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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1857년 뉴욕, 어떤 30대
  • 환경과조경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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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the Central Park, 1873. John Bogart 제작. 센트럴파크 완공 전 발행된 지도(센트럴파크 조성이 공식적으로 끝난 것은 1876년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설이 상당히 많은데, 주요 암석이나 위치마다 목적을 살리거나 의미 있는 이름을 붙인 데서 19세기 신사들의 유우-머가 느껴진다. 출처: 뉴욕공립도서관(digitalcollections.nypl.org/items/4e6a6080-3569-0134-549e-00505686a51c)

 

 

에피소드 1

1857년, 35세(각주 1)

6월,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서: 결국 잡지사가 문을 닫는다. 온갖 분야를 다 해보는 대책 없는 아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도 흔쾌히 지원해준 아버지께 죄송할 따름이다. 미국 사회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선 출판사가 사업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실용주의에 미친 신사들(practical man) 속에서 실용성 아닌 의미를 찾는 이들의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쩔 수 있는가. 이제 다른 일을 찾아봐야지. 저번에 보니 시에서 추진하는 공원의 감독관을 찾고 있다고 하던데.

 

9월, 성공했다: 여름에 넣었던 감독관 지원 서류가 통과했다는 소식.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공원에 집중할 수 있는 공화당의 인재임을 어필한 게 효과적이었다. 의원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도움을 주신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들께 감사하다. 이제야 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일까.

 

걱정은 중요한 일에 손을 보탠다는 흥분감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843에이커의 땅에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견을 수렴해 뉴욕에 걸맞은 공원을 만드는 일이다. 수백의 사람들이 관리하는 일이다. 지금부터 할 일이 태산이다.

 

10월, 새로운 기회: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다우닝 씨의 동료였던 캘버트 복스(Calvert Vaux) 씨의 연락을 받았다. 공원 설계 공모에 함께 나가보지 않겠냐고 한다. 어쩌면 1851년 런던에서 마주쳤던 그 그림 같은(picturesque) 공공 공원(public park)을 미국 땅에서 실현할 기회일지 모른다. 이 부지의 전체 지형을 조사했던 빅엘(Viele) 씨가 설계한다고 들었을 때는 나도 함께할 여지가 있을까 싶었지만, 딱히 말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복스 씨와 같이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느낀 게 많다. 뉴욕 시민들은 미처 모르겠지만 이 공원은 우리의 가장 큰 유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100년, 200년 뒤 뉴욕의 가장 중요한 장소, 뉴욕 시민들의 허파이자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지난 세기 프라이스가 “픽처레스크에 대한 에세이”(1794)에서 말한 ‘그림 같은’ 경관에 관한 이야기와 기록은 영국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그 이상에 가장 근접하게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19세기 미국 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1월, 결국: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의 자랑스러운 존, 내 사랑하는 동생이 끝내 영원히 눈을 감았다. 행복했던 뉴헤이븐의 나날들이여! 기억 속 젊음이 충만한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길.

 

1858년 4월, 드디어: 공모에 당선됐다는 소식이다. 감독관에서 책임 건축가로 승진했다. 33번째, 마지막으로 공모작을 접수했었는데, 지금 보니 다들 공원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앞으로 계속해서 확장될 이 찬란한 대도시에 공원을 만든다는 대업을 자신의 허영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게 분명하다. 이런 허영 덩어리들이 만드는 공원이 아닌, 미국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의 공원(public park)’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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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초상화, 19세기 후반. 출처: 뉴욕공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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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버트 복스의 초상화, 1920년경. 출처 미상

 

2024년으로 빨리 감기 

166년 전 중앙공원, 즉 센트럴파크가 처음 생겼다. 공원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겼다고 할 수는 없 겠지만, 센트럴파크가 오늘날 한국 곳곳에 널리 조성된 ‘중앙공원’이라는 녹지 유형을 안착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이후 연재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한국의 도시민치 고 각 시군의 중앙공원을 안 가본 사람이 있을까. 참고로 한국의 도시화율은 8할이 넘는다.

(각주 2)

 

공원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석가의 사고적 환기가 필요하다. 중앙공원이 빠르게 도시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것처럼, 공원의 속성은 우리의 일상 배경으로 너무 쉽게 치고 들어왔다. 지난 달 글에 짧게 적었지만, 필자가 센트럴파크를 흥미로운 대상으로 인지한 것 역시 뉴욕살이 만 6년 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경을 전공하기 전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대형 주제를 왜 놓치고 살았는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 큼 옴스테드가 치밀하게 공원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한창 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던 1859년에 그 려진 지형도에서 옴스테드의 집착에 가까운 면이 쉽게 포착된다. 온갖 공을 들여 식재를 하느라 공원 조성 예산을 훌쩍 넘겨버리는 바람에 위원회와 끝없는 마찰이 있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인 마냥, 한 번의 의심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냥. 

 

그렇다고 해서 옴스테드가 마냥 영국식 픽처레스크 정원을 미국에 옮겨오는 데 그쳤다면, 센트 럴파크 ‘공모전’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옴스테드와 복스의 설계안, ‘그린스워(Greensward)’는 어마어마한 토목 공사를 바탕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센트럴파크 공원위원회가 1857년 공모전 을 개최하며 내건 여덟 가지 필수 조건을 맞춘 결과다. 

 

여덟 조건은 다음과 같다. (각주 3) 

첫째, 공원법에 따라 정해진 약 1,500,000불의 공원 조성비에 대한 구체적 지출 계획 

둘째, 59번가와 106번가 사이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며 공원을 가로지르는 4개 이상의 도로 

셋째, 20~40에이커 사이 규모의 연병장과 관객들이 편히 관람할 수 있는 편의시설 

넷째, 각각 3~10에이커 규모의 놀이터 3개

다섯째, 전시, 콘서트 등 행사를 열 수 있는 건물을 위한 부지 

여섯째, 대규모 분소 1개소와 전망대를 위한 부지 

일곱째, 2~3에이커 규모의 화훼 정원을 위한 부지와 그것에 대한 설계

여덟째, 물이 흐르는 공간을 남겨두어 겨울에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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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파크의 원형 지형도와 당시 조성 중이었던 도로 및 산책로 현황도 (Map Showing the Original Topography of the Site of the Central Park with a Diagram of the Roads and Walks now under construction), 1859년 1월.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온갖 ‘도로’의 얽힘이다.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도 ‘교통’ 과 ‘체증’에는 한없이 민감하지 않는가. 마차가 대규모 보급되어 속도를 즐기는 방법을 깨우치고 있었던 옴스테드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숲속 산책로를 그대로 떠다 만든 듯 거미줄처 럼 얽혀 있는 램블스(Rambles)의 보행로 네트워크와 그것을 둘러싼 마차로(Carriage Road)를 보면, 센트럴파크에서 (적어도 옴스테드가 바라봤을 때)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단연코 산책과 드라이브였다. 그리고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지형을 뚫고 만든 횡단로(Transverse Road)는 분명 공원 조성으로 인해 맨해튼의 동서가 나뉘는 사태를 걱정하고 있던 공원위원회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다. 

 

19세기 북미에서 옴스테드, 약간의 살 붙이기 

사실 옴스테드의 ‘동화 같음’은 그의 정치사회적 사상과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정말 많은 것―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희생도―을 희생하고 바친 사람이다. 이런 점은 그의 미국에 대한 애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사실 공원에 대한 수많은 글의 시작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노예 제도에 대한 그의 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미의 19세기는 쳇바퀴 돌아가듯 새로운 문물과 발견이 연이어 이어지는 시기였다. 1840년 대에 텔레그램이 생겨났고, 1820년대 말부터 동부를 중심으로 시작된 철도 건설에 박차가 가해 져 1850년대에는 이미 9,000km 이상의 철로가 깔려 있었다. 철로가 깔리면서 산업이 급격히 발 전했고 남부와 북부의 갈등도 점차 커져 결국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이어졌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원인인 노예 제도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옴스테드의 공원론에서 남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아직은 공원의 ‘공’ 자도 모르던 시절, 옴스테드는 남부를 여행하며 「뉴욕타임스」 에 이른바 ‘노예주(Slave States)’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는 노예 제도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남부가 반대하는 북부의 자본주의적 이기심과 도덕적 해이를 경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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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의 미국 철도 지도, 세 개의 도로와 태평양으로 향하는 우편 육로를 보여준다 (Lloyd's American railroad map of the United States, showing the three proposed roads and the overland mail route to the Pacific). Philadelphia: J. T. Lloyd, 1859. 출처: 미국국회도서관

 

“이처럼 저질스럽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목표를 지닌 정치가와 (남부의 가장 훌륭한 신사조차도 여기 포 함된다) 저질스럽고 편협하며 당에 종속된 물질적인 사람들로 (북부에서 흔히 보인다) 우리의 민주주의 국가관이 대체 어떤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될 것이란 말인가 ……. 우리에게는 어렵고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도록 더욱 직접적으로 지원할 기관이 필요하다. 우리의 교육관은 확장되어야 하며 이런 비참하고 그저 평범 할 뿐인 교육 기관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포괄해야 한다. 힘들고 약한 자들을 그저 내버려 둘 수 만은 없다.” (각주 4)

 

옴스테드는 정부가 나서서 노예 제도를 근절시킬 것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을 통해 각 지주가 직접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고 외쳤다. 즉,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올바른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적 이상주의자를 그대로 본뜬 것 같은 사람이 공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옴스테드이니, 우리가 무의식중에 공원을 무언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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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내스트(Thomas Nast), 승리의 축복(The Blessings of Victory). 1864~1865. Albumen printon card mount. 출처: 미국국회도서관

 

에피소드 2 2024년 서울, 여기 30대 

“뭐지?” 싶을 제목을 5초만 참고 넘어가 보자.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수업 시간에 ‘나의 인생 그 래프 그리기’ 과제를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이 거의 그렇듯 완전히 잊고 지냈다. 몇 년 전 분가를 핑계로 대대적인 짐 정리를 하다 이 그래프가 굴러 나왔다. 세상에나, 모든 것이 기억났다. 

 

혹독한 청소년기를 보내서인지 냉소를 달고 살던 고등학생 필자는 10분 만에 뚝딱뚝딱 단순하 디 단순한 그래프를 완성했었다. (물론 혹독함은 나보다는 부모님에게 해당하는 표현일 것이다. 지면을 빌려 당시 부모 님의 고생에 고개를 숙인다) 만 18세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24세에는 취직을 하며, 35세에는 박사학위 를 받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고 적었다. 70대 이후로는 ‘17세의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단계니 적지 않겠다’라며 패기 넘치는 설명과 함께 수업 시간에 발표했었다. 자잘하게 삶의 크고 작은 목표 지점을 표시해가는 친구들을 보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바뀔 걸 뭘 저렇게 귀찮게 하나하나 적고 앉았을까’하고 뚱하게 앉아 시간을 때운 기억도 난다. 박사 논문을 본격적으로 쓰 기 직전 ‘발굴된’ 이 그래프는 놀랍게도 내 인생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이없을 정도로 일관적으 로 진행되고 있음을 잘도 보여줬다. 말 그대로 18세에는 대학을 마쳤고, 24세에는 첫 직장에 들 어갔으며, 35세에는 박사학위를 받고 말았으니 점쟁이조차 혀를 내두를 계획 중심의 인간이 여기 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내게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옴스테드가 튀어 나올 테다. 그는 조경의 아버지라서? 아니다. 그가 그린 인프라를 사실상 시작했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 그 가 지금의 내 나이, 35세에 센트럴파크의 조경가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중반에 35세라는 나이는 지금의 헛-35세와는 결이 다르다. 1850년대 북미의 평균 수명이 35.1세였는데, 영유아 사망률이 워낙 높은 시기라고 해도 결코 젊 은 나이라고만 보기 힘들다) (각주 5)박사학위를 연구 분야의 ‘자격증’이라고 부른다면, 필자는 이제야 막 자격 증을 따냈으니 앞으로 갈 길만 구만리다. 옴스테드가 35세에 비로소 ‘자격’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20~30대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물론 매우 즐겁게 보냈다) 연구자 자격을 따기 위해 노력한, 그리 고 노력하고 있는 나와 내 동료들에게 약간의 편안함을 준다. 당장 내년의 커리어를 고민하는 모 든 밀레니얼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사실 아닐까. 이것이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니면 무엇일까. 

 

 

다만, 독자들을 위한 옴스테드의 경고문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또 옴스테드가 쓴 다른 글을 읽으며 경탄을 금치 못하는 모두들, 경 계하시길. 그가 조경가이기 전에 작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옴스테드가 직접 쓴 1차 사료를 읽고 있노라면 그 유려한 문장에서 연상되는 꿈 빛 같은 민주주의 사상에 쉽게 빠져들게 되기 마련이다. 옴스테드가 뉴욕 시민의 미래를 위해 센트럴파크를 계획했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그 속 에는 엘리트주의적 속성, 교육과 계몽을 통해 바람직한 사고를 지닌 미국의 시민을 키워야 한다는 의지, 우수한 리더십을 통해 도시에서 시민의 행동을 제어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 엘리트주의자의 전형 같은 모습이다. 실제 센트럴파크 조성 이후 공원에서 의 수많은 ‘규정’이 만들어졌던 것이 이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이후 명상을 위한 센트럴파크가 아닌 화려하고 풀어지기 좋은 놀이공원 코니 아일랜드(Coney Island)가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지.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옴스테드의 1차 사료가 여러 차례 등장할 예정이다. 날카롭고 뼈를 치는 비판적 사고 회로를 최대한 돌려 소개해드리니, 이 글을 읽는 분들 역시 예리하게 뒤통수를 노리 는 갈매기의 눈빛으로, 비판적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각주 정리

각주 1.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짚고 넘어간다. 옴스테드 아카이브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상상력을 보탰다. 19세기 북미 신사인 옴스테드는 이렇게 경박한 말투를 쓰지 않았다.

각주 2. 국가통계포털 KOSIS “도시화율”, 2022년 9월 업데이트. kosis. kr/index/index.do. 

각주 3. 센트럴파크 공원위원회, “Document No. 8, Friday, September 11, 1857”, Documents of the Board of Commissioners of the Central Park, for the Year ending April 30, 1858(1858년 4월 30일로 끝나는 회계 연도에 대한 센트럴파크 공원위원회 의 결 문서집), New York: New York City Central Park Board of Commissioners. 

각주 4. Frederick Law Olmsted, “Letter to Charles Loring Brace”, in The Papers of Frederick Law Olmsted: Volume 2. Slaver y and the South, 1852~1857, Charles Capen McLaughlin and Charles E. Beveridge, eds.,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1, p.234. 괄호는 옴스테드가 적은 그대로 옮겼다.  

각주 5. Human Mortality Database, 2023. www.mortality.org/ Home/Index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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