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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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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거진 가격 10,000
잡지 가격 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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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눕기의 기술
성큼, 여름의 중심이다. 이번 7월호에는 조경가들이 참여한 ‘스테이’ 외부 공간 작업 일곱 편을 모았다. 김모아 기자의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의 제목처럼 “비록 잘 세팅된 편안함을 빌리는 형식일지라도, 복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이격된 약간의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 모른다”(77쪽). 올해 초부터 편집자들이 공들여 섭외해 함께 실을 수 있게 된 얼라이브어스의 ‘롯데호텔 부산 야외수영장’, 안마당더랩의 ‘호지’, 연수당의 ‘하도문 속초’, 듀송플레이스의 ‘와온’과 ‘월령지헌’,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퍼즈 글램핑장’, 펠릭스Felixx의 ‘언바운드’는 다양한 위치만큼이나 다채로운 성격을 지니지만, 경험에 방점을 둔 공간 설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갖는다. 호텔, 모텔, 여관,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숙박 시설이 언젠가부터 ‘스테이’로 통칭되고 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건 아니다. 스테이의 유행은 ‘머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공간’의 부상을 의미한다. 스테이는 단순한 숙박을 넘어 머물며 공간을 소비하고 장소를 경험하는 일련의 활동 전체를 뜻한다. 스테이(머물다)와 베케이션(휴가)을 합성한 신조어 ‘스테이케이션(staycation)’도 요즘 휴가 트렌드를 대변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스테이 문화의 확산은 공간 경험의 맥락과 계기를 짓고 엮는 조경가의 안목과 손길을 초대하고 있다. 스테이에 그대로 스테이하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을까. 다른 경우와 달리 스테이 원고 교정지는 집중해서 살피기 어려웠다. 편집된 텍스트와 이미지의 디테일로 눈이 가지 않았다. 교정지 속 스테이 공간 한가운데 두 발 뻗고 누워 일상을 규정하는 수많은 관계와 의무를 다 내려놓고 잠에 빠져드는 장면을 계속 상상했다. 이번 여름엔 나도, 독자 여러분도 어느 안온한 곳에 한참 머물며 침대로부터 등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 완벽한 스테이케이션을 누릴 수 있기를.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다시 나른한 잠을 즐기다 후덥한 여름 정원을 산책하고, 책 몇 쪽을 읽다 다시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는 온전한 시간. 홈캉스이건 호캉스이건 책 한 권은 동반해야 와식臥食 생활이 완성된다. 『환경과조경』 신간 말고 다른 책을 가져가야 한다면, 나는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현암사, 2015)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 “침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희극 배우 그루초 막스의 말로 포문을 여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통쾌하게 눕는 자세를 옹호한다. 누운 상태만큼 편안한 자세가 어디 있겠는가. 저자 브루너의 말처럼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다. 우리는 누운 자세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슬픔이나 그리움에 잠기고, 백일몽을 꾸고 고민을 할 수도 있다.”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고 순발력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하며 성실과 근면을 입증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누운 자세는 게으름의 표상이자 무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브루너의 생각은 다르다. “누워 있는 것은 짙은 안개 속에서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할 수 있다. …… 누워 있는 행위는 목표 없이 걷는 수직적 산책의 수평적 짝꿍”이다. 눕기는 앉고 걷고 뛰는 무한 경쟁 사회에 브레이크를 거는 수평적 삶의 지표다. 비생산적이라 더욱 소중하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위쪽(실내에서는 천장, 야외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때면 움켜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며, 우리의 생각 또한 부유하기 시작한다. 몸의 자세를 바꿈으로써 마음도 따라 변하는 것이다.”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을 자임하는 『눕기의 기술』은 다양한 시각으로 눕기를 관찰한다. 7만 년 전의 침상, 수면에 혁명을 일으킨 코일스프링 매트리스의 발명과 전파,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누워서 음식을 먹기 위해 고안한 소파와 그 현대적 변용, 침실의 사회적 변천사 등 역사적 주제가 책의 뼈대를 이루는 씨실이라면, 과학과 문학, 철학은 책에 무늬를 입히는 날실이다. 누워서 눕기의 기술을 익히며 『눕기의 기술』을 읽다 보면 수평 자세와 와식 생활에 대한 묘한 자부심까지 생긴다. 눕는 행위 하나로 중력이라는 자연의 진리에 순응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경쟁에 저항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번 여름 어딘가에 머물며 오래 누워 있는 시간을 실천할 계획이라면, 생활의 수직/수평 비율을바로 잡을 생각이라면, 그 깊은 심심함과 이완의 정점을 함께할 친구로 『눕기의 기술』을 권한다. 이 책은 누워서 읽어야 제맛이다. 읽다 보면 잠이 스르르 온다. 읽다가 얼굴에 떨어뜨려도 책이 워낙 가벼워 절대 코뼈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풍경 감각]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길을 나선다. 삐리릭. 도어록 소리를 듣고 나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잠근다. 철컥 철컥 철컥. 세 번 손잡이를 돌려 확실히 잠겼는지 살핀다. 열쇠 꾸러미를 끌러 왼쪽 앞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다 멈춘다. 가스 밸브를 닫았는지, 창문 잠금 장치를 빼먹지 않았는지, 콘센트 전원 버튼을 껐는지 문득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나오기 전에 두어 번씩 확인했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계단을 오른다. 작업실로 돌아와 잠금 장치와 버튼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확인한다. 역시 다 괜찮구나. 다시 집을 나선다. 이 과정을 거치느라 3분 거리 버스 정류장 가는 데 늘 20분 정도 걸린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괜찮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번 더 온갖 버튼을 확인하는 일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깜빡 잊고 열어 둔 창문으로 누군가 들어오거나, 가스레인지나 과열된 콘센트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습관을 고칠 수 없을까 싶어서, 정말 도둑이 들거나 불이 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아깝지만 그렇다고 정말 비싸거나 다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거의 없다. 중요한 파일은 클라우드에, 그리고 돈은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컴퓨터와 태블릿 PC, 스캐너, 액정 태블릿이 없어지면 큰일이다. 당장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다시 구하기엔 가격도 만만치 않다.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지 못한 옛 작업물 파일과 종이 원화는 잃어버리면 끝이다. 작업실은 여러 가구가 사는 빌라인데, 만약 내 방에서 시작한 불이 건물을 홀랑 태운다면, 그래서 누군가 큰 해를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계단 몇 번 오르내리고, 버튼 여러 개를 다시 확인하고, 3분 거리에 20분을 쓰는 게 무슨 대수인가. 아무래도 이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롯데호텔 부산 야외수영장
한국 정원 문화와 수영장 땅콩 모양으로 배치한 철쭉 등 관목 군락, 다채롭게 어우러진 하부 식재 위에 자리 잡은 곡간형 조형 소나무, 그리고 그 속을 굽이치는 산책 동선. 한국 정원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지만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일상적 조경 공간의 전형이자 익숙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너무나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어쩌면 클리셰라고 부를 수도 있을 정원의 모습에서 출발했다. 이 글은 우리가 제안한 수영장에 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리조트와 호텔 수영장은 넓게 트여 개방감 있는 구성을 기반으로 그 자체의 스케일을 자랑하며 많은 사람이 모여 물놀이를 즐기는 활동적 공간으로 조성된다. 기존 수영장의 전형들에 대해서 반감이나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정원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과의 사색적 교감을 수영장 공간을 통해 더욱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자연과 깊게 교감하는 사유의 정원으로서의 수영장, 그 지점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이었다. 온전히 몸을 담그는 자연 정원을 산책하며 식물을 바라보고 풀 내음을 맡으며 자연 속을 걷는 것은 매우 직접적인 자연과의 교류다. 이러한 교류를 프로젝트의 목표이자 공간에서 제공하는 주요 경험 중 하나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뤄왔던, 혹은 완성도 있게 조성된 기존 정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과의 소통조차 여전히 자연이라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사람들은 수영장이라는 유형의 공간에서 최대한 살갗이 자연과 맞닿은 채로 물 속에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이라는 자연 그 자체에 온몸을 담그며 느끼게 된다. 이만큼 자연과 직접 강렬하게 교감하는 공간이 있을까. 오감의 활용과 공감각적 체험. 조경을 학문으로 접하면서부터 실무적으로 여러 난관을 돌파하고 있는 지금까지 설계를 하며 가장 자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이 개념을 실질적으로 적용할 기회라고 여겼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갈구하는 자연에 대한 요구를 채워주는 정원이라는 유형, 자연 소재 중 가장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면서도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연 그 자체를 깊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물의 공간 수영장. 이 둘을 접합하는 접근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핵심 전략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설계 과정에 들어갔다. 산책하는 수영장 자연 속을 천천히 걷고 또 걸으며 만나는 정원으로 수영장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우선 공간 전체의 골격을 흔들어야 했다. 우리의 의지도 그러했지만 발주처의 요구 사항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앞서 제안된 해외 설계사무소의 설계안을 전면 재검토해야 했으며, 산책이 가능한 수영장의 레이아웃으로 구성했다. 정원은 크게 식물과 교감하는 구간, 물과 교감하는 구간으로 나뉘어 있으며 굽이굽이 산책하며 식물과 물을 만나게 되는 길을 정원 형태로 조성하였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물 속에 들어가 유영하기도 하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불현듯 마주친 정원 속에서 쉴 수도 있다. 더불어 전체 공간 속 다양한 시점에서 미학적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수영장이라는 주어진 프로그램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도록 섬 형태의 녹지들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공간들을 분리했다. 식재 설계 시공의 현실성을 고려해 교목의 수량을 극도로 제한했다. 목대가 굵은 다간형 교목을 심어 소수의 수량만 활용하면서 야생적이면서도 풍성한 공간감을 만들었다. 공간 전체를 시각적으로 장악하는 주요 수종으로 제주도에서 온 종가시나무를 선정했다. 다간형 상록수이며 제주도에서 자라는 뿌리가 깊지 않은 천근성 수종이라 현장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할 최적의 수종이었다. 본래 공간 전체에 단일 수종으로 종가시나무만 식재해 단일 경관이 주는 웅장함을 연출하고자 했으나, 방문객들에게 더 다양한 볼거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호텔 측 의견을 수용했다. 종가시나무와 홍가시나무를 주요 대교목으로 정했고, 작은 포인트 수목으로 꽃이 여러 번 피는 산다화, 물가를 향해 조형적으로 가지를 뻗어내는 곡간형 해송을 중앙부에 식재했다. 예상보다 녹지 구간의 폭이 협소했다. 충족해야 하는 수영장 면적뿐 아니라 선베드 등의 좌석 수가 수영장 운영의 핵심적인 부분이기에 녹지 폭을 다소 좁게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도 최대한 풍성한 자연을 연출하기 위해 부피감이 크면서도 거친 질감으로 야생미를 발휘하는 식물들이 필요했다. 대표적으로 팔손이는 볼륨감이 우수할 뿐 아니라 넓은 잎들이 겹쳐 깊이감을 자아내기에, 차지하는 면적에 비해 매우 깊고 풍성함을 연출하는 주요 수종으로 이용했다. 중앙부 섬 형태의 녹지 구간은 대부분 치자나무 한 수종으로 군락을 조성했다. 하나의 수종으로 구성한 군식은 구불구불한 형태미를 드러냄과 동시에 작은 면적이지만 대경관을 보여준다. 치자나무 군락 사이사이에 독립수로 식재한 설류화는 반듯한 초록의 면 위로 거친 질감이 대비를 이루며, 이른 봄에는 하얀 꽃의 덩어리가 되어 또 다른 경관 포인트를 만들어 낸다. 교목뿐 아니라 모든 관목과 지피 초화는 현장에서 설계사 감리 하에 위치와 방향을 정했다. 설계자로서 현장을 방문하고 손으로 드로잉하며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세심하게 식재 수종과 위치를 정했지만, 배식만큼은 최종적으로 현장에서 결정한다. 실제 현장에서 느껴지는 공간감, 현장으로 배송된 실제 식물의 형태와 느낌 등을 면밀히 봐가며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식물들을 재배치했다. 완성된 후 정원의 식물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의도한 것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포장과 시설물 설계 포장 소재 선정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 맨발로 다녀야하는 수영장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쓰이는 데크나 타일 혹은 판석 석재가 아닌 철평석 부정형 판석 포장을 제안했다. 호텔 건물 7층에 위치한 400평 남짓한 공간에 깊은 자연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거친 느낌의 포장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설계자 스스로 확신을 갖기 위해 두세 달간 철평석 포장이 보일 때마다 맨발로 걸어보았다. 발주처와 운영팀 모두 수영장 운영 본연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공간 전체의 콘셉트를 지키는 데 힘을 실어 주었다. 결국 흑색 철평석 포장이 수영장의 주요 포장재로 선정됐다. 벽면을 포함한 석재 시설물들의 디자인 콘셉트는 같은 석종에 다양한 마감 처리를 적용해 일관성을 갖춘 통일감 속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벽체 마감은 포천석으로 통일하되 피죽 마감, 자연면 마감, 잔다듬, 거친 정다듬 등 다양한 마감과 줄눈 디자인을 통해 공간적 위계와 다양성을 부여했다. 수영장으로 진입하는 계단도 마치 평상을 연상시키는 패턴을 적용하고 다듬기 정도에 따라 마감의 세밀한 변화를 주었다. 일부 벽체는 스타코 마감과 종석긁기 마감의 거칠기 정도 차이로 패턴을 구현했다. 조경설계 팀이 건축과 인테리어를 포함한 프로젝트 총괄 PM 역할을 수행했다. 수영장과 맞닿은 레스토랑 건물, 스파 공간, 화장실과 사우나 시설 등 수영장을 이용하는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건축물의 입면 설계까지 조경에서 제안했다. 조경 시설물은 기성품을 배제하고 제작에 기반한 설계를 진행해 구조 검토까지 포함한 과정을 수행하였고, 수영장에 놓일 야외 가구 선정도 조경이 진행했다. 타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이 부족하지만 과업을 수행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도움 받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 타 업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정원으로서의 수영장’이라고 해야 할지 ‘조경으로서의 수영장’이라고 해야 할지 표현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조경과 정원을 분리하고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필자는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필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정원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는데 표현의 오해가 없길 바란다. 모든 과정에서 설계사의 본래 의도와 디자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노력한 발주처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더불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해 준 이향지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과 설계를 진행하며 설계 의도부터 소재 선정까지 마음껏 디자인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활동적 물놀이 공간으로서의 수영장이 아닌 차분하고 사색적인 산책형 정원으로서의 수영장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이용되길 희망한다. 진행 금민수 디자인 팽선민 김태경·이향지 인터뷰 자연과 교감하는 도심 정원 주택정원, 공원, 리조트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태경(이하 김) 해외 설계사무소의 설계안대로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식재 설계를 도와달라는 발주처의 요청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발주처가 수경 시설과 정원이 어우러진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며 수영장을 새로운 콘셉트로 기획해 보자고 제안했다. 평소에 식물과 정원을 토대로 다른 장르와의 콜라보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재밌는 프로젝트가 될 것 같았다. 오픈된 넓은 풀과 데크가 있고, 가구들로 구성된 개방감 있는 수영장으로 만들고자 했던 기존 설계안을 재검토하며 새로운 방향의 설계안을 만들어 나갔다. 발주처와의 여러 논의를 통해서 자연과 교감하며 산책하는 정원을 보여주는 수영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수영장을 정원으로 재해석한 것이 새롭다. 이향지(이하 이) 이용자들이 수영장에서 얻고자 하는 경험 자체를 다르게 해석해 봤다. 공간을 설계할 때 지역의 맥락을 고려해 정체성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부산이 바닷가 도시인만큼 바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상지는 바다에서 다소 떨어진 도심 지역이기에 오션뷰를 가진 호텔만큼 바다의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장소였다. 대신 도심 속 호텔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고 산책 등 정적인 활동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얻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선택한 요소가 바로 정원이었다. 일상 속 정원처럼 낯설지 않게 언덕을 만들거나 식재를 해 더욱 친밀하게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했다. 수영장을 일종의 도심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발주처가 이러한 콘셉트에 흔쾌히 동의하고 지원한 덕분에 가능했다. 김 조경은 자연과 교감하는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자연과 교감한다는 것은 감각 기관을 통해 소통하는 일이다. 숲에 들어갔을 때 좋은 이유는 풀 내음과 피부를 스치는 바람, 적당한 온도와 습도 등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키우는 화분을 통해 식물과 교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입체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을 체험할 수 있는 작은 스케일의 공간 중 하나가 정원이다. 마찬가지로 수영장은 물속에 몸을 담그며 물이란 자연과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는 장소다. 호텔에서 오래 전부터 수영장이 유용한 요소로 활용됐던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적극 활용해 수영장과 정원의 결합이 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둘 다 자연과의 교감이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물 사이사이를 걸으며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식물과 교감하고, 물에 몸을 담근 채 걸으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산책의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정원 공간을 섬 형태 녹지를 중심으로 나눈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섬 형태로 녹지를 설계할 때 굉장히 여러 번 그리면서 각도와 위치 등을 고심했다. 우선 섬 형태로 녹지를 구성한 이유는 산책할 때 시야의 개폐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주고 싶었다. 숲 사이로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는 물이 잘 안 보이기도 하고, 탁 트인 수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등 작은 공간이지만 다양한 보행 경험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또한 산책할 때 걷는 재미를 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걷고자 하는 모든 길과 모든 요소가 보이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길이 뻔히 보이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걷다가 새로운 공간을 마주치도록 굽이치는 곡선 형태로 중심 동선을 조성했다. 수영하며 뛰어놀 수 있는 수영장보다 유유히 산책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물속에서도 걸으면서 공간을 둘러볼 수 있게 일반 수영장에서 볼 수 있는 장방형이 아닌 곡선 형태로 수영장 풀을 만들었다. 특정한 포인트가 아니면 수공간 전부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물 안에서 극적으로 자연을 느끼며 산책할 수 있다. 김 대상지는 지상층이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 7층 옥상으로, 주변의 빌딩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밖의 전망보다는 공간 내부에서의 경험이 중요했다. 내부에 들어와서 섰을 때 진짜 숲속에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섬 형태의 녹지를 중첩해 녹지 너머로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공간이 가려지고 보이도록 연출했다. 굽이치는 동선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공간을 구성해 다양한 전이 경험을 유도했다. 자쿠지 등 다양한 공간을 어떤 방식과 기준으로 구성했나? 이 전체적으로 한눈에 보일 수 있도록 연출했다. 수영장의 자쿠지에서 키즈존까지 이어지는 곡선의 형태가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했다. 자쿠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인 만큼 정원의 가장 깊은 숲에 배치해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선베드 등 수영장에는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요소가 있다 보니 녹지의 폭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식물의 높이나 식물의 잎사귀들이 만들어 내는 밀도를 통해서 공간의 깊이감을 형성해 작은 공간에서도 밀도 있게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수영장 자체는 인공 지반 위에 조성된 테라스 공간이지만, 전체적으로 실제 자연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싶었다. 플랜터에 심긴 나무가 주는 인위적인 느낌을 덜어내기 위해서 토심에 상관없이 플랜터를 사용하지 않고 식재했다. 진짜 숲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땅에 뿌리 내린 나무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건축물의 입면 등에 여러 가지 마감 방식으로 패턴을 구현했다. 김 조경가의 역할 중 하나는 자연을 재해석한 공간을 통해 자연을 극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일 석종을 이용해 건축물 입면부터 시작해서 바닥 포장까지 다양한 방식의 마감으로 패턴을 구현했다. 이를 통해 자연 속 계류의 경관을 표현하고 싶었다.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의 계류에 가면 군데군데 나무도 있고, 깎아지른 큰 절벽도 있고, 석종은 같지만 마감이나 형태, 물성, 색감이 전부 다 다른 돌들이 흩어져 있지 않나. 이처럼 자연 속에서 단일한 석종의 다양한 마감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모티프로 삼아 이 프로젝트에 구현했다. 건축과의 협의를 통해 밝은색 화강석으로 석종을 통일하고, 마감과 패턴은 각 공간의 위계에 맞게 다양하게 처리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지지만 단조롭지 않도록 만들었다. 거친 질감의 철평석 부정형 판석을 수영장에 사용하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 자연을 구현한 정원 속에서 딛는 땅들이 거친 자연 안에 놓인 대지처럼 느껴지기를 바라며 철평석 부정형 판석으로 바닥 포장을 했다. 철평석이란 소재를 수영장에 적용하면 운영상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한강 반포지구에 있는 다양한 철평석 포장을 맨발로 걸어보며 철평석 특유의 질감을 느껴봤다. 온몸으로 경험해 보면서 이 정원이 가진 특유의 자연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우려와 달리 발주처에서 운영상 어려움보다는 공간의 완성도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었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한 덕분에 철평석 부정형 판석을 바닥 포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건축과 인테리어를 아우르는 PM을 맡았다. 이 프로젝트의 특 수성 덕분이다. 수영장을 중심으로 수영장을 둘러싼 건물 벽면을 포함한 전체적인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전체 디자인이 통일성을 갖도록 조율하는 총괄 디자이너가 필요했다. 발주처도 수영장과 건물을 따로 분리하지 말고 정원으로서 기능할 수영장의 배경을 맘껏 제안해 보라고 독려하면서 건축과 인테리어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게 됐다. 특별히 PM이란 공식 직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디자인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이런 역할을 처음 맡게 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고, 많이 반성했다. 건축과 인테리어등 타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다행히 건축 쪽이 많은 도움을 줬다. 앞으로 PM과 같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으려면 타 분야에 대한 지식 습득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다년간 다뤘던 주택정원 프로젝트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나? 김 기본적으로 주택정원은 스토리나 맥락, 이용자, 땅의 위치 등 모든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설계할 때 실제 보이는 공간감이나 디테일이 중요하다. 또한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튀는 요소 없이 점점 예뻐지고 질리지 않게 하는 요소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 규모의 상업 공간에서는 주택정원에서 경험했던 공간감이나 디테일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리는 선이나 디자인은 조금 더 과감하게 시도하는 편이다. 또한 365일 내내 머무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해서 이용자들이 짧은 시간에 감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하려고 한다. 상업 공간을 설계할 때 공간의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들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첫인상을 설계에 어떻게 반영했나? 김 전형적인 수영장의 풍경을 정원으로 해석해 전반적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아낸다. 수영장인데 수영장 같지 않다고 할까. 하지만 이러한 경관을 진입하는 입구부터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6층에서 수영장으로 올라오는 계단은 보통의 호텔 로비처럼 만들었다. 수영장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자연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며 공간에 대한 힌트를 일절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계단으로 올라와서 수영장을 처음으로 마주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경관이 펼쳐지도록 만들었다. 이용자에게 공간의 첫인상을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주고 싶었다. 최근 리조트, 호텔 등 큰 규모의 상업 공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러한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재 조경 트렌드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 조경이 일종의 프리미엄 역할을 한다. 호텔이나 리조트는 객실에서 보이는 전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객실이 좋은 전망을 전부 가질 수 없다. 좋은 뷰를 가진 객실은 높은 가격으로 책정된다.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객실의 가치를 좀 더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조경을 활용한다. 높은 가격을 책정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뷰로 인한 객실 간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프리미엄 장치로 작동하는 것 같다. 호텔 등 상업 공간에서 조경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이 조경 공간은 상업 공간에서 가성비 있는 투자다. 건축이나 인테리어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큰 공간적 경험을 창출한다. 특히 요새는 카페, 복합문화공간 등 다양한 상업 공간이 많이 생겨나면서 정말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도심 내에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는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작은 면적이라도 자연과 교감을 꾀할 수 있고,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조경 공간이 상업 공간에 들어서면 이용자들을 끌어들이는 좋은 요소가 될 것이다. 특히 요즘 세대는 좋은 장소에 가서 좋은 시간을 보낸 걸 사진으로 남기고 SNS에 공유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조경 공간이라면 상업 공간의 매출과도 연계되는 매력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 상업 공간에서 조경의 역할이 중요하다. 특히 호텔이나 리조트는 그 지역에 놀러 오거나 쉬러 오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장소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가급적 호텔과 리조트는 그 지역만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어야 한다. 조경은 지역의 기후나 지역적 맥락을 고려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호텔이나 리조트 조경 공간을 작업할 때는 공간을 통해 그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지역에 대한 이해를 돕는 스토리텔러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디자인 팽선민 사진 유청오, 부산 롯데호텔+얼라이브어스 글 김태경 얼라이브어스 소장 조경설계 얼라이브어스 발주 부산 롯데호텔 시공 경원필드 CM 롯데CM 사업본부 위치 부산시 부산진구 가야대로 772 면적 1,600m2 완공 2022. 12. 사진 부산 롯데호텔+얼라이브어스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현대 도시를 만들어가는 건축, 조경, 도시재생, 문화 기획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그룹이다. 평등한 커뮤니케이션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학제간 디자인을 추구하며, 이러한 방식이 도시의 다양한 문맥에 더 좋은 디자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김태경은 고려대학교에서 생태공학을, 하버드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미국과 한국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부터 얼라이브어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테일과 식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공간의 미감에 주목한다. 이향지는 동아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후, 중국에서 기초 실무를 경험하고 한국에서 다년간 설계 경력을 쌓고 있다. 현재는 얼라이브어스의 구성원으로 일하고 있다.
호지
하늘 호 땅 지: 굿모닝 굿나이트 호지는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을 재해석한 공간이다. 호지에는 손님이 머무는 공간인 둥근집, 긴집, 팔각집, 이렇게 세 가지 형태의 건물이 있다. 그 옆에 호지를 운영하는 가족의 집과 모두가 함께 이용하는 공용 공간을 합해 다섯 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모든 집은 땅에서 허리춤 높이로 떠 있고, 같은 높이의 둥근 길이 다섯 개의 집들과 이어져 있다. 적당한 거리감으로 떨어져 각각이 분리되기도, 둥근 원을 따라 하나로 연결되기도 한다. 가장 편안한 사람과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도, 해질녘 산책을 하거나 아침을 먹으러 이동하는 길에는 둥근 원 위를 따라 이웃과 스치며 걷게 되는데, 마치 담이 없는 작은 마을 같다(호지 홈페이지의 소개 글 일부). 건축 이야기 서재원 소장(에이오에이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의 설계 의도를 정리해보면, 최근 흔히 만들어지는 고급스러움을 지향하는 공간과 과한 인테리어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골 마을 속 소박하고 겸손한 공간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는 호지가 머무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상기하게 하는 동시에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호지의 건물이 주변 집들보다 크면 안 됐고, 세련되기보다는 둔탁해야 했으며, 시골에서 흔히 보던 것이었으면 했다. 시골에서 보이는 창고나 비닐하우스, 원두막은 대게 자립한 오브제 형태가 많은데, 이를 독립된 형태의 건물로 표현했다. 이 건물들이 재현이 아닌,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도 아주 생경하지 않은, 머무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억을 소환하는 정도이길 원했다. 그 결과 건축물은 중립적인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간단한 대칭을 따르는 디자인으로 구성됐다. 투박한 외부와 반대로 온통 나무로 덮인 내부 공간에서는 첼로 악기상자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Space』 2022년 12월호 참조). 정원의 방향성: 식물의 터전 건축과 맥을 같이 하고자 호지의 정원은 스타일이나 조형성에 초점을 두지 않고, 생물과 환경, 그 속의 연결과 다양성에 기반을 둔 곳으로 계획했다. 본래 터가 가진 특성과 변화된 환경에 어우러지는 다양한 식물을 선별해 심었다. 이곳에 뿌린 내린 식물은 곤충, 새, 야생 생물과 함께 먹이사슬의 연결고리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새로 심은 식물이 주변 식물과 경쟁, 때로는 공생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계획했다. 새순이 돋아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잎이 갈변해 떨어지기까지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닮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보는 호지 정원의 모습도 이들이 살아가는 생의 한순간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저 삶과 죽음 사이의 과정일 뿐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보이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랐다. 발아래 정원 땅과 물길, 여린 풀들 위로 살며시 놓인 듯한 둥근 길 위에 서면 발아래의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다. 건축이 계획한 떠 있는 둥근 길은 식물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 한 존중으로 읽힌다. 정원에 들어가 좀 더 가까이에서 식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커다란 원형의 길을 따라 걸으며 주변 풍경과 식물의 시퀀스 변화를 보는 것도 꽤 즐겁다. 떠 있는 둥근 길 밑에는 그늘이 생겨 작은 그늘 식물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주인 집 강아지도 뜨거운 날에는 이 길 밑을 찾는다. 식재 식재 수목 선정 기준은 마을 경관을 이루는 수종과 지역 자 생종이었다. 정원의 구조와 배경이 될 가장 큰 교목은 주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으로 선정해 주변 과 잘 어우러지게 했다. 그리고 강릉 지역에서 잘 적응 하고 자생하는 수종을 택했다. 예를 들면, 타입 1-마을 경관 수목(회화나무, 이팝나무, 단풍나무 외), 타입 2-마을 경관 수목이면서 독립수(계수나무, 중국단풍, 외), 타입 3-마을 경 관 수목이면서 과실수(자두나무, 감나무, 산수유 외), 타입 4- 지역 자생종(마가목, 개암나무, 참죽나무, 국수나무, 옻나무 외), 타 입 5-지역 자생종이면서 대상지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수종(버드나무, 싸리나무 외), 타입 6-지역 자생종이면서 상 록이며 차폐 기능을 가진 수목 등 마을 경관과 지역 자생종의 기준에 맞는 수종을 선정하고 각 수목의 특 성을 구분해 정리했다. 대상지를 입구 중심으로 봤을 때 오른쪽은 논 경관, 위 쪽은 계절마다 감자, 파 등이 심겨 바뀌는 밭 경관을 가지고 있다. 이를 고려해 초화와 관목을 심었다. 둥근 길의 오른쪽 부분에 논 경관의 연장 요소로서 진퍼리 새와 솔새를 식재했다. 밭 경관을 올려다보는 팔각집, 긴집, 둥근집의 바깥 마당에는 초화 식재를 최대한 줄 이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시선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대관목을 심었다. 땅을 잔디와 토끼풀로 덮고자 했는데, 공사비 절감을 위해 씨 뿌리는 방법도 계획했다. 씨를 뿌리는 식재 방 식은 발아가 돼서 자라기까지 물과 잡초 관리에 심혈 을 기울여야 한다. 호지 정원의 핵심인 중앙은 야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식물로 구성했다. 건축의 콘크리트가 가진 거친 질감과 섬세한 식물 잎의 부드 러움이 균형을 이루길 바랐고, 정원이 아닌 자연의 모 습과 더 가까웠으면 했다. 땅의 건습도에 따라 내건성 식물(순비기나무, 매화오리나무, 바이텍스, 붓들레아, 좀새풀, 멍석딸기, 사초류, 톱풀 외), 호습성 식물(버드나무, 골풀, 창포류, 꼬랑사초 외), 그늘 식물(고사리류, 풍지초, 휴케라 외)을 식재했다. 주인집과 가장 가까운 구간에는 허브 식물 위주로 심었다. 물웅덩이: 둠벙 호지의 터는 본래 그늘이 없는, 뜨겁고 매우 건조한 땅 이었다. 토질이 모래 같았고 그래서 물이 빨리 빠질 것 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와 사 초류, 여러 잡풀이 자생하고 있었고 비가 오면 빗물이 며칠을 빠지지 않고 고이는 구간이 있었다. 지하수위가 매우 낮아, 비가 올 때 순간적으로 지하수위가 높아지 며 물이 고이게 되는 현상으로 보였다. 모래 성질의 흙 은 물을 쉽게 빠지게 하는 만큼 물이 거꾸로 타고 오르 기도 좋았던 것이다. 방수를 하지 않았는데도 비가 많 이 오면 물이 열흘 이상 차 있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 스럽게 물이 고이도록 일부 구간의 땅을 꺼트려 물이 담기는 그릇, 즉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물이 찬 웅덩이 의 모습은 주변 농경지에서 볼 수 있는 ‘둠벙’ 같기도 하다. 자연으로의 정원 호지의 건축주는 숙박 시설을 지으며 자본주의의 최고 가치인 효율성과 생산성을 따지지 않았다. 건물의 수와 배치뿐 아니라 대지의 중앙 공간을 자연에 양보했다. 그로 인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더 많은 가치를 얻었다 고 생각한다. 호지 정원은 점차 힘의 질서에 따라 자연의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배식 계획의 아름다움 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통제와 가꿈이 필요하 겠지만, 특별한 형태를 만들지 않았기에 조성 초기의 모습을 유지하려 애쓸 이유도 없다. 강한 것은 억제하 고 약한 것은 도와주며 균형을 잡아가면 될 일이다. 그리고 호지 정원에는 조명이 없어 밤에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하늘에서 쏟아 지는 듯한 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오현주, 이범수 안마당더랩 소장 조경 설계 안마당더랩 조경 시공 안마당더랩 건축 에이오에이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위치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신왕길 78 대지 면적 3,361m2 건축 면적 436.86m2 조경 면적 2,924.15m2 완공 2022. 6. 사진 박성욱, 진효숙 안마당더랩(Anmadang The Lab)은 이범수, 오현주가 2016년 설립한 디자인 작업실이다. 소속 디자이너들과 함께 외부 공간을 기획, 설계, 시공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를 따르고 여러 가치를 존중하는 설계를 통해 균형감을 잃지 않는, 선명하지만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가려 한다.
하도문 속초
모든 것의 처음, 목련 하도문 속초는 카페와 스테이가 결합된 자연친화적 휴양복합시설이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15분 이상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이곳은 속초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시원한 오션뷰나 장엄한 마운틴뷰와는 거리가 먼 조용한 시골 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신 예전 땅 주인이 딸을 낳은 후 집 주변에 심었다는 십여 그루 중 유일하게 30년 넘는 세월을 버티고 살아 남은 거대한 목련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구상 최초의 현화 식물인 목련이 지닌 원초적 매력은 서울 토박이 건축주를 이곳까지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도 6년간 근무했던 회사를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한 후 처음 수행한 프로젝트이자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 강원도에 만드는 공간이기에 더욱 애정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상승과 하강의 시퀀스 프로젝트명인 동시에 초기 공간 이름을 매그놀리아(Magnolia)(목련)로 정했던 만큼 모든 계획의 방향은 목련 중심으로 결정됐다. 진입도로와 접한 남쪽을 제외한 바깥은 야트막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부지 위로 중정을 품은 ㄷ자 모양의 건축물이 얹혔다. 목련을 그대로 두고 바닥 레벨이 결정되어 도로와 약 6m의 높이 차가 생겼고, 대중교통과 도보로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한 만큼 최대한 많은 주차 공간을 확보하다 보니 3m 높이의 옹벽과 계단이 생겼다. 여기에 목련의 뿌리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60cm 높이의 툇마루까지 더해져 이동에 불리한 요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를 적절히 활용해 감각의 밀도를 압축적으로 높여 나가고자 했다. 멀리 돌아가도록 조성된 진입로에는 디딤석을 놓아 걷는 속도를 늦추고, 툇마루와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가려져 있던 빗물 정원이 보이도록 했다. 카페 창과 정원 사이로 난 회랑을 따라 걸으며 부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야 건물 입구를 만날 수 있다. 독채로 운영되는 2층 스테이의 문을 열고 현관을 지나 내부의 꺾인 계단을 오르다보면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자그마한 중정이 반겨주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1층과는 다른 시선으로 창 너머의 목련을 마주하게 된다. 발 아래로 빗물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걷다보면 노천탕과 이어진 테라스 정원이 나타나 상승을 통한 극적 체험의 시퀀스가 완성된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신준호 연수당 공동대표 조경 설계 연수당(신준호) 조경 시공 연수당(신준호, 조현철), 마이조경(김명윤, 손호성), 서권식, 강문권 건축 설계 정초이웍스(정대건, 최수희) 건축 시공 우리마을A&C 위치 강원도 속초시 하도문길 50 대지 면적 1,590m2 건축 면적 412m2 연면적 525m2 완공 2022 사진 권보준, 신준호, 박선영 ‘자연스럽게 심는 집’이란 의미를 지닌 연수당(然樹堂)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의 원리를 탐구하며 지속가능한 공간을 계획하고 만드는 집단이다. 제주도 서귀포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떠돌며 다양한 생명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와온
휴가차 제주에 오는 방문객의 목적은 대부분 비슷하다. 각박한 생활을 뒤로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함이지 않을까. 조금 더 나아가면 도시 생활의 피로함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제주도 조천읍 함덕 해변, 마을 안쪽 골목길 끝에 자리한 제주 돌집 ‘와온’은 치유를 테마로 한 스테이다. 지친 삶을 치유할 수 있는 테라피 스테이로 설계됐다. 처음 방문한 대상지는 여느 제주 돌집과 마찬가지로 안거리와 밖거리로 구분되어 있었다. 외부 공간은 크게 진입 정원, 중정, 안거리의 후정, 밖거리의 후정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골목을 지나 대문을 열면 보이는 진입 정원을 지나 안거리와 밖거리로 들어서는 구조였다.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는 건물 크기만큼의 중정이 있었다. 건축 계획에 따라, 스테이 안거리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침실과 주방, 욕실로 구성된 컴포트하우스가 되었다. 밖거리인 테라피하우스는 치유와 회복을 하는 온탕과 사우나, 차를 즐기는 다실이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치유와 회복이라는 테마가 명확한 만큼 정원도 테라피 그 자체가 되기를 바라며 진입 정원과 중정을 허브로 가득 채웠다. 수종은 단순하게 티트리, 로즈마리, 타임을 선택했다. 대문을 열면 군식된 티트리로 인해 눈앞 가득 초록을 마주하게 된다. 티트리 하부에는 제주의 돌을 배치하고 크리핑 로즈마리, 고사리를 식재해 제주의 자연 소재를 기반으로 한 티트리 숲을 조성했다. 티트리 숲을 지나면 탁 트인 시야 아래로 로즈마리가 가득한 허브정원이 나타난다. 중정인 허브정원에는 높이 2m 정도 되는 호주아카시아를 심었고, 그 외 키 큰 나무는 심지 않았다. 컴포트하우스와 테라스하우스의 창을 통해 봤을 때 답답하지 않은 경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중층 식재로 로즈마리를, 하층 식재로 크리핑 로즈마리와 타임을 심었다. 모두 사계절 내내 초록을 유지하는 수종으로, 어느 계절에 오더라도 초록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송이슬 듀송플레이스 소장 조경 설계 듀송플레이스 조경 시공 듀송플레이스 건축 설계 지랩건축사사무소 건축 시공 진용건설 위치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3181 면적 304m2 완공 2019 사진 이병근, texture on texture 듀송플레이스는 자연 소재를 활용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조경 디자인·시공 회사다. 현장을 직접 마주한 뒤 콘셉트와 기능, 아름다움을 고려해 그곳만의 오롯한 분위기를 설계해 만들고 유지하고자 한다.
월령지헌
마을이 반달 모양이라서 이름 지어진 월령리는 선인장 군락지로 유명하다. 월령리 마을 안 좁은 골목길 끝에 월령지헌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켜온 고목이 입구에서부터 반겨준다. 옛 돌집을 밝은 색감으로 마감하고 개조한 스테이 내부는 고재와 빈티지 가구로 가득 차 있다. 스테이 내부처럼 외부 공간도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지도록 꾸렸다. 기존의 큰 나무와 선인장이 가득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새로운 수종인 호주아카시아와 유칼립투스, 그라스를 심어 항상 푸르고 따뜻한 분위기의 정원을 조성했다. 긴 골목을 따라 펼쳐지는 제주 경관을 감상하며 스테이의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여느 제주 풍경이 아닌 이국적 경관이 펼쳐지도록 제주도에서 흔히 쓰지 않는 수종을 선택했다. 올리브나무, 호주아카시아, 유칼립투스 등 채도가 낮은 수종을 심어 무겁지 않으면서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나무들은 상록수지만 국내에서 많이 쓰는 수종과는 색감과 톤이 다르기 때문에 정원을 처음 마주보는 사람들에게 낯선 느낌을 주기에 좋다. 하부에는 그라스와 허브를 식재해 이국적 이미지를 극대화했으며, 선인장이 가득했던 후면 담장에는 유카를 심어 제주의 경관을 적절히 섞어주었다. 스테이 외부 공간을 조성할 때 유념하는 것 중 하나는 머무는 동안 다양한 경관을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독채 스테이의 경우, 대부분의 시간을 스테이에서만 보내기 때문에 외부 공간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며 답답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데 고민을 많이 한다. 월령지헌의 경우 제주 마을의 골목을 지나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주다움과 다른 이국적 정원을 마주할 수 있도록 했고, 중정의 잔디를 지나면 제주 돌담과 선인장 등 제주의 경관을 볼 수 있도록 연출했다. 두 개의 정원을 이어주는 건 중간에 위치한 잔디와 전체를 아우르는 그라스들이다. 평편한 잔디는 두 경관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경관이 되며, 하층에 심긴 그라스는 서로 다른 두 경관을 하나로 묶어준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송이슬 듀송플레이스 소장 조경 설계 듀송플레이스 조경 시공 듀송플레이스 건축 설계 탠크리에이티브 건축 시공 탠크리에이티브 위치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월령1길 13-5 면적 575.88m2 완공 2021 사진 최윤정
퍼즈 글램핑장
자연을 만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의 하나로 노숙을 꼽을 수 있다. 몸과 자연을 구분하는 집이라는 두터운 보호막을 걷어내고 맨몸으로 이슬을 맞는 노숙(산악인들은 비박이라는 전문 용어를 쓴다)은 자발적이고 적절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실행해 보고 싶은 로망이다. 온전히 자연 속에 머물면 내 몸의 모든 신경망을 총동원해 살아 숨 쉬는 야생의 세밀한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다. 문명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배제되므로 자연스럽게 내 유전자에 숨어 있던 호모 사피엔스적 본능이 발현된다. 글램핑 미니멀(minimal) 캠핑은 노숙에 가까운 체험을 현실 속에 구현한 것이다. 최소한의 장비로 자연 속에 머무는 경험이며, 불편을 담보로 자연에 한 발 더 깊숙이 다가서는 것이다. 반면 이른바 맥시멀(maximal) 캠핑은 거주와 캠핑의 현실적 타협판이다. 가족과의 동행, 비교적 편안한 잠자리, 멋진 저녁 식사, 낭만적인 ‘불멍’을 포기할 수 없기에 모터 홈이나 캠핑 트레일러 혹은 글램핑이라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미니멀이든 맥시멀이든 정도에 차이가 있으나, 자연과의 경계는 비교적 가벼운 외피만으로 구분되고 자연 속으로 일보 전진하게 된다는 점은 유사하다. 대상지는 전형적인 개발 예정지의 모습이었다. 늘 그렇듯 평지는 ‘개발’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지형이 변하면 기존 식생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수년간 방치된 탓에 천여 평 남짓한 부지에는 주변에서 날아온 종자들이 발아해 드문드문 자라나고 있었다. 대상지는 거칠었으나 주변은 소나무 숲으로, 또 멀리는 큰 산으로 둘러싸인 입지가 좋았다. 글램핑은 적절한 투자로 대상지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게 클라이언트와 조경가의 의기투합이 시작됐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 조경 설계 및 배치 계획 디자인 스튜디오 loci(박승진, 최상민, 오지훈, 고희선) 조경 시공 티시그린 텐트 디자인 및 시공인터플레이(총괄), 이룸지앤디(디자인 제안), 피스페이스(설계 및 시공) 발주 인터플레이 위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송내길 89-52 대지 면적 5,000m2 규모 객실 10개 동(1개 동 30m2) + 지원 시설 설계 및 디자인 감리 2021. 5. ~ 2022. 6. 완공 2022. 6. 사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백순환 디자인 스튜디오 loci는 작은 설계 회사다. 푸른 별 지구, 우리가 사는 곳곳, 자연과 도시와 정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통의동 브릭웰 정원, 오목공원 리노베이션 등 사람과 자연을 잇는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언바운드
모험적인 도시 탈출 언바운드(The Unbound)는 암스테르담 변두리에 위치한 리조트다. 웰니스 시설로 계획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오두막과 외부로부터 격리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외부 공간을 조성했다. 리조트는 경관과 함께하고, 자연을 관찰하고, 음식을 만드는 활동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됐다. 언바운드는 다양한 활동을 즐기고 갑갑한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자연을 더 가까이 느끼고 보다 청량한 녹색 여가 공간을 만끽하는 곳이다. 광활한 녹지 2007년 암스테르담 시는 하를레메르메이르(Haarlemmermeer) 운하, 할프베흐(Halfweg), 하를레메르베흐(Haarlemmerweg) 도로 사이에 있는 네 개 간척지를 독특하고 다기능적인 도시 농업 및 휴양 지역인 타위넌 판 베스트(Tuinen van West, 서쪽의 정원)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도시 전역에 펼쳐진 이 거대한 녹지는 생태적 가치, 생물 다양성, 기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강화하고 암스테르담 주민들을 위한 탄력적인 자연 휴양지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황무지의 변화 타위넌 판 베스트의 정원과 채소 및 과일 밭 사이에 황무지가 있었는데, 이곳을 언바운드로 탈바꿈시켜 지속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다. 언바운드는 야외 활동을 즐기고 도시와 인접한 곳에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언바운드는 암스테르담과 같은 도시의 여가 활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환경 미개발 문화 경관을 지닌 대상지를 호수, 습지, 구릉 등 다양한 지형을 만들어 활기찬 자연환경으로 탈바꿈시켰다. 언바운드는 새로 만든 호수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호수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낸 덕에 많은 양의 흙이 발생했는데, 이 흙으로 오두막 주변에 언덕을 만들었다. 이 언덕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 사적 공간을 선사한다. 정원에는 대상지를 둘러싼 농장들과 어우러지도록 지역 자생종을 심었다. 리조트 안 채소밭은 레스토랑에 신선한 식재료를 제공해준다. 호텔과 연결되는 입구, 사우나 시설이 있는 호수, 마을 광장이 있는 오두막 숲, 야외극장이 있는 웰빙 숲, 운동 공간이 있는 웰니스 숲, 행사장, 놀이터, 채소밭 등 각기 다른 공간이 고유 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나무들을 식재했다. 이 공간들은 다양한 경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디자인 접근 방식은 다양한 유형의 초목이 생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서로 다른 공간을 유기 적으로 연결한다. 자연이 본래 모습으로 번성할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 두기도 했다. 그 덕에 언덕에는 야생화가 무성하게 자 라고, 오두막 사이에는 풍성한 식물 군락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다양한 토착 식물과 나무를 심어 식물 다양 성을 강화하고 야생 동물, 조류, 곤충이 모일 수 있도록 했다. 틀 커다란 나무는 호수 옆에 위치한 호텔과 이어진 입구 를 쉽게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오두막 숲과 호텔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은 호수에서는 카누를 타고 수영을 할 수 있다. 호수 위에 사우나가 있어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호수 주변에는 커뮤니티 건물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오두막이 있고 오두막 각각에는 개별 테 라스가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정원은 야외극장과 요가 수련장이 있는 웰빙 숲으로 이어진다. 전체 공간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행사장으로 이어진다. 행사장은 결혼식과 축제를 개최하기 안성맞춤인 공간 이다. 인접한 놀이터는 흥미로운 놀이 요소가 가득하고 어린이의 모험심을 자극한다. Landscape Architecture Felixx Landscape Architects and Planners Team&Partners Michiel Van Driessche, Marnix Vink, Deborah Lambert, Thijs van der Zouwen, Maria E. Castrillo, Klaudio Ruci, Steengoed, Freelodge, Studio Appelo, Dorens Architects, Flora Nova Client Steengoed Location Amsterdam, The Netherlands Area 4.9ha Completion 2020 Photograph Symmedia, Michel Claus, Felixx Landscape Architects and Planners 펠릭스(Felixx Landscape Architects and Planners)는 2014년 로테르담에 설립된 사무소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나은 환경 조성법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지역성을 고려한 설계를 통해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고, 공간 연구, 경관 변화 전략, 마스터플랜, 공공 공간 및 제품 설계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생물 다양성과 자연 회복력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접근한다. 펠릭스는 상상 속 캐릭터에서 따온 이름이다. 평범한 영웅인 펠릭스는 세상을 여행하며 행복한 환경을 만들 기회를 엿보고 있다.
롯데캐슬 리버파크 시그니처
대상지는 영동대교북단고가 바로 옆에 있으며, 주변에는 낮은 상가와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따라서 고층 주동(24~35층)으로 계획된 롯데캐슬 리버파크 시그니처가 들어서면 자양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됐다. 걸어서 10여분 정도면 한강과 뚝섬유원지 같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있는 곳이다. 대상지는 세 면의 상가동이 단지를 감싸는 형태로 배치되어 외부에서의 접근성이 높다. 이 접근성을 고려해 외부 경관 특화 계획을 세우고, 주출입구에서 중앙 광장까지 이어지는 공간을 통합적으로 설계해 연계성 있는 경관을 조성하고자 했다. 동마다 다른 특성을 부여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조경 공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다. 자연 속에서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미술관 같은 단지를 만들기 위해 차분한 색채를 사용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티하우스와 거울분수를 설치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카페아트리움 단지 주출입구에 들어서면 문주목으로 식재한 커다란 소나무와 웅장한 석가산, 초화와 이끼로 조성된 암석원이 방문객을 반긴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좀 더 걸으면 중앙광장인 카페아트리움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입구에서부터 출발한 뜰의 흐름이 병풍처럼 펼쳐진 산수정원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조성했다. 간결한 직선으로 현대적인 분위기를 내는 복층형 티하우스는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경관을 연출하며, 자연을 품은 예술 작품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티하우스에서 뻗어 나와 물 위를 가로지르는 스카이데크를 따라 걸으면 폭포와 자연의 청량함을 피부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티하우스 내부에 놓인 테이블에 앉으면 검은 화강석 석재로 마감한 거울분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거울분수 수면에 반사된 석가산, 소나무, 배롱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선사한다. 검은 화강석 위에 놓인 나무들의 모습은 갤러리에 전시된 미술 작품을 떠오르게 해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한 풍경과는 또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이계풍 윤디자인스케이프 부소장 장상복 롯데건설 토목팀장 사진 유청오 조경 설계 이음조경설계사무소(기본설계), 윤디자인스케이프(특화설계) 시공 롯데건설 조경 시공 정한조경 휴게 시설 데오스웍스 놀이 시설 드림월드 위치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 236번지 일원 규모 878세대 대지 면적 31,438.90m2 조경 면적 11,420.67m2 준공 2023. 6.
[제도가 만든 도시] 제도, 크기를 줄일 수 있을까?
지난 글에 이어 제도가 우리가 사는 도시의 ‘크기’에 관여하는 방식과 결과를 축소도시 문제를 통해 다룬다. 대도시 원도심, 지방 중소도시의 인구 감소는 적어도 1980년대부터 나타났지만 정책적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지방 소도시들이 인구 감소를 넘어 인구 소멸의 위기에 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 것은 매우 최근이다. 그런데 인구 감소가 왜 문제일까. 더 정확히 묻자면, 도시 공간에서 인구 감소는 왜 문제인가. 세금 낼 인구가 감소하면 도시의 재정 재원도 줄어드는데 도로나 공공시설 등 이미 만들어진 도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동일하다. 늘어나는 빈집을 관리하고 운영 수입이 감소한 시설을 보조하기 위해 어쩌면 비용은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결국 지자체가 파산하거나 최소한의 유지·관리를 포기하는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다. 또한 온갖 지식과 문화를 교류하고 향유할 수 있는 도시적 기회는 물론 의료와 보살핌, 교육, 치안과 같은 기본적 사회 서비스를 누리기 어려워질 것이다(그림 2).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이 들어갈 것이고, 이는 장차 매우 큰 사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인구 감소로 인한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인구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인구가 성장하던 (또는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던) 시기에 조성된 도시의 과도한 ‘크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1 그럼에도 2022년 제정된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비롯해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정책은 인구수에만 주목하고 인구 대비 도시의 크기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 도시는 ‘몸에 맞지 않는 너무 큰 옷’이 되어버렸는지(그림 3), 줄어드는 인구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기 어려운지, 도시 제도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 도시계획의 회계분식,사회적 인구 증가 지난 연재에서 수용 인구를 기준으로 신도시의 용도별 적정 토지 면적을 ‘과학적’으로 자동 산출하는 플로 차트를 실었는데,2 이 ‘도시 면적 계산기’는 신도시 계획뿐 아니라 모든 도시계획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다소 거칠게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2000년대 중반 수립된 OO시 ‘2020 도시기본계획’에서는 2020년 OO시 인구를 15만 명으로 예측하고 이 인구를 ‘적정’하게 수용하기 위한 주거, 상업, 공업, 녹지 등 용도별 도시 지역 면적을 산출한다. 이 면적에서 기존 도시 내 각 용도별 면적을 제하면 2020년까지 이 도시에 더 필요한 도시 지역 면적이 된다. 이 필요 면적을 어디에 개발할지 정하는 것, 대표적으로는 ‘시가화 예정 용지’를 설정하는 것이 도시기본계획의 중요한 부분이다. 2023년 5월 기준 OO시 인구는 9만 6,700명으로 ‘2020 도시기본계획’의 계획 인구 15만 명은 고사하고 계획을 수립하던 당시 인구 10만 9,400명에서 12%나 감소했다. 반면, 도시 면적은 30km2에서 35km2까지 늘었다.3 ‘2020 도시기본계획’은 2020년쯤에는 15만 명이 적정하게 살기 위한 도시 면적을 38km2라고 했는데, 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도 15만 명을 목표로 하는 도시계획이 꽤나 착실하게 실행된 것이다. 그러나 인구는 오히려 줄어든 탓에 결과적으로, 숫자로만 보자면 그 적정하다는 수준보다 1.2배 큰 도시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적정 도시 크기 설정의 오차는 인구 예측에서 비롯된다. 도시기본계획의 목표 년도 계획 인구는 해당 도시의 인구 구조(성별, 연령)를 기초로 산출되는 인구의 자연 증감과 도시 간 이주 예측에 따른 인구의 사회적 증감을 합산해 산출된다. 여기서 많은 지자체는 ‘희망’일 뿐인 사회적 인구 증가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도시 면적 계산기’를 돌려 도시계획을 수립한다. OO시는 ‘2020 도시기본계획’ 수립 당시에도 이미 1980년대 중반 인구 정점을 지나 20년 간 지속적으로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당시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의 외부 인구 유입이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시나리오를 채택하고 미래의 도시 크기를 재단했다. 인구는 감소함에도 도시의 크기를 더 크게 만들 ‘과학적’ 근거로서 도시계획 계산기의 산출값을 인정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도시 제도다. 도시기본계획에서 목표 년도의 인구를 추정하는 기준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도시·군기본계획 수립지침’에 근거하는데, OO시처럼 사회적 증가를 부풀려 도시 지역 면적을 과도하게 계획하는 폐해가 만연해왔다.4 최근에야 인구 추정에서 사회적 증가를 보조적으로 적용하라는 지침 개정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국내외 여러 연구는 축소도시 또는 도시축소를 쇠퇴 도시, 도시 쇠퇴와 구분해 정의한다. 대체로 축소도시란 인구와 사회경제적 활동의 쇠퇴로 주택, 공공시설 및 도시 기반 시설의 실질적 이용이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과거 성장기에 공급한 도시의 물적 자원이 과잉인 상태에 이른 도시를 말한다(구형수 외, 『저성장 시대의 축소도시 실태와 정책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2016). 이 글에서는 도시의 ‘크기’를 단순히 도시의 면적, 즉 시가화 면적만이 아니라 그 안의 도로와 공공시설, 주택을 비롯한 민간 건축물 등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물적 자원의 규모로 규정하고자 한다. 2. 유영수, “제도, 도시의 크기를 정하다 1”, 『환경과조경』 2023년 5월호, p.104, 그림 1. 3. OO시 통계연보, 인구 및 용도지역 면적 통계 4. 구형수 외, 『저성장 시대의 축소도시 실태와 정책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2016.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 및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 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 디자인 엘
요즘 우리는 편안해졌다. 사무실 시작할 때 꿈에 부풀어 온갖 열정을 쏟아 내던 때가 있었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 들어갈 정도로 말야. 하지만 그 열정으로 타오르던 때조차 늘 마음 한구석엔 불안이 숨겨져 있었어. 이러다 내가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마치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 같은 내 모습을 마주한 거지. 정말 열심히 하고 주변에서 잘한다고 해주는데도 계속 헛디디며 한 계단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듯한 허망함과 절망감이 들었지. 와, 정말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니까. 아마 그때 우리를 본 사람들은 엘이 이제 막을 내리겠구나 싶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말야. 하지만 우린 막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훌쩍 담을 넘어버린 듯 여유 있게 지내고 있어.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야. 기적이 일어났냐고? 그런 건 없어. 기적 같은 거. 그런 건 방관자처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비치는 불연속적 이벤트의 자기 해석일 뿐. 우린 우리의 힘으로 지금에 이르렀어. 사실은 특별한 힘 같은 것도 없었어. 그저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켰을 뿐, 그리고 주변의 관심에 대한 기대를 접어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었지.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 화려하지도, 근사하지도 않지만 꾸준한 근면함이 만들어 놓은,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함에 다다른 이야기. 엘을 성장시킨 프로젝트 석정과 노을 2016년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은 기획이 좋았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방관만 하다 참가하게 된 거야. 정원박람회라는 게 여기저기 생기더니 듣도 보도 못한 쇼 가든–전시정원이란 게 심심찮게 보이는데, 그게 뭔가 싶었어. 정원이란 공간도 낯선데 그걸 전시용으로 만든다고? 나처럼 앞뒤 꽉 막힌 사람에게 그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 근데 그때 비슷한 고민을 하던 기획자가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에서 골목길을 전시 공간으로 삼고, 골목길 곳곳의 빈 땅을 찾아내 그걸 쇼 가든 대상지로 준 거야. 이건 말이 된다 싶었지. 이건 맥락이란 게 있잖아. 난 그중 서쪽 입구에 있는 빈 땅에 ‘석정’이란 걸 만들었어. 노을을 등지고 집으로 오다 잠시 걸터앉을 정원이었어. 반응이 괜찮았어. 근데 대상을 받을 줄은 몰랐지. 이후 이렇게 삶이 영위되고 있는 공간을 쇼 가든의 대상으로 삼는 정원박람회가 몇 번 더 기획되더라. 2019년에 참여한 서울정원박람회 동네정원도 비슷한 기획 의도로 구성된 경우였어. 하지만 이때는 사실 쇼 가든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간 것이었어. 그때 난 지독한 암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거든.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멍하기 일쑤고, 시간을 보내는데 일은 진척되지 않고, 밤이면 잠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어. 사람들과의 연락도 거의 끊고 지냈지. 뭐라도 해야 살겠다 싶었고, 몸을 움직여야겠다 싶었고, 땀을 흠뻑 흘려야겠다 싶었으며 ‘도전’이라는 불구덩이 속에 날 던져 넣어야겠다 싶었지. 내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친구가 심사위원으로 있던 자리에서 머리 숙여 프레젠테이션하고,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이랑 같은 조건에서 땀을 흘리며 작업했었어. 다행히 그 일을 마칠 즈음 난 웃을 수 있었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정원도 ‘노을’이 주제였다. 어쩌겠어. 이젠 뜨는 태양에 대한 희망보단 지는 노을에 묻은 땀이 더 끌리는 나이인걸. 트렌덱스 정원 어느 날 소식이 없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자기네 회사에 있는 데크가 낡아서 수리했으면 하는데 조언 좀 해달라며. 말만 들어서 알 수 있나. 현장 한번 보자고 했지. 가서 봤더니 물류 창고들 한편에 지어 둔 3층짜리 낡은 사무실 건물, 그리고 옆에 향나무, 소나무가 잔뜩 심긴 손바닥만 한 정원이 늙어 가고 있었어. ‘친구야, 이게 데크가 문제가 아닌 거 같다’라고 한 게 내 조언이었어. 그 일이 인연이 된 건지 새로 온 그 회사의 대표가 정원을 ‘이번 참에 잘 만들어 봅시다’고 하길래 열심히 그림을 그려 드렸는데, 자꾸 사무실 건물을 맘에 안 들어 하시는 거야. 그러더니 한 일년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며 연락이 왔더라. 정원만 잘 손봐도 좋았을 텐데 건물마저 새로 짓고 정원도 새로 짓게 된 거지. 수많은 보고야 뭐 당연한 절차였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건 시공 막바지 한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5월 햇살 아래서 땀 뻘뻘 흘리며 꽃 심은 일이었어. 어찌나 몸 쓰는 게 좋던지. 순간 내가 농부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거 아닌가 싶었다니까. 이 일도 마무리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내 친구는 지금도 가끔 나한테 전화해서 얘기한다. 새로 지은 건물보다 이 조그만 정원이 더 좋다고. 직원들도 이 정원이 해마다 더 좋아지는 게 참 신기하다며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말야. 진짜겠지? 용인공원 내겐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마누라 같은 곳이 바로 이곳 용인공원이야. 벌써 10년 넘게 (가만있자 내가 처음 여길 드나들기 시작한 게 2009년이니 벌써 14년이네) 이곳의 일을 해오고 있으니 참 오랜 인연이지. 이곳은 공동묘지야. 말이 공원이지 사실은 공동묘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공원이라는 법정 명칭을 달게 된 곳이지. 공원이란 말도 어쩌면 ‘공동묘지’의 낯설고 어두운 느낌을 조금이라도 중화시켜 보려는 노력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 이곳이 좋았어. 처음 소개를 받았을 때는 그냥 내 포트폴리오에 넣을 독특한 프로젝트를 하나 하는구나 싶었거든. 근데 첫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기야말로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명분에 잘 맞는 곳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여기가 그럴 수 있는 곳 아닌가 말이야. 마치 죽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처럼 생각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남아 활발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아닌가 말이야. 어쩌면 내 평생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쫓겨나지만 않으면. 첫 작업은 낡은 사무실 건물과 폐허 같은 식당을 헐어 내고 방문객과 유족을 위한 건물과 그 주변을 구상하는 거였어. 조경가에게 건물을 포함한 경관을 구상해 봐 달라고 부탁한 거지. 우리가 제안한 것은 용인공원의 풍경을 거스르지 않는 투과성 높은 단층의 낮은 건물과 그 앞뒤 너머를 활용한 공간들이었어. 좋아해 주더라. 그게 모티프가 되어서 실제 건축가가 디자인을 이어가며 진행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와 긴 인연이 시작된 거야. 그 후 우리는 용인공원의 많은 일을 수행했지. 짓다가 중간에 설계하게 된 봉안담 영역인 하늘담재, 박목월 선생의 묘를 기점으로 만든 박목월 문학정원, 용인공원 환경계획 등등. 게다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묘 디자인과 묘역 디자인 등등. 그러면서 이 공동묘지를 조금씩 조금씩 용인공원으로 변모시켜 오고 있었어. 처음에 지으려고 했던 사무 및 문화 공간은 갑자기 변한 장묘 문화, 그러니까 매장 문화에서 화장 및 납골 문화로의 변화를 대비한 봉안당 건립 사업으로 바뀌었어. 하지만 풍경을 담으려는 원래의 제안은 그대로 유지했어. 모두 그 점에 동의가 됐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봉안당은 짓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건물 공간과 다양한 정원 공간이 하나의 긴 경험의 과정에 묶여 들어가도록 계획·설계하는 아너스톤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거야. 기획에서부터 문을 열 때까지 꼬박 십여 년이 걸렸어. 건축가는 중간에 더는 못하겠다며 손절했지만 난 끝까지 남아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 정원 공간들은 우리가 하자는 대로 충실히 만들어졌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는 많이 바뀌긴 했지만 우리를 통해 조금씩 구현되어 갔다는 게 맞겠네. 그거 아나? 한국에서는 설계가가 그린 대로 시공되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은 거. 물론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현장에 가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 더 많아. 그나마 여기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꼈던지.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오랫동안 쌓인 설계가에 대한 신뢰 때문 아니었을까 싶어. 아너스톤 테라스 정원 10여 년의 시간이 걸려 드디어 준공하고 오픈한 날. 마음 한구석에 담아 뒀던 찜찜한 부분을 이사장에게 털어놨어. 아너스톤에는 테라스가 있거든. 독특한 테라스 구조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 정원을 만들기로 했지만, 결국엔 데크만 깐 채 덮어 둔 상태였거든. 이거 제대로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이사장도 좀 맘에 걸렸던 건지 ‘한번 그려 보시죠’ 하는 거야. 그런데, 아니 이 쬐그만 공간 하나 구상하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10년 전 설계 초반부터 이 테라스는 사실 내게 숙제 같은 공간이었어. 얼른 해야 하는데 안 풀리고 질질 미루고 있던 숙제. 너무 진지해도 너무 발랄해도 안 되고, 쓰임이 있으면서도 쓰임을 너무 강조해도 안 되고, 식물이 있지만 없는 듯해야 하고. 안을 닮았지만, 바깥도 담아야 하고 등등. 정말 수도 없이 많이 그리고 수도 없이 보고하고 수도 없이 다시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어. 그걸 덮어 두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다시 꺼낸 거야. 어쩌려고……. 증말. 내 발등 내가 찍은 거지 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거 다 꺼내 놓은 거 같았거든. 술 많이 처먹고 토하다보면 더 이상 토할 게 없어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아나? 머릿속이 약간 그런 상태가 되어 가는 거 같았어. 그러면서 난 왜 이렇게 설계를 못 하냐부터 딴 놈이었으면 어떻게 풀었을까까지 오만 욕설과 울부짖음을 반복하고 있었어. 어느 날 또 퇴짜를 맞고 돌아와 가만히 눈을 감고 제발 이제는 좀 답을 찾자며 생각에 잠겼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이 먼저 떠올랐으나 이미 접었거나, 그건 아닌 거 같다는 반응을 받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뿐이었어. 그러다가 말이야. 신기하게도 하나 집히는 게 있었다. 그게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나의 뾰족한 드러냄의 태도였다. 뭔 소리냐면 난 이 공간을 디자인하려는 노력보다는 이 공간을 어떻게 하면 돋보이게 할까를 더 앞에다 두고 있었다는 거야. 어떻게 디자인해야 이 공간이 더 두드러져 보일지, 어떻게 하면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 한 조형적 모양을 그려낼지, 누구도 발견 못 한 독특한 재료와 질감을 집어넣어서 감탄을 끌어낼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구상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며 쉽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어. 그건 아무것도 두드러지지 않고, 그냥 무덤덤한 하지만 오래된 듯한 느낌을 지닌 무심한 정원이었어. 이 그림은 모두 다 좋다고 했어. 근데 그게 정말 그림이 좋아서 그런 건지 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그 힘으로 끝내 이렇게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비로소 10여 년의 설계 역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가 설계한 서울대공원 동물원 정문 광장을 다녀왔어. 내가 자랑했었거든. ‘이런 거 제가 설계했어요, 공모에도 당선했고요’ 하며. 개념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무엇보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개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이젠 시간이 충분히 개입할 수 있는 곳으로 변한 이곳에 나름 자부심도 느꼈어. 숲이 많이 생겨서 부모님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을까 했지. 부모님은 연신 ‘우리 아들이 참 대견하구나, 이렇게 큰 공간을 설계하다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 하지만 우리가 내세운 시간이 어쩌구, 풍경이 어쩌구, 전후가 어쩌구 하는 얘기는 못 알아들으셨어. 아들이 했다니 좋다고 조건 반사처럼 칭찬하신 거지 뭐. 하지만 그 건너편 장미가 잔뜩 핀 테마정원에 가서 보여주신 그 환한 미소와 귀여운 포즈 등은 온몸으로 이 공간이 훨씬 더 좋음을 말해 주고 있었지. 그야말로 찐 표정이었어. 백 마디 말로 설명되어야만 하는 공간 말고 직감적으로 좋음을 알 수 있는 공간, 세상을 뒤바꿀 만한 대단한 개념 아니어도 거기에 딱 맞춤한 공간, 있는 듯 없는 듯한데 좋은 공간, 지친 하루를 돌아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오래된 카페 정원 같은 공간. 좀 모자라도 꽃 하나 더 심을 여지가 떠오르는 그런 공간. 이런 공간을 찾는 일을 혹시 나를 드러내려는 뾰족한 태도 때문에 뒷전으로 미뤄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뾰족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앞에 놓인 빈 공간을 들여다본다. 부디 이 빈 공간에 꼭 맞는 공간을 디자인하자며. 삶에 꼭 들어맞는 공간을 만들어 내자며. 디자인 엘은 2005년 처음 문을 열었다. 사무실 열 때 내세운 모토가 Link Landscapewith Life다. 그래서 첫 글자들인 L을 사무실 이름으로 내세웠고. 거창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자는 생각이었다. 잘 지은 거 같은데, 잘 실천하고 있는 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저 삶이 뭔지도, 공간을 그 잘 모르는 삶에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그 마음만 가지고 겸손하게, 성실하게 설계하려 한다. www.designl.co.kr
[모던스케이프] 1960년대와 아동공원
수년 전, 서울 남산공원의 기록물을 수집하면서 새삼 느낀 점은 사람들은 남산 자락에 무언가를 만들었다 부수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지역은 숭례문 또는 서울역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한 북서 사면의 회현자락이다. 남산의 예장자락이 일본인이 한성부에 합법적으로 거류하게 되면서 조선의 도시적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지역이라면, 조선신궁이 있던 회현자락은 남산을 식민 통치의 폭력과 억압의 상징 경관으로 전복시킨 장소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그 터만 남게 되었고,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의 각종 집회 장소로 쓰이면서 이데올로기 갈등이 첨예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국회의사당 조성을 위해 기공식까지 했지만 결국 취소하는 전무후무한 전력까지 세우게 되면서, 한동안은 여론몰이가 필요한 각종 집회의 장소로 이용됐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권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시는 국회의사당 부지를 중심으로 종합미화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곳은 비로소 ‘중앙광장’(최상단)과 ‘야외음악당’(2단), ‘아동공원’(1단)으로 대변신한다. 남산이 비로소 서울 시민의 이용 공간으로 전용된 것이다. 특히 대규모 공간을 할애한 아동공원은 이후 서울과 전국의 주요 도시에 제2, 제3의 아동공원을 조성하게 하는 전향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1963년 4월 6일에 착공해 8월 10일에 준공, 8월 25일 개장한 남산의 어린이 놀이터를 두고 각종 신문 매체는 한국 최대 규모, 아동 낙원, 꿈의 낙원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다소 과장된 것 같지만, 변변한 놀이 시설 없이 골목길을 전전하며 노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에 한 번에 1,500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면적에 90여 종의 놀이 기구를 설치해 무료 이용하도록 했다는 점을 확인하면, 그러한 표현에 충분히 수긍이 된다. 남산 아동공원은 ‘남산공원 설계현상모집’(1962년 1~2월 진행)을 통해 구현됐다. 현상공모에 관한 서울시 공문 서류에 아동공원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당선작의 아이디어를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건축가 안병의(1927~2005)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채택됐는데, 기하학의 패턴과 유연한 곡선을 절충해 건축과 녹지 공간을 적절히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최상단에 야외음악당과 시민 광장, 기념물을 두고 2단에는 미술관 건물을, 가장 낮은 1단에는 아동공원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야외음악당은 최상단에서 2단 부지로 이동하고 건물 형태도 곡선으로 바뀌는 등 대폭 조정됐지만, 그가 제안한 아동공원만큼은 그대로 수용됐다. 놀이 시설은 오히려 대폭 늘어서 회전 그네, 달팽이 미끄럼틀, 미궁(迷宮), 구름다리, 분수, 원형 철봉대, 여우굴 등각양각색의 놀이 시설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선보였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이해수, “1960~1973년 동심의 낙원, 남산공원의 문화정치: 공간을 둘러싼 권력과 공간 이용자의 의미 생산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문화』 33(4), 2018, pp.5~53.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설계현상모집, 서울기록원 소장(기록건 ID: 20150000081393), 1962. 서울특별시, 공원 기록 인프라 및 협력 네트워크 구축, 2020. “꿈의 낙원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조선일보」 1963년 1월 12일. “어린이 놀이터”, 「동아일보」 1963년 8월 17일. “한국 최대 규모의 아동낙원 서울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마련”, 「동아일보」 1963년 8월 24일. “인왕산에 어린이공원”, 「매일경제」 1969년 8월 19일. 그림 출처 그림 2. e영상역사관
한국과 스위스의 자연환경과 건축 문화를 교류하다
‘수교’란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교제를 맺는다는 뜻이다. 한국은 많은 나라와 수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중국, 일본과 같은 근접 국가와의 교류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수교가 이루어진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수교국은 16개국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들이 유엔 회원국이 되고, 국제 사회에서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나라와 수교 관계가 되면서 그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3년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을 하면서 할슈타인 원칙이 철회되고 수교 대상 국가가 확대됐다. 현재 한국은 192개국과 수교를 맺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협력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수교를 맺은 나라도 있다. 1963년 02월 11일, 한국은 스위스와 수교 관계가 됐다. 스위스는 중립국 지위로 한국 전쟁 종전 후 판문점의 중립국감독위원회(NNSC)에 대표를 보냈으며, 현재까지도 약 700여 명의 군인과 관료를 파견해 한반도의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은 스위스와 1971년 투자보장협정 체결 이후 2005년 EFTA 자유무역협정, 2008년 과학기술협력협정 등 다수의 협정을 체결했다. 2014년에는 직업 교육, 기초 과학, 정밀 기술, IT 기반 등 양측 간 비교우위 분야를 중심으로 11건의 양해 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강화됐다. 2023년은 한국과 스위스 수교 60주년의 해다. 이를 기념하고자 두 나라에서 많은 행사가 개최됐다. 4월에는 서울 마포구 경의선 책거리에서 스위스정부관광청이 주최한 ‘스위스 봄거리 축제(Swiss Spring Street Festival)’가 열렸다.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스위스 주요 지역의 풍경을 재현해 스위스의 문화, 역사,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두 나라 간 문화 교류의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도 열렸다. 주한 스위스대사관과 서울시가 기획한 ‘산수인물山水人物의 도시’ 전이다. 전시는 산수인물화에서 출발한다. 깊은 자연 속에 홀로 유유자적하는 풍류인의 모습, 유토피아적 회화는 전형적인 산수인물화의 한 장면이다. 자연은 인간을 품었고, 인간은 인공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자연은 최초의 건축이고, 건축은 자연을 궁극적 모델로 삼는다. 전시는 ‘첩첩산중’과 ‘아케스트’ 두 구역으로 나눠 인간을 둘러싼 지구적 스케일의 자연환경과 건축적 스케일의 실내 환경을 동시에 다룬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조경사 제도와 조경학 교육인증제 추진에 나서다
2022년 5월 13일 국토교통부는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을 고시하면서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 제도’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조경사 제도(가칭) 추진을 위한 연구 및 조경사 제도의 효과적 운영 관리와 자문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고, 조경사 법령 제정에 따라 건설산업 및 설계업 등록 관련 제도에 대한 제도 개선 협의를 병행하며, 기존 조경기술사 개편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 제도의 추진과 기존 조경기술사 개편안의 검토 소식이 들려온 지 1년이 지난 현 시점에도 제도 성립의 명확한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 5월 26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조경사 제도 도입을 위한 세미나’가 개최됐다. 세미나는 이해인 소장(HLD), 이윤주 소장(LPSCAPE), 이남진 소장(VIRON),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의 발제와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가 좌장을 맡고 박명권 대표(그룹한어소시에이트), 염철호 부원장(건축공간연구원), 최원만 대표(신화컨설팅)가 참여한 토론이 진행됐다. 조경사 제도와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필요성 이해인 소장은 ‘현행 조경설계 자격제도, 무엇이 문제인가’란 주제로 현행 자격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재 조경 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실무 경험이 없어 조경 실무에 필요한 지식, 기술, 능력을 입증 받지 않은 사람들이 조경설계 및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조경 자격제도가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조경 발전의 동력과 기반을 잃고 있다. 조경기술사, 조경기사 등의 자격은 조경 전문가가 조경을 수행하는 면허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은 조경 전문가의 일거리를 줄이고, 일거리가 하도급으로 되어가는 불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또한 조경 전문가의 필요성과 수요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킨다. 이 소장은 이러한 문제를 탈피하기 위해 “조경설계·계획을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 기술, 능력을 갖춘 조경 전문가들을 인증해 주는 조경사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윤주 소장은 『환경과조경』(2022년 8월호)에 소개한 인터뷰를 언급하며 ‘해외 조경설계 자격제도와의 비교’에 대해 발표했다. 이 소장은 인터뷰에서 영국과 독일의 조경사에게 조경사 자격 취득의 이점과 각 나라의 자격증 취득 과정에 대해 물었다. 두 사람은 이 시험을 준비한 여정이 자신에게 전문적으로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공간을 만들어 나갈지에 대해 심사관들에게 많은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자격제도 취득에 관한 교육과 실질적 능력을 중요시 한다. 한국 조경사 제도 역시 자격증 취득이 목적이 아닌 취득 과정이 보다 업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길 바란다.” 이남진 소장은 작년 5월 고시된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적힌 조경설계 면허 및 자격 제도의 추진 배경을 말하며 ‘조경사 자격제도의 신설 제안’을 위해 필요한 사항에 대해 설명했다. 아직까지 조경설계사무소는 건축사무소로부터 하도급 형태로 프로젝트를 받고 있는 실정이며, 건축사무소는 전문 조경가가 아닌 사람에게 아르바이트 형태로 조경설계 도면을 그리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젊고 경쟁력 있는 신진 조경설계 전문가가 책임 기술자로서 직접 설계에 참여하기 어려워 자격을 대여하는 불법 및 편법의 방법으로 하청 받아 진행되는 사업도 많다. 이 소장은 이러한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조경사법’을 제정하고 ‘조경진흥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국토교통부 장관이 시행하는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대지안의 조경, 도시공원 및 녹지의 설계와 공사감리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정의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조경사 또는 조경사사무소에 소속된 조경사’로 제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배정한 교수는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필요성과 방향’을 주제로 조경학 교육인증제가 왜 필요한지 설명했다. “교육인증제는 조경사 제도와 관계가 깊다. 조경사 제도의 자격 및 면허 응시의 필요조건은 조경학 교육 인증을 받은 조경학과의 졸업이다.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는 것처럼 교육인증제는 전문학위와 자격제도를 통해 조경(학)의 체계를 명확하게 확립할 수 있다”며 교육인증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한국조경학회와 한국조경협회가 조경학 교육인증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육 현황 조사와 국내외 사례 연구, 인증 기준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2025년에는 공론화 및 심화 연구 진행을, 2026년에는 제도화를 실행할 계획을 밝혔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기웃거리는 편집자] 따릉이를 타며
좋은 문장이란 뭘까. 웅숭깊은 사유를 드러내는 문장? 적절한 재치와 비유를 담고 리듬감이 있는 문장? 아 마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좋은 문장에 대한 정의나 선호가 달라질 것이다. 내 기준에 서 좋은 문장이란 마음을 동하게 하거나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생생한 문장이다. 최근 나를 움직이게 했던 문장 하나를 꼽자면 소설가 김훈이 쓴 『자전거여행』의 첫 문장이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길 위에서 한번쯤 자전거 페달을 밟아본 이라면 무릎을 탁 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장에 놀라며, 담백한 어조로 본질에 가닿는 그의 문장력이 부러웠다. 어느 시인이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던가. 김훈의 문장은 진짜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의 문장력은 훔칠 수 없지만, 자전거라도 열심히 타다 보면 어떤 영감이 깃들지 않을까 싶어 매일 자전거로 퇴근한다. 사실 그의 문장이 계기가 된 건 맞지만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점점 몸에서 기습적으로 세력을 불리고(?) 있는 내장 지방과의 결별을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헤어질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찾은 운동이 바로 따릉이 타기였다.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고, 회사에서 집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1시간 남짓의 시간은 운동 시간으로 아주 적당했다. 정기권을 구매하면 교통비도 아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강의 수변을 따라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며 누빌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물론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헬스장에서 하는 쇠질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회사에서 집까지 가려면 한강변보행네트워크(2022년 12월호, 이하 보행네트워크)의 일부 구간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첨엔 이를 둘러볼 여유보다는 페달 밟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베테랑 운전자라도 초행길엔 긴장하는 것처럼 15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 자전거 운전자인 나도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쏜살 같이 지나가는 MTB 자전거 무리에게 길을 내주느라 바빴다. 괜히 앞을 지나가는 외제차를 보면 박을까 봐 덜컥 겁부터 나는 운전자의 심정이라고 할까.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후 미처 실현되지 못했던 설계안, 수해 입은 이야기 등 잡지에 실렸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리며 보행네트워크의 각 구간별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고요히 흘러가는 한강을 보며 물멍을 때리거나 벤치에 누워 하늘멍을 때리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공간의 틈마다 뿌리 내린 야생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을 보며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빈티지 물건처럼 자연스럽게 멋이 들어가는 공간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높이에 조성된 공간 덕분에 한강을 다채로운 각도에서 즐길 수 있었다. 실개천을 유유자적 떠도는 오리부터 다리와 도로가 교차하는 한강 수면 위에 스며드는 노을과 반짝이는 윤슬, 저멀리 보이는 남산타워까지 한강을 둘러싼 풍경을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구경할 수 있었다. 이따금 날씨가 좋은 날엔 따릉이를 세워두고 잠시나마 공간에 앉아 멍을 때리며 오랫동안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각 공간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어쩌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따릉이 퇴근을 매일 지속할 수 있었던 건 강바람의 역할도 컸다. 특히 페달을 밟으며 힘겹게 가파른 언덕을 오른 후 내리막을 달릴 때 두피 사이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강바람은 가파른 오르막이 주는 허벅지 고통을 잊게 하는 고마운 존재였다.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무거운 짐을 기꺼이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어느 건축가는 도시의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삶과 도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전국 방방곡곡을 자전거로 누비며 안장 위에서 바라본 삶과 도시를 기행문에 담아냈고, 바람 부는 해안 도시를 거닐던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생의 의지를 환기시키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지”라는 문장을 시에 남겼다. 그들 모두 삶과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웃거렸던 플라뢰느(Flâneur)였다. 나 역시 플라뇌느로서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무릎 관절이 허락하는 동안 따릉이를 타며 한강의 수변이 품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싶다. 오늘도 안장 위에서 무거운 몸을 움직이며 이런 소박한 의지를 다진다. “바람이 분다. 다이어트 해야지.”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비록 잘 세팅된 편안함을 빌리는 형식일지라도, 복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이격된 약간의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 모른다.
혼자는 좋은데 외롭고 싶지 않고, 아늑해야 하지만 답답한 건 싫다. 뭘 어쩌라는 건지 싶지만 원래 마음은 그런 거다. 일단 혼자가 되려면 집을 떠나야 했다. 동생과 방을 함께 쓰고 있고, 거실은 묘하게 엄마의 공간이니깐. 카페나 도서관, 공원의 벤치도 좋지만 맘 편히 눕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 때는 곤란했다. 내 마음대로 음악을 듣고, 내킬 때 밥먹고, 원할 때 일어나서 졸리면 잠드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다 느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앞뒤가 바뀐 계획을 세우게 된 거다. 그러니까, 어딘가를 보고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혼자 머무를 공간과 시간이 필요해서 여행을 가기도 한다는 얘기다. 작년부터 여러 스테이를 묶어 소개하고 싶었었다. 스테이는 조경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가깝게 느끼는 시설이니까 더. 기획이라는 게 일찍 시작한다고 해서 일찍 마무리되지 않는다. 시간이 넉넉하면 곧장 가면 될 길을 굳이 뱅뱅 돌아가는 일을 벌이기도 한다. 원고 몇 편을 곁들인 특집이 좋을까, 여러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데서 만족하는 게 나을까, 스테이 프로젝트를 많이 해본 조경가의 인터뷰를 함께 실어볼까.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하고 싶은 게 뭔지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다보면 어지러운 마음이 정돈되던 걸 떠올리며.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결정하는 게 여행지라면 그 다음이 숙소일 것이다. 숙소의 시작은 낯선 곳에서 몸을 누이고 다음 날을 위해 재충전을 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 숙소는 목적지 그자체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여행지보다 호텔의 부대시설에서 휴가를 보내는 즐기는 호캉스(호텔+바캉스)를 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긴 시간을 머무르며 또 다른 삶을 즐길 요량으로 한 달 정도 머물 집을 찾는 사람도 있다. 휴가에서 ‘머묾’이 갖는 역할이 커지고, 소비 방향이 소유보다 ‘경험’으로 바뀌며 숙소의 역할도 바뀌어 가고 있다. 외부 공간도 당연히 그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안락하고 편안하지만 일상과는 조금 다른 색다름을 느낄 수 있는 스테이의 조경은 어때야 할까.” 그간 찾아둔 프로젝트 목록을 다시 뒤지고 나니 결심이 섰다. 조경을 장식 요소를 넘어 머무름과 경험의 공간으로 여기는 스테이가 많지 않았다. 몇 해 뒤에는 스테이 특집을 꾸릴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편집계획서를 매만졌다. 교정지를 들여다보며 나의 여행은 어떠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맨몸으로 이슬을 맞는 노숙은 자발적이고 적절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실행해 보고 싶은 로망”(74쪽)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자연과 멀어지는 게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러 번 부산에 다녀왔지만 부산에 가면 꼭 바다를 들렀으니까. 호텔 창으로 화려한 야경이나 해변, 뒷산의 풍경이 보이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도심의 야경도 나쁘지 않았다. 이 마음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감각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힌트는 늘 실내가 아닌 바깥에 있었다. 여행객들이 발을 디디고 선 곳을 깨닫게 하려는 설계들이 눈에 띄었다. “마을 경관과 지역 자생종의 기준에 맞는 수종을 선정하고”, “둥근 길의 오른쪽 부분에 논 경관의 연장 요소로서 진퍼리새와 솔새를 식재”한 호지는 점차 힘의 질서에 따라 자연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30세를 훌쩍 넘은 목련을 중심으로 설계된 하도문 속초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남쪽을 바라보면 열십자 목구조 사이로 시원하게 펼쳐진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와온에는 “제주 곶자왈 숲의 식생을 형상화” 한 곶자왈정원과 “제주의 초지와 그리스 경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든 컴포트하우스 후정이 있고, 퍼즈 글램핑장의 “침실에서는 먼 산의 풍광을 마음껏 조망할 수 있으면서 인접 동에서의 불편한 시선은 적절히 차단”된다. 롯데호텔 부산은 빌딩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간 내부의 경험에 집중해 설계됐지만, 김태경은 “가급적 호텔과 리조트는 그 지역만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잠자리와 욕실의 청결을 중요시하는 내게 여전히 캠핑은 내키는 여행 방식이 아니다. 하지만 박승진이 미국 스카우트 캠프장에서 두 달간 스태프로 일하며 겪은 낭만을 며칠의 여행으로 훔쳐올 수 있다면, 견딜 만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잘 세팅된 편안함을 빌리는 형식일지라도.”(77쪽)
[COMPANY] 일진글로벌
지난 4월 1일,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이하 순천만박람회)가 개최됐다. 순천만박람회의 시작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 순천만박람회는 아름다운 식물을 전시하고 정원 관련 용품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 생태계의 보존을 꾀하고 정원을 국민의 복지를 위한 녹지로 인식하게 만드는 박람회로서 큰 의미를 가졌다. 일진글로벌 역시 정원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순천만박람회에 주목했다.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화훼 연출 부분에 대한 제안 공고를 마주했을 때는 설렘과 열정으로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일진글로벌은 “전 세계인의 쾌적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기획부터 설계, 제작, 시공이 이르는 조경 토털 솔루션을 제안하자”는 목표로 공모에 임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쉽게 2등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공을 들인 만큼 아쉬움도 컸지만, 이 경험을 발판 삼아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한 정원은 무엇인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원은 무엇인지 탐구하며 새로운 화훼 연출 방법을 연구해왔다. 2023 순천만박람회 개최 소식은 10년 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기술력을 선보일 기회였다.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순천만국가정원 화훼연출 용역’에 도전했고, 그 결과 계약 업체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2023 순천만박람회장은 자연을 지향하는 순천만습지권역, 정원 문화 확산을 꿈꾸는 도심권역, 순천만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팽창을 완화하는 국가정원권역으로 나뉜다. 국가정원권역에는 세계정원, 테마정원, 참여정원 등이 조성됐다. 그리고 길과 길을 연결하는 길목, 호수를 내다볼 수 있는 데크, 너른 녹지 등 박람회장 곳곳에 일진글로벌이 만든 정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정원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주는 표시판 하나 없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꽃이 조화롭게 핀 이 정원에 모여들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순천만박람회에 다녀간 기록을 남기고 있다. 국가정원권역에 일진글로벌이 조성한 정원은 총 다섯 개다. 각기 특징은 다르지만, 모두 너른 녹지 위에 펼쳐진 화려한 초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조성됐다. 박람회장의 탁 트인 자연 풍경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고 다채롭게 식물을 식재해 화려함을 더했다. 더불어 모든 정원의 이름을 순수 한국어로 지어 ‘한국성’을 강조했다. ‘라온 정원’은 국가정원권역의 초입에 위치한다. 나뭇잎을 형상화한 녹지 패턴 속에 ‘즐겁다’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패턴정원, 향기정원, 과실정원, 락가든, 그라스정원을 조성했다. 정원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나무의 잎맥에 해당하는 공간을 거닐게 되는데, 이 잎맥을 잔디로 포장해 자연 속을 산책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순천만호수 인근에 조성된 ‘나르샤 정원’은 본래 거대한 흑두루미 꽃 조형물이 있던 곳이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조형물을 철거하고, 순천호수정원과 봉화언덕을 향해 탁트인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다섯 개 정원 중 유일하게 조형물이 설치된 곳이기도 한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멋스러워지는 코르텐 스틸로 만든 흑두루미가 파란 하늘, 맑은 호수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꽃보라 정원’은 네덜란드정원을 리뉴얼한 정원이다. 문화, 건축, 미술 등 다양한 콘셉트의 포토존형 정원을 튤립 모양의 패턴을 즐길 수 있는 정원으로 재조성했다. 덕분에 튤립이 피어나지 않는 계절에도 다양한 꽃으로 그린 튤립 패턴을 통해 네덜란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동천에서 정원드림호(보트)를 타고 내리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수문 출입구에 ‘윤슬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원 이름처럼 햇빛이나 달빛에 반짝이는 호수의 잔물결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꽃과 데크를 이용해 배 모양의 전망대를 연출했다. 이때 배는 순천시민이 순천만박람회장으로 들어올 때 이용하는 교통수단, 즉 연결고리라는 점에서 순천만박람회의 목표 중 하나인 삶의 공간과 정원의 연결을 상징하기도 한다. ‘천국의 꽃계단 정원(드림 정원)’은 다섯 개 정원 중 조성이 가장 까다로웠던 공간이다. 평평한 땅 위에 만든 다른 정원과 달리 계단식의 지형을 다지고 조성해야 했다. 동선을 어떻게 계획할지, 하나의 단을 어느 정도 높이로 쌓아 올려야 할지, 사람들이 안정감을 느끼며 꽃을 감상하기에 좋은 화초의 높이는 어느 정도인지 끊임없이 테스트했다. 60% 이상의 수종을 대품종으로 선정해, 지면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관람객의 다리가 가려지도록 연출했다. 덕분에 마치 꽃의 품속에서 사람들이 거니는 듯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일진글로벌은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날씨 변화와 기온 변화에 따른 식물의 생육 관리를 뽑았다. “박람회 개최가 4월 1일인데, 기온이 낮은 3월 중순에 식재할 수 있는 화훼 수종이 다양하지 않았다. 풍성하고 다양한 봄꽃의 향연을 느끼기엔 턱없이 종류가 부족했다. 그래서 4월 중순부터 5월 사이에 개화하는 다양한 식물을 난방이 이루어지는 하우스에서 빨리 생육할 수 있도록 재배했다. 다소 단조로운 수종으로 조성하는 패턴정원과 다르게,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가진 입체감 있는 정원으로 만들고자 봄에만 120가지 수종을 식재했다.” 정원 조성이 끝난 후에도, 이를 관리하는 일이 이어졌다. “식물이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날씨와 기온을 고려해 식재했 지만, 박람회장 개장 직전까지 눈이 내리고 꽃샘추위와 서리가 찾아들었다. 고민 끝에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꽃을 여러 번 교체했다.” 순천만박람회는 많은 이에게 회사의 기술력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진글로벌은 기업의 색채를 또렷하게 드러내기보다 순천만박람회의 지향점에 어우러지는 정원을 조성하는 것을 택했다. 순천만박람회에 참여한 다양한 이들의 노력이 하나의 방향을 향할 때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만 완성도 높은 정원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어떠한 형태로 조경 산업이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일진글로벌은 색다른 시도를 계속할 예정이다. 탄탄한 경험으로 다진 새로운 기술력을 바탕으로, 10년 뒤 순천만박람회에 또 다시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글 김모아 사진 일진글로벌 TEL. 032-566-6611 WEB. www.iljinglobal.co.kr
[PRODUCT] 상상력을 키우는 ‘안녕! 보노보노 조합 놀이대’
어린이 놀이터는 인지 및 언어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사회 정서 및 신체 발달을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그래서 놀이터는 어린이가 맘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디자인될 필요가 있다. 조경 시설물 브랜드 ‘미소’는 기존 놀이터 디자인에서 탈피해 친근하고 창의적인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어른들에게는 동심을 불러일으키고, 아이들에게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창의적인 놀이 시설물을 선보이고 있다. 미소의 ‘안녕! 보노보노 조합 놀이대’는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해당 애니메이션 주인공 보노보노가 사는 숲을 놀이터로 재현했다. 커다란 트리하우스와 자연 소재를 활용한 놀이 시설물 등은 보노보노가 사는 숲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곳곳에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조형물로 설치해 찾아내는 재미를 제공하고, 캐릭터 조형물과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일종의 포토존 역할을 한다. 트리하우스 안 반원형 곡선의 계단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어 어린이의 신체 능력 향상과 더불어 인지 발달에 도움을 준다. 2층에는 원통형 슬라이드를 설치해,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며 짜릿한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했다. 또한 주요 놀이 공간인 트리하우스 내부에 아이들이 여름철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휴식할 수 있도록 놀이 테이블 세트를 설치했다. TEL. 070-7797-8344 E-MAIL.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