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가든과 카를로스의 추억
2008년 9월부터 2009년까지 나는 정원 디자인 학업을 중단하고 영국 왕립식물원인 큐가든에서 인턴 정원사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일했던 곳은 열대 식물 재배 온실(Tropical Nursery)인데, 이곳의 주된 업무는 전 세계 열대 우림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재배하고 보존하는 일이었다. 매일 온실에 도착해 씨앗에서 발아되어 손가락 한마디쯤 자란 열대 식물을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어 주거나, 벌레를 잡아 영양분을 보충하는 식충 식물에게 물을 주고, 사막 기후에서 자생하는 식물의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내가 하는 일을 관리·감독하는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들은 큐가든의 3년제 대학을 졸업한 식물·원예 전문가였다. 그중 한 사람이 스페인 출신의 카를로스(Carlos Magdalena)였다. 카를로스와는 매일 아침 회의가 있을 때 마주하고 그로부터 작업을 지시받기도 했다. 스페인어 억양이 강한 영어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그의 말에 더 많이 집중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은 원래 소믈리에 출신으로 레스토랑에서 일했고 큐가든에 들어온 후에는 멸종 위기의 식물을 다시 살려내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등의 수다스러운 대화가 추억으로 남아 있다. 1년 후 큐가든과의 인연이 끝나면서 그와의 인연도 끝인가 싶었다. 하지만 2017년 그의 책 『식물 메시아(The Plant Messeiah: Adventures in Search of the World’s Rarest Species)』를 영국의 어느 서점에서 만나면서 카를로스의 활약을 좀 더 깊게 알 수 있었다.
번식이 중단된 식물, 라모스마니아
카를로스의 책은 인도양의 섬 로드리게스에 자생하고 있는 멸종 위기의 식물을 큐가든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려냈는지에 대한 노력과 성공의 기록이다. 수십 제곱킬로미터 넓이의 산호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는 섬, 로드리게스는 지금도 산호 때문에 배로는 진입이 불가능해 비행기로만 착륙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 탓에 로드리게스 섬은 그간 외부 식물의 침입 없이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식물의 보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섬도 서방 세계와의 접촉이 생기면서 자생 식물이 자라던 숲이 사라지고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는가 하면, 도로가 발달해 자생 식물은 물론 그 식물을 터전으로 삶고 사는 동물의 멸종이 급속화되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식물의 멸종은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식물이 더 이상 씨앗을 맺지 않는 일이 먼저 발생한다. 식물의 보고였던 로드리게스 섬은 지금은 더 이상 번식을 하지 않는 식물이 즐비한 “죽은 생명체의 섬”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살아 있지만 번식이 끝난 죽은 식물 중 하나가 바로 카를로스가 살려낸 식물 라모스마니아(Ramosmania rodriguesi)다. 라모스마니아라는 식물이 과학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이 섬의 원주민이자 교사인 레이먼드 아키로부터였다. 평소에도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레이먼드는 자신의 학생에게 인근에 보이는 식물 채집을 과제로 시켰고, 이렇게 채집된 식물을 수업 시간에 활용했다. 식물의 학명을 확인하고 그 식물이 자라는 환경과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학생 중 한 명인 헤들리 매넌이 가져온 식물이 좀 이상했다. 로드리게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지만 식물의 속과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어떤 식물과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 리틀 칼리지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정원생활자』,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