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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모던스케이프
  • 환경과조경 2023년 12월

19세기 말, 근대 도시로의 진입을 알린 신문물 중 하나는 전차였다. “수백 년을 이어 온 도시 경관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도시의 균열”을 가져온 전차가 “우리의 불안한 근대 풍경”의 서막을 연 셈이다(405호). “근대 도시의 아이콘인 방사형 가로”도 도시 구조와 형태의 개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412호). 한강의 전원풍 “심미적 가치는 서울의 근대화와 함께 사라지거나 변질됐”다. “자원 수송을 위한 철도 부설과 치수의 수단으로서 제방 조성, 수해로 재편된 백사장의 낯선 풍경”은 전원에서 도시로 한강을 급변하게 했다(426호). 변화의 급류에 던져진 것은 도시의 물리적 바탕만이 아니었다. 여러 열강과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의 빗장이 열렸고, “외국인 거류지가 만든 이국적인 근대 풍경” 속에 “혼란과 잡거(雜居)의 도시”가 형성되면서 “조선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역차별받는 불우한 시대를 겪어내야만 했다”(406호).

 

서구 근대 도시의 발명품인 공원이 이식되었다. 공원은 당시 도시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대한제국기를 거치며 계획된 두 개의 공원, 즉 독립공원과 탑골공원은 “자주적 시도였지만 미완에 그쳤고 공원을 매개로 근대화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닮았다”(407호). “일본 최초의 근대 도시공원인 도쿄 히비야 공원을 설계하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기틀을 잡은 혼다 세이로쿠”는 “경성부 남산공원 설계안”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한국 주요 도시에 대공원 설계와 국립공원 지정, 풍경 활용 계획 등”을 마련하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411호).

 

“개항 이후 가장 급진적으로 변한 곳은 궁궐”이었는데, 창경궁의 공원화, 즉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이 결정된 이후 가장 먼저 만든 시설”은 “대온실”이었다(416호). 식민지기 경성에서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자 “사직(社稷)과 함께 수도 한양 건설의 핵심이었던 종묘”의 공원화까지 논의되었다(415호). 현재의 효창공원 자리는 원래 원묘園墓였으나 “묘역 일대에 근대의 성격이 간섭되기 시작”하면서 공원을 비롯한 “여러 시설의 층위가 중첩되어” 복합적 공원으로 진화했다(420호). 

 

“도시의 자연 대체제로서의 공원”은 “근대 초기에 도덕과 문화, 윤리가 박탈된 도시를 구원할 …… 이상적인”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공원이 “생각처럼 순수하게 이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공원은 “근대 도시의 암울하고 야만적인 민낯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의 주요 제례처인 사직단을 품고 있는 사직공원은 …… 아편과 모르핀 따위에 중독된 부랑자들이 유독 많이 이용한 곳”이었으며, “옴스테드가 꿈꾼 공원의 목가적 이상향은 실제 세상에는 없는 신기루였음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있었다”(422호).

 

“지금은 마땅하다고 알고 있는 개념 중에는 근대기에 처음 등장한 것이 생각보다 많다. …… ‘어린이’도 그중 하나다.” “유치원, 아동 운동장, 유희 시설 등 어린이 시설이 조성되면서 어린이에 대한 사회상이 공간에 투영되기 시작했다”(409호). 1950~1960년대에 활발했던 “아동공원 조성”도 이런 맥락의 연장선 위에 있다(423호). 

 

정원은 근대의 풍경 속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개항기와 식민지기에 “공원과 공공 정원이 함께 들어왔”지만, 그 기능과 성격이 정확하게 구별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의 여느 국가처럼 근대 도시 시설의 이식 과정이 단순했”던 당시, “공원이 파크와 퍼블릭 가든의 구분 없이 모두를 아우르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면서 퍼블릭 가든은 파크와 혼성되고 사라져 버렸다”고 볼 수 있다(421호). 1930년대에는 “일부 계층에서 주택에 정원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들의 주택 정원이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되면서 정원 딸린 주택이 점차 이상적인 주거 환경으로 정착했다.” “주택 정원은 개인의 취미와 취향을 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대적 환경이었다”(417호).

 

옥상정원은 “백화점이나 호텔에 처음 설치”됐다.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 건물 최고층 높이에서 일상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개방감과 낯선 시선을 경험했다.” “세련된 장식과 시설, 최고급 서비스를 향유하는 서양식 사교 활동이 가능했기에, 자본과 권력을 가진 상류 계층은 물론 진보적 성향의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옥상정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418호).

 

근대 도시는 새로운 여가 문화와 공간을 낳았다. “대중을 위한 공공의 오락 장소로 발전”한 동물원은 “도시 근대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시설”이었다. 하지만 창경궁에 들어선 최초의 동물원은 “근대 정신 대신 식민지기의 상흔이 다른 어느 곳보다 짙게 밴 공간”이었다(413호). “군마 개량과 위락 기능”을 합한 경마장이 곳곳에 건설되기도 했다(410호). 서구의 경우와 유사한 본격적인 관광 개념도 자리 잡는다. “근대 관광은 국토 곳곳에 명소라는 권위를 부여했지만, 식민 국가에서 지배자의 왜곡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기에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을 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414호). 관광은 해변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관광지로 낙점된 해변 지역의 개발은 철도 부설 및 역사 건설과 짝을 이뤄 진행됐다. 해변에는 치유와 요양을 위한 숙박 시설, 오락과 사교를 위한 구락부 …… 등이 들어섰”으며, “유럽에서 건너온 해변의 여가 문화와 풍경”이 이 땅에 서서히 스며들었다(424호).

 

이미 알아채셨겠지만, 앞의 내용은 이번 호로 막을 내리는 ‘모던스케이프’의 여러 부분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옴표 안의 문장 혹은 구절은 모두 연재 글에서 가져왔다. 지난 2년간 24회에 걸친 긴 여정을 안내하며 근대 여명기의 도시 풍경을 상상하고 이해하게 해준 박희성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 글 마지막 문단에서 그가 말하듯, “암흑기이자 단절기로만 단정해왔던 20세기 전후 시기가 사실은” 도시 풍경의 현재를 “있게 한 중요한 토대였음을 공감”(428호)한다.

 

다시 한 해를 통과한다. 함께해주신 여러 독자와 필자 덕에 본지는 소통과 공론의 장을 자임하며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걸을 수 있었다. 『환경과조경』의 친구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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