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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 환경과조경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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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단위를 넘어 천 단위의 소상점과 공간들이 마치 세포처럼 세운상가군을 채우고 있으며 그렇기에 여기에는 수천, 수만 명의 삶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사진제공: OO은대학연구소).

 

제주에서 일이 끝나고 하루 이틀간의 여행을 계획할 때, 한 지인은 내게 공동묘지를 산책해 보라고 권했다. 이에 옆에 있던 또 다른 지인은 몸서리를 치며 시체들이 있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산책을 하느냐 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보면 내가 일상에서 디디는 모든 곳이 몇 십만 년에 걸쳐 그런 시체들을 켜켜이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지르밟고 거니는 이 땅에는 온갖 이야기와 살들이 부산스러운 우리 발에 잘 다져진 채로 묻혀 있다. 이 퇴적층은 일상을 사는 우리 눈에는 비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때때로 스며 올라와 낯선 내음을 풍기거나 삽 아래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채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지금도 건물을 짓기 위해 토목 공사를 하다보면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는데, 이렇게 발견되는 것들 외에도 유형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렇다고 기록에 남지도 않은 채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화의 층위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좋든 싫든 이 땅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유물과 이야기들은 미래를 향하는 우리의 시선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그것은 새로운 것을 그리기에 이미 너무 더럽혀진 종잇장, 또는 상상조차 불허하는 숨 막히는 박제에 불과한 것일까? 실용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든 미적 관심 또는 이념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계획의 목표이거나 또는 부수적인 작용인 바. 퇴적층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장애물없이 펼칠 수 있을까? 그런데 도시에서, 특히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축적됐고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곳에서, 시공간적, 사회경제적 맥락으로부터의 무중력 상태가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일까?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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