그리스어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파라디소스’였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영어를 번역할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크림’을 ‘구리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약 백 년쯤 지나서 유대인들의 경전 『토라』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기독교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교회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타문화의 ‘고전’을 번역한 것이다. 당시 창세기를 번역하는 데 “하나님이 에덴이라는 곳에 정원을 조성했다”는 대목이 나왔다. 히브리어로는 ‘간 에덴Gan Eden’ 정도로 발음하는 데 이에 또 갖다 붙일 그리스어가 부족했다. 번역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어려움이다. 문득 예전에 크세노폰이 창조했던 파라디소스라는 단어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이를 가져다 썼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 창졸간에 에덴 정원으로 둔갑하여 구약 성서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