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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1960년대와 아동공원
  • 환경과조경 2023년 07월

수년 전, 서울 남산공원의 기록물을 수집하면서 새삼 느낀 점은 사람들은 남산 자락에 무언가를 만들었다 부수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지역은 숭례문 또는 서울역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한 북서 사면의 회현자락이다.

 

남산의 예장자락이 일본인이 한성부에 합법적으로 거류하게 되면서 조선의 도시적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지역이라면, 조선신궁이 있던 회현자락은 남산을 식민 통치의 폭력과 억압의 상징 경관으로 전복시킨 장소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그 터만 남게 되었고,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의 각종 집회 장소로 쓰이면서 이데올로기 갈등이 첨예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국회의사당 조성을 위해 기공식까지 했지만 결국 취소하는 전무후무한 전력까지 세우게 되면서, 한동안은 여론몰이가 필요한 각종 집회의 장소로 이용됐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권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시는 국회의사당 부지를 중심으로 종합미화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곳은 비로소 ‘중앙광장’(최상단)과 ‘야외음악당’(2단), ‘아동공원’(1단)으로 대변신한다. 남산이 비로소 서울 시민의 이용 공간으로 전용된 것이다. 특히 대규모 공간을 할애한 아동공원은 이후 서울과 전국의 주요 도시에 제2, 제3의 아동공원을 조성하게 하는 전향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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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서울 남산 아동공원, 1969년 1월 19일 촬영 콘크리트로 모양을 낸 미궁(迷宮)과 달팽이 미끄럼틀 시설을 확인할 수 있다.

 

1963년 4월 6일에 착공해 8월 10일에 준공, 8월 25일 개장한 남산의 어린이 놀이터를 두고 각종 신문 매체는 한국 최대 규모, 아동 낙원, 꿈의 낙원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다소 과장된 것 같지만, 변변한 놀이 시설 없이 골목길을 전전하며 노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에 한 번에 1,500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면적에 90여 종의 놀이 기구를 설치해 무료 이용하도록 했다는 점을 확인하면, 그러한 표현에 충분히 수긍이 된다.

 

남산 아동공원은 ‘남산공원 설계현상모집’(1962년 1~2월 진행)을 통해 구현됐다. 현상공모에 관한 서울시 공문 서류에 아동공원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당선작의 아이디어를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건축가 안병의(1927~2005)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채택됐는데, 기하학의 패턴과 유연한 곡선을 절충해 건축과 녹지 공간을 적절히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최상단에 야외음악당과 시민 광장, 기념물을 두고 2단에는 미술관 건물을, 가장 낮은 1단에는 아동공원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야외음악당은 최상단에서 2단 부지로 이동하고 건물 형태도 곡선으로 바뀌는 등 대폭 조정됐지만, 그가 제안한 아동공원만큼은 그대로 수용됐다. 놀이 시설은 오히려 대폭 늘어서 회전 그네, 달팽이 미끄럼틀, 미궁(迷宮), 구름다리, 분수, 원형 철봉대, 여우굴 등각양각색의 놀이 시설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선보였다.

 

환경과조경 423(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이해수, “1960~1973년 동심의 낙원, 남산공원의 문화정치: 공간을 둘러싼 권력과 공간 이용자의 의미

생산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문화』 33(4), 2018, pp.5~53.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설계현상모집, 서울기록원 소장(기록건 ID: 20150000081393), 1962.

서울특별시, 공원 기록 인프라 및 협력 네트워크 구축, 2020.

“꿈의 낙원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조선일보」 1963년 1월 12일.

“어린이 놀이터”, 「동아일보」 1963년 8월 17일.

“한국 최대 규모의 아동낙원 서울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마련”, 「동아일보」 1963년 8월 24일.

“인왕산에 어린이공원”, 「매일경제」 1969년 8월 19일.


그림 출처

그림 2.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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