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불명의 전파 라디오 웨이브
연재를 통해 미개봉작(업)을 개봉하게 돼서 기쁜 한편, 철(학) 없음, 눈치 없음, 맥락 없음, 판단 착오, 아마추어리즘 등 그다지 대단한 게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크다. 경험과 학력, 스펙이 미천해 작은 회사를 운영 중이고 소개할 프로젝트가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엘리트, 에이스, 주류 집단에 소속되지 않거나 공모 수상, 비범한 능력, 트렌디한 감각을 당장 갖추지 않더라도 지속적 조경 활동을 할 수 있음을 누군가에게는 알리기 위함이다.
조경 덕후
나는 스스로를 ‘조경 덕후’로 소개한다. 조경과 관련된 인물, 새로 만든 공간, 도시·녹지 관련 정책과 법규, 도면 및 내역, 공모 결과 등 거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탐방하고, 사모으고, 읽고, 저장하고, 대화를 나눈다. 덕후로서 공들이는 것 중 하나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에서 조경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작은 프로젝트여도 거절하지 못하고 발전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일에도 진심으로 임한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거나 정식 참여사로 이름을 올리지 못해도 조경의 가치를 프로젝트 관계자들과 공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고 회사 운영이 위험해질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 나의 미개봉작은 대개 덕후적 선택과 기계적 집중의 결과이자 조경 관련 작업, 활동, 행위를 사랑해서 생긴 부산물이다. 대부분 미완의 작업이거나 망상적 희망의 결과물이다. 조경가이자 일반인으로서 해야 할 말과 담아야 할 시대상을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에 투영한다. 즐겁다. 응원과 인정도 받는다. 공식적 역할을 인정받을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라디오 또는 김지환의 정체성이 반영될 가능성은 커진다. 큰 프로젝트일수록 사공이 많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내 뜻대로 이끌 수 있는 이름 없는 작업을 지속한다. 공모, 제안 이외에 무상으로 하는 일은 없다.
민주주의정원
‘민주주의정원’은 2016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출품작으로, 2015 코리아가든쇼 출품작 ‘소 잃은 외양간’, 2016 서울정원박람회 출품작 ‘아낌없이 쓰는 사람’과 함께 사회 문제 3연작을 이룬다. ‘소 잃은 외양간’은 세월호와 관련해 사회적 대참사를 언급했고, ‘아낌없이 쓰는 사람’은 평창올림픽을 위해 500년 된 원시림을 훼손한 사건을 주제로 개발과 보존을 이야기했다.
민주주의정원에는 2015년의 사회 분위기를 담았다. 당시 중앙정부는 집권을 위해 지방정부를 탄압하고 헌법에 보장된 지방자치제를 축소하는 듯했다. 이를 반영하고자 정원을 이루는 모든 개념을 헌법에서 가져왔다.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모티브 삼아 정원 입구에 대나무숲을 만들고, 숲 속의 외침을 밖으로 퍼트리는 붉은 깔때기를 더했다. 조선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연출 기법, 식물 배치, 의미 부여와 같은 답 없는 한국성 찾기의 일환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로 한국성을 표현하려는 실험이자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를 찾으려는 강박에서 비롯된 디자인이다. 가든쇼의 공식처럼 여겨지는 혼합 식재, 비움과 위요, 한국성을 위시한 조선 시대풍에 반발하는 33세 김지환의 분열적 정신 세계의 반영이다.
* 환경과조경 402호(2021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김지환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씨토포스와 스튜디오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의 대표다. 스스로를 작업반장, 설계공이라 칭하듯 설계와 시공 사이의 중재자(신호등)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 그 관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을 손대고 싶어 하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보며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믿는다. 때론 못다 한 말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 한다. #라디오에이스 #정원작가 #은근히낯가려요 #조경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