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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비평의 역할과 과제
  • 환경과조경 2003년 4월
다시, 조경비평의 이름을 부르다 조경비평이라는 네 글자의 가능성에 무작정 기대어 쓴 어설프고 무리한 구조의 석사논문에, 관대하신 심사 교수님들은 도장을 찍어주시고 말았다. 꼭 10년 전의 일이다. "작가도 없고 작품도 없고 사회적 인정도 없는데 도대체 비평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라는 주변의 의혹을 듬뿍 받은 이 논문에서 나는 조경비평을 이렇게 정의했다: 조경비평이란 "조경가들이 창조한 비평의 소재, 즉 조경 작품이나 조경가의 경향, 조경계, 조경과 사회의 관계 등을 대상으로 하여 비평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경비평가나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조경사가, 조경미학자 등이 그 대상에 대해 비판과 찬사, 혹은 비교와 감상 등을 하기 위해 분석, 기술, 해석, 평가하는 행위"이며, "환경의 형성 혹은 개선에 영향을 주려는 행동으로서 그 시대의 삶과 조경을 반영하는 문화 행위의 궤적이다." 이 엉성한 정의를 포함하여 논문에서는 조경비평의 필요성, 대상, 주체, 방법(론) 등과 같은 조경비평의 전체적인 틀이 논의되었는데,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은 아쉬운 대로 미학, 문학, 건축 등 관련 분야의 비평 이론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논문의 행간을 통해 말하고자 애썼던 점은 "조경비평을 하자!"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선언적인 주장이었다. 결국 나의 논문은 "있지도 않은" 조경비평이라는 것을 하자는 주장을 펴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조경의 세계에서 비평은 대중과 전문가의 가교, 조경 작품의 내적 의미 해석, 상상력과 실험정신을 담은 디자인 교육, 조경사의 궤적을 잇는 매듭 등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전략적 행위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 있지도 않던" 조경비평은 어떤 지형을 그리며 조경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가? 조경비평의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은 미력하나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필자와 김영대(영남대 교수), 조경진(서울시립대 교수, 당시 펜실바니아대학교 박사과정), 차태욱(Hargreaves Associates 근무, 당시 Oikos 근무), 민성훈(증권 컨설턴트, 당시 조경설계 서안 근무)이 "조경비평 동인 69"라는 그룹을 함께 꾸리며 조경비평이 생산되고 소통되는 공공영역(public sphere)을 마련하기 위한 대안적 매체의 발간을 기도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1998년, 조경의 대안적 담론 공간을 모색하며 조경진, 박승진(조경설계 서안), 그리고 필자가 공동편집장으로 참여하고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이 발행을 맡아 {Locus}를 창간했다. 작품의 빈곤, 이론과 비평의 부재 속에서 허덕여 온 조경의 상황을 비평의 장을 통해 해소하며 현실과 대화하는 조경비평의 실천 환경을 구축한다는 선언으로 시작된 {Locus}는 2000년에는 "조경과 비평"이라는 부제를 단 2호를 선보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다층의 독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유일의 조경 잡지 {환경과 조경}까지도 한국 조경과 비평 사이의 함수를 종래와는 다른 시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2002년부터 거의 매달 실리고 있는 "조경비평"이라는 타이틀의 꼭지와 같은 해에 시도된 "조경비평 공모전"이 그 단적인 예이다. 또 이번 호에서 현 단계의 조경비평을 진단하는 특집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조경비평이 그 필요성만큼은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던 조경비평은 이제 있는 것인가? 긍정의 답으로 대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난맥은 우선 그간 발표되었던 비평들이 심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감상문 내지 답사기, 찬사 일변도의 주례 비평, 서구의 유행 이론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글, 특정 이론의 적용에 매몰된 원론 비평 등이 조경비평이라는 같은 문패를 쓰며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조경비평에 기대되는 역할의 스펙트럼이 지나치게 폭 넓거나 아니면 조경비평 자체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 비평들에 대한 피드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조경비평의 아이덴터티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난점이다.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비평은 "창작→작품→향수→감상→비평→창작"이 반복되는 순환적 구조 속에서 기능할 때 그 의미를 보장받는다. 즉 비평은 이 순환적 구조의 각 부분에 영향을 미칠 때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나 작품과 상호 관련을 맺지 못하는 외마디 외침으로서의 조경비평은 공허한 일에 다름 아니다. 조경비평 자체에 대한 원론적 논의보다는 활발한 실제 비평(practical criticism)이 요청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지면을 소비해가며 조경비평의 현 단계를 다시 짚어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왜 조경비평인가?" 이것은 조경비평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이자 그 "역할"에 대한 물음이다. 비평의 역할은 비평이 작품과 맺고 있는 함수 관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경비평은 ○○이다"라는 정태적 정의를 뛰어넘는, "조경비평은 ○○을 한다/할 수 있다/해야 한다"는 역동적 정의, 곧 조경비평의 역할이다. 왜 조경비평인가? 역할 1 : 조경비평은 조경이론의 실천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만드는 거창한 이름, 이론(theory). 곁가지를 치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계와 사물에 대한 생각―개념―들을 체계화한 것이 이론이다. 이론은 개념의 전체집합인 것이다. 우리는 삶의 조건, 즉 세계와 사물과 환경과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산다. 즉 개념의 생산은 무의식적인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개념이 모여 만들어진 이론은 개인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의 매개체를 통과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소통을 위해 대게 말이나 글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데, 말이나 글의 형태로 번역된 이론은 사실을 기술(description)하는 형식, 의미를 해석(interpretation)하는 형식, 그리고 가치를 평가(evaluation)하는 형식, 이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조경이론은 조경이라는 문화 행위와 그 결과물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생각이며, 그것은 기술, 해석, 평가라는 형식을 통해 구체화된다. 조경의 문화적 궤적을 기술하는 것이 조경사의 역할이라면, 조경비평은 동시대의 조경 작품, 작가, 쟁점 등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조경비평의 주제가 현재이고 조경사의 주제가 과거라면, 조경비평은 훗날 역사가의 사료가 된다. 현재를 조명할 수 있는 역사의식과 비평정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론의 구체적 형태로서의 역사와 비평은 동반자의 관계에 위치한다. 이처럼 조경비평은 조경이론의 가장 실천적인 양상으로 기능하면서 조경의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물리학 없이 자연을 알 수 없듯이, 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미술비평을 지나칠 수 없듯이, 조경비평은 조경을 알기 위한 조경 고유의 사고 체계이자 지식 체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비평가로 인정받고 있는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는 "비평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예술은 벙어리"라는 이유로 비평의 존재 이유를 명료하게 제시한다. 조경설계나 계획의 산물로 구현된 작품과 그 과정 중의 일련의 행위는 조경이론의 가장 직접적인 실천 양상이다. 그러나 조경비평은 그러한 과정과 산물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실천이다. 프라이의 말처럼, 하나의 작품은 새로운 비평가를 만나는 순간 새로운 입을 연다. 조경비평은 조경이론을 실천하는 행위이자, 이원론적 긴장 관계 속에서 대치해 온 조경이론과 조경실천을 매개하고 중개하는 조정의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조경비평이 상실되거나 부재함으로써 발생하는 난맥은 한국 조경의 풍경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지난 2월 중순에 발표된 "서울시청 앞 광장 조성 설계 공모"의 결과와 이에 대한 반응은 이론과 실천과 비평이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일어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 준다. 당선작과 우수작, 그리고 세 편의 가작 작품은 겉으로 내세운 개념이나 그것을 구현한 형태 언어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광장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즉 이론―에서는 넓은 면적의 공통분모를 갖는다. 현대 도시의 문제와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인지 아니면 렘 콜하스(Rem Koolhaas)나 West8 등이 주도하고 있는 최근의 패션에 무비판적으로 동승한 결과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이 작품들이 설계를 통해 실천하고자 한 것은 도시 공간의 일시성, 불확정성, 가변성을 설계를 통해 수용해야 한다는 이론이라는 점에서만큼은 서로 엇비슷한 것이다. 사건이 지배하는 리좀(rhizome)과도 같은 도시 공간에 가변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디자인 코드를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했다고 판단되는 "빛의 광장"이 당선작으로 발표되고, 유사한 전략에 기초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조경 설계의 형태적 요소들을 사족처럼 덧붙인 다른 네 팀의 작품들이 우수작과 가작에 머물렀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경비평이 조경이론을 비판적으로 실천하는 역할을 하며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이 경우에 조경비평의 역할은 우선 이들 작품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기대고 있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류의 철학 이론이 서울시청 앞 광장이라는 도시 공간과 그 주변 맥락에 적합한 것인 지 엄밀히 따져보는 데 있다. 조경비평에 맡겨진 또 다른 역할은 당선작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염두에 둔 이론이 어떠한 설계 전략을 통해 실천되어 조경―또는 건축일 수도 있고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일 수도 있다―의 경계 밖에서, 즉 일상의 세계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지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있다. 이는 해당 작품의 질적 우열을 점검하는 평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삶으로부터 고립된 작품과 그것에 대한 담론을 전문가들의 폐쇄적인 영토에서 일상의 장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조경 행위를 사회화하는, 조경비평의 실천적 역할이다. 이러한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언론과 대중―심지어 조경 전문가도―이 동시대 조경의 사회적 발언으로부터 유리된 채 LCD 모니터의 설치 비용이나 유지 관리 문제만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엉뚱한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역할 2: 조경비평은 조경실천을 이론화하는 작업이다 인간과 땅이 세계를 살아가며 맺는 관계의 문화 행위를 조경이라고 한다면, 조경의 목적은 그러한 관계의 지혜로운 실천(practice)이다. 계획, 설계, 시공은 그러한 실천의 단계나 과정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다. 조경실천은 이러한 과정을 일컫는 동시에 조경가의 머리와 손을 통해 생산되는 조경 작품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조경실천의 결과물, 즉 조경 작품은 일상 속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상과 소통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조경가가 생산하는 조경 작품은 그것만으로는 물체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물적 존재에서, 예를 들자면,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그것에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조경실천에 대해 끊임없이 일종의 잠재적 비평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산발적 반응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생각, 즉 이론을 요청한다. 이러한 지점이 바로 조경실천이 이론과 만나는 곳이며, 조경실천과 조경이론의 접점에서 매개와 중개의 역할을 하는 조경비평의 활동 공간이다. 조경비평은 물체로 던져진 조경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지역적 조건이나 역사적 맥락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 위치시킴으로써―즉 이론화함으로써― 현실로부터 고립된―즉 물적 존재에 불과한― 조경작품을 사회적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조경가나 조경 작품의 독백과도 같은 발언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일상의 삶과 연결시킨다는 말이다. 이처럼 조경실천은 조경비평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론화될 수 있는 것이다. 조경 동네의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설계 잘 하고 시공 제대로 해서 좋은 작품 만들면 됐지, 어려운 말장난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는 식의 틀에 박힌 도식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도식은 조경에 이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이론무용론"과 이론은 실천에 유용한 수단으로서나 필요하다는 "도구주의적 이론론"으로 양분된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가 지난 30년 간의 한국 조경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분야 내적으로도 성숙시키지 못한 원인의 하나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흔히 한국 조경에 대해 퍼붓는, "작품도 없고, 작가도 없다"는 불만이나 "조경은 건축에 치이기 일쑤고, 보통 사람들은 아직도 조경을 그저 나무 심는 일이라고 여긴다"는 불평은 실천과 이론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소급되는 문제인 것이다. 한국 현대 조경이 법이나 제도의 개정과 같은 문제 외에 작품이나 그것의 철학을 쟁점화한 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작품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이른바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태라는 것에 대해서도, 형태와 의미의 관계라는 원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된 토론조차 벌인 적이 없지 않은가. 이는 곧 이론을 통해 실천을 교정하고 정련하고 확장시키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러한 양상의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개입해야 할 역할이 비평에 있지만, 우리는 채 비평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해 왔다. 소위 조경 선진국이라는 이방 국가들의 사정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론에 대한 실천의 오해는 거슬러 올라가면 서구 모더니티 정신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까지 소급되는 골 깊은 문제임을 새삼 거론하기에는 지면의 넓이가 충분하지 않다. 다만 이론의 공백이 실천의 부재를 낳기까지 한 실례를 현대 조경의 역사 속에서 잠시 들춰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 조경 이야기이다. 1980년대 말 이후 조경이론의 르네상스를 기도하는 흐름이 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경의 담론 속에서 모더니즘이 거론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를 단순히 해석하면 조경에서 모더니즘 이론이 공백 상태였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더니즘 조경 자체가 없었다는 것, 실천이 부재했음을 뜻한다.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탄생한 때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이지만 바로 그 때―미술과 건축이 모더니즘을 실험하고 주장하던 바로 그 때―부터 조경이 건축이나 미술의 주변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모더니즘 조경은 존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최근의 이론 연구들은 모더니즘 조경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20세기의 개막을 기점으로 고개를 감추었던 조경에 대한 이론을 발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의 성과로 크리스토퍼 터나드, 댄 카일리, 제임스 로즈, 가렛 엑보, 플레춰 스틸 등의 알려지지 않은 글과 작품들이 모더니즘의 틀로 재조명되었고, 거의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던 1920년대의 프랑스 모더니즘 조경이 재발견되기도 했다. 모더니즘 조경이 존재했음은 이처럼 최근의 이론적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고쳐 말하자면, 모더니즘 조경은 그 실천이 부재했던 것이 아니라 이론의 공백이 마치 실천이 없었던 것처럼 역사를 구성하게 한, 이론과 실천의 잘못된 함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이는 비단 과거의,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조경실천을 이론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소통시켜야 할 조경비평의 역할이 존재하는 공간이 어디인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조경의 서른 살을 기념하던 2002년, 우리는 선유도공원이라는 소중한 실천을 만났다. 선유도공원을 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로는, 우선 그것이 폐허가 된 부지를 재활용하여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공원이라는 점이 있을 것이다. 피터 라츠(Peter Latz)의 되스부르그 노드 파크(Duisburg Nord Park)를 거의 베끼다시피 한 모방작이라는 비난도 있을 수 있다. 한강이라는 환경과 선유도 자체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지 조경가의 설계 자체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고 드라마나 CF의 단골 배경이 되고 있는 걸 보면 성공한 공원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선유도공원이라는 조경실천은 더 많은 이론적 쟁점을 지닌 채 비평의 역할을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대착오적 녹색 신화를 극복하고 화장술적 미학을 초월하고 있는 선유도공원에서 우리는 동시대 한국 조경 실천을 이론화할 수 있는 다양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도시의 진화에 따라 발생한 포스트-인더스트리얼(post-industrial) 사이트의 문제, 대지의 역사적 층위를 살린 입체적 공간의 구축, 형태와 의미와 기능에 도전하는 물성의 미학 등과 같은 쟁점은 한국 조경에 새로운 이론의 손길을 요청한다. 조경실천이 생산한 선유도공원이라는 물적 존재를 조경 내부의 차원은 물론 사회적 차원으로도 소통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이론화의 과업이 조경비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 조경은 아직 선유도공원에 다각도의 비평을 투입하지 못하고 있다. 실천과 이론의 경계에 마련된 비평의 공간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 후략 …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배정한 Pae, Jeong Hann·단국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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