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사라와지를 찾아야 하는 이유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이 태동하던 시절에 떠올랐던 개념이 하나 있었다. ‘사라와지sharawadgi’라는 단어인데 대략 ‘무질서한 아름다움’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 개념을 1685년에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은 윌리엄 템플 경Sir William Temple(1628-1699)이었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에세이스트였던 템플 경은 아일랜드 의원의 자격으로 유럽 대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많은 정치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다 명예혁명 후 은퇴하여 서리 지방 모어파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아 전원에서 은둔 생활을 만끽하며 많은 에세이를 썼다. 1685년,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는 에세이에서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필치로 동시대의 정원들을 묘사했다. 그중 언뜻 중국의 진기한 정원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의 사후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정원들은 모두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것들이다. 그러나 질서가 없는 정원이 오히려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중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중국인은 지리적으로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체계 역시 우리와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우리의 경우 비율이나 좌우대칭, 통일성 등에 큰 비중을 두고 산책로를 만들 때나 나무를 심을 때 일정한 원칙을 따른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비웃는다고 한다. 몇 걸음 간격으로 나무를 심었는지 아이들이라도 금방 알아챌 만한 뻔한 방식을 쓰다니. 그들의 목표는 아무 규칙이 없어 보이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은 ‘사라와지가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온 비단 옷이나 병풍, 도자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규칙이 없음에도 아름답다.”1 템플 경은 중국에 가본 적이 없고 중국 정원을 본 적도 없었다. 중국 정원을 표현한 그림도 아직 없던 시절이라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오죽했으면 병풍 그림을 관찰하며 중국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를 해독하려 했을까. 템플 경은 사라와지, 즉 무질서 속의 아름다움을 동경했지만 동료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연히 그대로 흉내내려고 하다가는 큰 실수를 할 확률이 높다며 늘 하던 대로 정형적 양식의 범위 내에 머물면 크게 실수할 일이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다. 우선 당시 유럽의 정원은 ‘정형식’이라는 하나의 원칙밖에 몰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고대 이래로 정원은 정형적이라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었다. 그렇다고 템플 경이 거기서 벗어나자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심스럽게 ‘세상에는 다른 것도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템플 경은 풍경화식 정원의 창시자 반열에 끼지 못한다. 다만 그가 던진 한 마디, ‘사라와지’가 저 혼자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갔을 뿐이다. 사라와지가 중국어라고는 하는데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2008년도에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사라와지에 대한 책을 출간한 유 리우Yu Liu도 사라와지는 아무 뜻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페르시아 어원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일본어가 아닐까 짐작하는 사람도 있다.2 아마도 발음이 와전되어 이제는 원어를 찾기 힘든 듯하다. 사라와지는 결국 영국 사람들이 창조한 중국 단어인 셈이다.
그 후 사라와지는 샤프츠베리 백작Earl of Shaftesbury(1671~1713)에게, 그에게서 다시 조지프 애디슨Joseph Addison (1672~1719)과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에게 전해졌다. 이 세 사람은 저술가, 철학자, 시인이었으며 정형식 정원을 혐오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이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같다. 풍경화식 정원의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1700년대 초반, 풍경화식 정원의 태동을 책임진 초기의 영웅들인 셈이다.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은 마치 정형식 정원을 빈정거리기 위해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정형식 정원을 비판하고 ‘새로운 것’에 대해 고민을 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베르사유 정원이 완성되면서 오히려 정형식 정원이 절정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로도 반세기가 넘도록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대륙 쪽에서는 바로크 정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말하자면 정형식 정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영국에서는 이미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조지프 애디슨이 설명해 준다. “우리 영국의 ‘바로크’ 정원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정원만큼 재미가 없다. 그들의 바로크 정원은 정형적인 양식의 정원과 이어지는 넓은 숲이 펼쳐지므로 변화가 많고 예술과 자연이 공존한다. 그에 반해 우리 영국 것은 우아하긴 하지만 아담한 것이 특징이다. 사실 농경지나 목초지로 쓸 수 있는 면적에 숲을 만들자면 그만큼 소득이 줄어드니 난감한 것은 사실이다.”3 이는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정치적 차이에 기인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루이 14세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 굴복하여 모두 왕실에서 살았다. 볼모로 잡혀있었던 것이다.4 당시 베르사유는 곧 국가였다. 그 반면 명예혁명에 성공해 왕권에 족쇄를 채울 수 있었던 영국 귀족들은 시골에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그곳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영토와 소득을 직접 관리했다는 차이가 있다. “군주가 기분 내키는 대로 만든 바로크 정원을 왕실의 노예들(귀족들)이 죽자고 지키고 있다”5 라는 샤프츠베리의 발언이 아마도 가장 비중 있고 ‘지속가능한’ 비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아냥거리는 것만으로는 새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독한 인위성에 대해 ‘자연스러움’으로, 억압에 대해 ‘자유’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 자유를 어떻게 삼차원의 공간으로 표현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자유가 어떻게 생겼을까. 이에 힌트를 준것이 템플 경의 사라와지였다. 사라와지를 찾아야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