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삶’이라는 손 글씨
벌써 가물가물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 너머옆집에서 자취를 하시던 담임선생님이 실로 오랜만에 내 고향 집을 찾으신 적이 있었지요.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면서 불쑥 내민 문고판 크기로 출판된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의 『그리스 로마 신화』 표지 안에는 ‘올곧은 삶’이라는 손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의 연배가 아마도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굳이 산골 분교만 골라서 다니시던 아동문학가였습니다. 소박한 동화를 쓰겠다는 목표를 초임부터 묵묵히 실천하시던 선생님도 때로는 삶의 궤적이비틀거린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부끄럼 탓인지 짧은 글귀의 뜻을 여쭙지 못했지요.
벌써 마흔을 넘어 수년이 부질없이 더 흘러갔습니다. 시인 허연은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2 그렇군요. 부인할 수 없어요. 적잖이 비열하고 야비해도 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의하고 탈선하고 타락하려는 삶을 ‘올곧게’ 잡아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이라는 날을 다시 살면서 결코 너의 정신을 그 위엄 있는 말이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걸 해서 뭐가 되겠는가, 라는 예의 그 말이.”3라는 시인 겸 비평가 폴발레리Paul Valéry의 결연한 다짐처럼.
문사철시서화는 오늘날 설계가의 소양이지만 신영복 선생이 이르기를, 군자는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중략)…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를 두루 익혀야”4했다고 하지요. 무릎을 쳤습니다. 그 대목을 읽고 바로 이 여섯 자가 다름 아닌 우리 설계자들이 평생 익힐 소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퍼뜩 드는 생각을 조금 다듬어보면, 책을 읽고 쓴다는 것과 설계를 한다는 것은 실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나에겐 아주 멀지요. 문학과 설계가 비슷한 시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비슷한 결과 물을 내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쉽사리 금방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읽을 수가 없는 것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풀이 해서 읽는 것이고, 이를 통해 마침내 남의 꿈을 그대로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접속하게 되면 정면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지요. 결국 책을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입니다. ‘읽어버리면’ 써야 하고, 고쳐 쓰면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음까지 불사합니다. 성서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또 고쳐 쓴 문학가이자 혁명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5 두렵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방어적 태도를 취하며 책을 그저 ‘정보’의 수준까지만 받아들이고 만다는 겁니다. 문학을 통한 혁명을 외면하지요. 그렇다면 설계는 어떨까요?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 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