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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과 가로등
- 괴로운 천민 자본의 징표 - 강철과 유리의 모더니즘 20세기말, 서울의 버스 정류장들은 세기 초의 간결한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되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 생각해보니 모던에 제대로 접근한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드디어 모던한 형식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듯 하다. 서울 시내의 버스 정류장들은 강철과 유리라는 두 종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가지 물질은 현대 건축을 이루는 뼈대이다. 고층 빌딩을 가능하게 한 철골구조와 그 철골 사이에 끼워넣어 벽이자 곧 창이되는 유리. 강철은 튼튼한 프레임이 되고 유리는 투명함으로 빛난다. 그리고 거기에 끼여든 광고판까지 해서 버스 정류장은 20세기적 전형을 이룬 셈이 된다. 그 전형은 곧 바로 상점 쇼 윈도와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원두 커피점과 닮았다. 버스 정류장의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버스를 기다리도록 하는 데 있다. 아마 더 편하게, 비가 오면 비를 맞지 않으면서 여유 있게 기다리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버스 정류장이 이런 기능을 하는 경우란 극히 예외적이어서 출퇴근 시간이 모두 지나 한가할 때뿐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면서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 그런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버스 정류장은 구조물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버스를 기다리는 장소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뛰고, 밀치고, 타고, 내리는 대도시의 정류장에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이란 거의 무의미한 것이다. 구조물 안에서 도대체 몇 사람이나 차분히 서서 버스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개의 버스 정류장은 팻말과 숫자로만 이루어진다. 하나의 기호로서의 역할만 하면 충분한 것이다. 빈약한 문화 자본, 넘치는 학력 자본 그러나 구조물로서의 버스 정류장은 기호 이상의 어떤 것이고자 한다. 모던한 디자인의 기다림의 장소이자 일종의 피난처이고자 한다. 물론 피난처로서는 다소 썰렁하지만 신선해 보인다. 그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혹은 키치 형태의 디자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기능성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생각할 것이다. 디자인과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강철과 유리로 된 단순함과 기능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20세기 말 서울에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대개 학력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할 것이다. 물론 학력 자본과 문화 자본의 부족이 서울 시민, 혹은 대한민국 국민의 교육열이 낮고 학교 졸업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제도화된 졸업장은 흘러넘친다. 낮은 문맹률, 경제적 자본을 희생해서라도 얻어내는 제도화된 학력 자본과 문화 자본의 축적은 아마 세계 최고 수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화 자본은 학위나 졸업장으로 대표되는 학력 자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 문화를 읽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것은 문화적 실천 즉, 아비튀스에 가깝다. 몇 사람이나 버스 정류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여기 서 있는지 생각해 볼까. 그리고 이것을 문화라고 여길까. 아마도 버스 정류장은 아무것도 읽히지 않은 채 그냥 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 키치 만세! 불 켜진 광고판을 매단, 강철과 유리로 된 버스 정류장은 거리 가구(Street furniture)들에서는 극히 예외적이다. 거리 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연원이 불분명한 키치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키치적 형식이라고 해서 꼭 나쁠 것은 없다. 부담스럽지 않고 가벼운 즐거움을 준다면 비난할 것도 없다. 그것이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 사적인 소유물일 경우에는 더구나 별상관이 없다. 그러나 공공시설물일 경우 키치적인 취향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건축과 거리 가구 모두 마찬가지이다. 건축의 경우 본래는 키치적이 아닌 것도 키치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 나라의 문화와 관련된 건축들을 보면 그것은 명확해진다. 나라가 작아서인지 취향이 비슷해서인지 서울과 지방 도시에 건립된 미술관이나 공연장들은 한결같이 화강암을 외벽 마감재로 쓰고 있다. 화강암이라는 재료 자체는 키치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해서 예술의 전당, 국립 현대 미술관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안기부 청사와 전쟁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화강암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똑같은 화강암을 재료로 쓰면서도 어쩌면 불국사와는 이렇게 다를까 하는 한탄이 나온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화강암이라는 좋은 재료를 유행처럼 흉내내서 씀으로써 키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즉 화강암은 그것을 사용한 맥락에 의해 키치화된 것이다. 길거리의 시설물도 마찬가지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인사동에 서 있던 철제 가로등이다. 이 가로등에 대해서 이미 몇 차례 디자인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러 사람이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끄떡없이 서 있다가 인사동 길이 재정비됨에 따라 드디어 사라진 이 가로등은 그야말로 조악한 키치의 산 표본이며 시대 착오적이고 국적 불명이다. 국제적이고 시대 착오적이라는 것은 그 기본적인 디자인의 원형이 가스 가로등을 켜던 서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서양식이니까 나쁜 것은 물론 아니다. 루이 14세 때 파리에 처음 설치된 이래 서양식 가로등은 그 도시의 환경에 맞게 디자인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 서울은 서양 도시와 여러 모로 다르다. 즉 주위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신경이 끔찍한 것이다. 게다가 그 디자인에 대한 사고 방식과 감각은 디자인의 초창기인 150년 전의 에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로등이라는 기본적인 기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장식과 무늬들이 가로등 전체에 미친 듯이 들어박혀 있다. 그 무늬 또한 터무니없다. 무궁화에서부터 고대 이집트에서 쓰이던 아칸사스 잎 무늬, 포도 덩굴을 거쳐 연꽃 무늬까지 전 지구상의 꽃무늬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모여 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철제 가로등 위에 구리 가루까지 발라놓았다. 환상적이다. 철이면서 철이 아닌 척 위장할 수 있도록 구리 가루를 바른 그 의도는 짐작이 간다. 주철이 주는 거무튀튀한 색보다는 녹슬어 가는 구리의 푸르스름한 녹이 주는 분위기를 흉내내고 싶은 것이다. 아마 이 가로등의 디자인 수준은 대한민국의 경제, 정치적 수준과 같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배후에는 관료들과의 유착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까지 든다. 왜냐하면 그 가로등은 인사동에서 이제야 비로소 사라졌을 뿐 전국 어디서나 무수히 목격되기 때문이다. 불국사, 선운사, 조각공원, 서대문 독립 공원, 국립 미술관, 미술관들, 명동, 그리고 문화와 관련 있는 곳이나 문화적인 척해야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서 있다.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서 있는 가로등 꼭대기에는 놀랍게도 가짜 갈매기까지 올라앉아 있다. 이쯤되면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키치 만세! 만세! 가로등 만세! 물론 이런 가로등 말고 주위 환경과 어울리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 정문으로 뻗어있는 큰길가의 가로등은 시각적으로 즐겁다. 비록 돔을 머리에 얹은 의사당이 빵떡 모자를 눌러쓴 비대한 사이비 예술가처럼 보여 거슬리기는 하지만 가로등은 유쾌하다. 날씬하고 높은 몸체 위에 두 개의 등을 얹고 있는 이 가로등은 꼭대기의 갈라진 부분의 곡선 때문에 마치 새처럼 보인다. 날개를 편 기러기나 갈매기가 날아가는 듯한 선의 리듬이 딱딱한 직선보다는 훨씬 가볍고 시원하다. 천민 자본주의와 관료주의가 만나서 도대체 어떻게 한 도시의 정류장, 가로등, 그 밖의 거리의 가구들이 이렇게 분열적일 수 있을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리를 조성하고 만드는 공권력을 가진 기관들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다. 그것은 우선 거리 환경을 조성할 때 거리를 걸을 만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정비의 개념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걷기에 괜찮은 공간의 조성이 아니라 감사에 적발되지 않을 일 처리가 주목적이 되면 디자인, 주위 환경과의 고려 등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거리가 문화적 환경의 하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설치, 관리를 전담하는 종합적인 디자인 체제가 갖춰지지 않고 즉흥적인 발상과 처리, 관료적 임시변통의 관행이 보태진다. 뿐만 아니라 거리의 가구들을 설치하는 주체가 서로 달라 일관성과 조화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공중 전화, 가로 매점, 신호등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서로 나뉘어져 있다. 아마도 기관 상호간의 의사소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공중 전화 박스는 한국통신이, 전신주는 한국전력이, 나머지는 대개 시청과 구청이 나눠 맡는 시스템이 전체적인 조화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물론 요즘 조성된 몇몇 거리들은 유달리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아직도 대다수의 거리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누군가는 도시가 구석마다 범행 현장이 아닌 곳이 없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범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좋든 싫든 도시는 문화 경관이다. 그리고 그 경관은 문화적 의식과 물리적 배경이 합치된 당대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건축물, 간판, 거리 가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모여 있는 서울의 경관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천민 자본주의와 천박한 관료주의라는 답 이외에 다른 답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학력 자본이 많고 아무리 폼을 잡아도 우리는 천박한 문화 경관 속에서 사는 천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강 홍 구 Kang, Hong Gu·미술가, 인하대·경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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