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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도시를 건축하는 조경
긴 방학을 마무리하는 주에는 늘 개강 증후군이 밀려온다.내가 가을 학기를 맞을 때 겪는 스트레스의 중심에는‘서양조경사’가 있다.제법 경험이 쌓여 이제는 서양조경사15주 강의에 밀도가 생기긴 했지만,고백하건대 나는 내 강의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대 정원에서 시작해 중세 정원,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 17세기 프랑스 형식주의 정원, 18세기 영국 풍경화식 정원 순으로 살펴오다 종강이 다가올 무렵에야19세기 도시공원의 발명과 조경의 탄생을 다루는 나의(그리고 대다수 학교의 통상적인)조경사 구성에는 모순이 적지 않다.
근대 산업 도시의 사회 문제를 공간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전문 직능(profession)이자 학문 분과(discipline)로‘새롭게’시작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의 역사를 왜 전근대의 정원 프레임으로 읽어야 하는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는 랜드스케이프 가드닝과의 절연을 선언한 명명이자 전근대의 공간 질서를 거부한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하면서,정작 우리는 왜 정원 양식과 문화를 중심에 놓고 조경사를 배우나요?”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몇 년 전부터 학기 초반에 조경 태동기의 도시사회사를 먼저 다루고 이 근대기의 정신을 틀로 삼아 고대부터 현재까지 도시,경관,공원,광장,가로,공공 공간,정원의역사를 각론으로 편성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지만,이번 방학에도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고 벌써 개강이 코앞이다.
자주 인용되는,옴스테드가 파트너 보에게 쓴 편지한 구절이다. “…이 비극적 명명 때문에 늘 괴롭다.…랜드스케이프는 좋은 단어가 아니다.아키텍처도 좋지 않다.둘의 조합도 마땅치 않다.가드닝은 이보다 더 못하다.”여러 문헌과 자필 서신에 기록되어 있듯,옴스테드는 새로운 직능명‘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경관과 건축을 함께 묶은 명칭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조경의 초기 주창자들은 왜 이 신조어를 받아들인 것일까.아직 여러 논쟁이 진행되고 있지만,랜드스케이프‘가드닝/너’의 전통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정신과 도시의 변혁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랜드스케이프‘아키텍처/트’에서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조셉 디스폰지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옴스테드는 프랑스어에서 이미19세기 초부터 도시 공간과 구조의 개선을 담당하는 전문 직능 명칭으로 쓰인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architecte paysagiste)(영어의landscape architect에 해당)를 알고 있었고,그 직능의 역할과 정체성이 뉴욕의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환경과조경』2015년3월호, 2016년4월호 에디토리얼 참조).찰스 왈드하임은“옴스테드는 건축의 권위를 차용하는 것이 일반 대중에게 새로운 분야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이 새로운 분야가 주로 식물이나 정원과 관련된다고 오해되는 경향을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이런 맥락에서 보자면,탄생기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곧 조경의 사명은‘도시(의 공원,경관,공공 공간,인프라)를 건축’하는 것이었다. ‘도시를 건축하는 조경’이다.
8월 말,본지 박명권 발행인이 지은『도시를 건축하는 조경』(도서출판 한숲)이 출간됐다.지난25년간 한국 조경 설계의 도약기를 이끌며 다듬어 온 조경 이론과 실천에 대한 일곱 가지 생각을 펼친 책이다.자연과 인간,과학과 예술,도시와 건축,디자인과 문화,공간과 시간,채움과 비움,전통과 한국성이라는 묵직한 주제가 저자의 설계 작업들과 함께 엮여 전개된다.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부분은 매력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책 제목이다.출간 기념 북토크 준비를 위해 조금 먼저 책을 접한 몇몇 사람들은 하나 같이 도시,건축,조경을 동시에 배치한 제목이 흥미롭고 탁월하다는 반응을 보였다.이 제목에 대한 이들의(그리고 예상되는 여러 독자의)반응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질문이 담겨 있을 것이다.도시를 건축하는 조경,그것은 현실인가 당위인가 지향인가?
‘도시를 건축하는 조경’을 하나의 문장으로 바꾼다면‘조경은 도시를 건축한다’일 것이다. ‘해야 한다’는 당위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현실 아니면 지향일텐데,이 문장이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조경은 도시를 건축한다’는 지향은 동시대 조경에 적합한 것일까?책의 뒤표지에 들어갈 짧은 추천사를 부탁받고,나는 고심 끝에 네 줄짜리 짧은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조경의 새로운 좌표,곧‘도시를 건축하는 조경’의 문을 연다.”이 문장에서 고민거리는 형용사‘새로운’이었다.옴스테드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부터 이미 조경은 도시를 건축하는 사명을 자임했다. 150년 묵은 이 지향점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사촌 분야와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영역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피로감으로 이중의 우울증을 겪고 있는 동시대 조경의 정체성 때문이다.이른바 위기론의 틈바구니에서 가드닝으로 회귀하는 현상마저 감지된다.이러한 시대 착오적 상황에서‘도시를 건축하는 조경’에 대한 토론은 새롭고,중요하다. 150년 전 옴스테드의 시대와 다른,새로운 좌표로서의‘도시를 건축하는 조경’을 두고 열띤 논쟁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최재혁 소장(스튜디오 오픈니스) 편이 이번호로 막을 내린다. 석 달간의 큰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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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가장 식물적인 것이 가장 예술적이다
“빌바오 효과”라는 말을 낳은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프랑크 게리라는 유명 건축가의 브랜드 마케팅을 통한 지역 재생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건축물 자체가 예술 작품인 수많은 미술관을 떠올린다면 새롭게 문을 여는 부산현대미술관이 부산 서부 지역의 부족한 문화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그래서 부산현대미술관이라는 건축물이 그 모습을 공개했을 때 쏟아진 여론의 질타와 대중의 실망감 역시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얼굴이 메시지이자 자본인 시대에,공공 턴키 발주 방식으로 탄생한 대형 마트 같은 겉모습은 미술관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했다.그렇다면 미술관다운 건축물의 모습은 대체 무엇일까?미술관의 조건에 겉모습은 어때야 한다는 조항이 어디에 있단말인가?미술관은 건축물이라는 매질媒質을 통해 반드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겉모습에 대한 못마땅한 반응은 쉽게 나오지만 미술관이 어때야 한다는 규범적 대안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개관전에 초대된 작가들은 저마다 이 미술관스럽지 않은 신상新商미술관을“미술관스럽게”만들어야 하는 부차적인 숙제를 떠맡은 듯 보인다.부산현대미술관은 미술관 자체에 대한 해석을 요청하는 하나의 기이한 장소특정성을 작가들에게 작품 설치의 조건으로 던져준 셈이다.패트릭 블랑(Patrick Blanc)의 수직 정원은 이렇게 스스로는 성격을 드러내지 못하는 중성적 공간에 대한 도발적 대안을 제시한다.
을숙도라는 섬,그리고 미술관
섬은 땅과 물의 중간자다.물이 차면 사라지고 빠지면 드러나는 대지의 유동성은 비옥한 토지를 만들고 철새를 포함한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처를 형성한다.그러나 안정성이 없는 대지라는 이유로 밑바닥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점유할 수 있는 변방의 땅이기도 하다.많은 영토 분쟁이 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도 섬은 경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중간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섬을 주제나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이 많다는 사실도 고립된 지형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지정학적,생태적,사회적 풍경 때문일 것이다.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섬이라는 대지의 변화와 불확실성이 초래하는 긍정적,부정적 가능성은 예술가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을 주었다.을숙도를 주제로 한 시와 소설이 많은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이러한 의미에서 부산현대미술관이 을숙도라는 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오래된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을숙도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하구에 위치한 모래톱으로,원래 일웅도와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변화의 땅이었다. 1980년대 낙동강 하굿둑이 건설되면서 담수와 해수가 자유롭게 넘나들던 흐름이 끊기고 천혜의 자연 생태계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된다.그 후로 쓰레기 매립지,준설토 적치장,분뇨 해양 처리장,명지대교(을숙도대교)등이 들어서면서 섬의 원시성은 사라지고 을숙도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조각나고 재구성된 어정쩡한 자연으로 남았다.이 섬은 우리나라가 근대화와 국토 개발 과정에서 취해 온 자연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기록한 오픈 아카이브이기도하다.부산현대미술관은 바로 이 하굿둑이 섬을 가로지르며 만든 도로에 면해 있어 달리는 자동차에서 바라보면 미술관의 파사드가 거대한 광고판처럼 보인다.민물과 바닷물을 가르는 대규모 토목 구조물에 붙어 있는 부산현대미술관은 입지적 특성 때문에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섬의 얼굴 역할을 하는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하굿둑,생태 공원,체육 시설,문화 회관,피크닉 광장,에코센터,미술관,매립지,체험장 등 저마다의 땅따먹기로 조각난 이 섬은 매력적인가?부산현대미술관이 이러한 섬의 역사와 무관하게 간판 역할을 할 수 있을까?미술관은 섬의 역사를 끌어안고 새로운 정체성을 세울 수 있을까? ...(중략)...
각주 1. 2018년6월 서울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 나온 패트릭 블랑의 발언에서 따온 제목이다.
*환경과조경365호(2018년9월호)수록본 일부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국내외 정원,놀이터,공원,캠퍼스,주거 단지 등 도시 속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동시에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고 있다.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조경 설계라고 믿고,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 한다.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스튜디오 테라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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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일상의 혁명을 위한 작은 무대
청출어람
서울이 이제는 세계적인 문화의 도시라고 내세워도,다른 나라에서 서울을 배워 갈 정도로 우리의 역량이 커졌다고 자찬을 해도,우리는 여전히 선진국의 멋진 사례를 동경했고 갖고 싶었다.우리의 현실에 맞게 제대로 소화하기도 전에 외국의 사례들이 우리 도시의 정책이 되었다.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도 그런 복제품 중 하나다.그런데6년 뒤 한때 많은 매체의 주목을 받았던 원래의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고,그 취지는 유일하게 서울에서만 살아남았다.정책적 카피로 출발한 프로그램은 원래 기획의 맥을 잇는데 그치지 않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원본을 뛰어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한다.이제 이 기묘한 기획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맥락에 최적화된 형태로 진화하여 매년 도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실현하고 있다.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72시간 어반 액션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이하72시간 프로젝트)의 모태는‘72시간 어반 액션(72 Hour Urban Action)’(이하72 HUA)이라는 이벤트다. 72 HUA는2010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Aviv인근의 소도시 바트얌에서 열린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비엔날레(Bat-Yam International Biennale of Landscape Urbanism)의 한 행사로 처음 실행된다.시장은 비엔날레를 계기로 도시가 자유로운 아이디어의 실험실이 되기를 원했고,두 명의 젊은 건축가가 특이한 형태의 공모전을 제시한다.주어진 시간은72시간, 3일 밤과 낮.참가자들은 한정된 기간 안에 한정된 예산으로 도시의 공간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제시할 뿐 아니라 프로젝트를 실제로 만들어야 했다.주어진 예산은2000유로에 불과했고 모든 법적 제약과 인허가 절차를 피하기 위해30cm이상의 지반 공사도 불가능했다.과연 누가 참여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열악한 조건의 프로젝트에 전 세계40개국에서450개의 지원서가 제출되었다.기획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이었다.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지역 주민과 협력해 도시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과정은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72 HUA는 극한의 조건을 둔 일종의 건축적 게임이자 도시적 실험이었다.그러나 이 이벤트는 흥미진진한 게임과 실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72 HUA의 제안자인 케름 할브레트(Kerem Halbrecht)와 길리 카예브스키(Gilly Karjevsky)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1“대개 도시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돈,행정적 절차가 필요하다.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생각과 의지로 무엇인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오늘날 도시를 변화시키는 일은 전문가와 행정가,정치가 등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되어 버렸다. 72 HUA는 이러한 불가능성에 반기를 든다.그리고 시민이 스스로 일상의 공간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다.과연 누가 공공의 공간에 개입할 권리를 갖는가?삶의 질을 결정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당연한 권리를 금지된 것으로 만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이 기획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이 순간,여기에서 활동가가 되고 반란군이 되라고 요구한다.여기에는 단 하나의 선언만이 존재한다. ‘내가 살고자 하는 현실을 내가 만들 권리가 있고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마지막 아방가르드라고 불렸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alist International)의 실천적 저항 정신을 계승하며,2건축의 권위를 건축 스스로가 부정하고 제도적 테두리를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건축에 저항하여 가장 낮은 위치에서 건축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시게루 반(Shigeru Ban)3의 생각과 맥락을 같이하며,대학살,전쟁,재난과 같은 인간성 자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건축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아키텍처 포휴머니티(Architecture for Humanity)4와 공동의 전선을 펼치는 듯 보인다.그러나72 HUA가 이러한 움직임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은 놀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놀이는 정치적 투쟁의 심각함을 거부한다.일시적이고 즉흥적이다.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한다. 72 HUA은 거시적 담론이 힘을 잃은 지금의 시대에 실천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가벼워야 한다는 점을,그리고 일상의 리듬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그 때문에 큰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2년 뒤, 201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두 번째72 HUA가 열린다.전 세계에서 수많은 참가자가 지원해 도시 곳곳을72 HUA의 상징색인 주황색으로 물들였고SNS와 유튜브를 통해 첫 이벤트를 뛰어넘는 주목을 받는다.같은 해가 지나기도 전에 세 번째72 HUA가 이탈리아 테르니Terni에서 열린다. 2013년의 네 번째72 HUA는 덴마크의 로스킬레(Roskilde)에서 열린다.국제 음악 페스티벌과 연계한 이 행사는 예년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팀으로 진행되었다.그리고2014년 독일 비텐(Witten)에서 열린 다섯 번째 행사를 마지막으로72 HUA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중략)...
**각주 정리
1.도무스(Domus)의 인터뷰를 참조했다(https://www.domusweb.it/en/architecture/2011/07/27/72-hour-urban-action.html).
2.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1957년부터1972년까지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지식인이 모여 활동한 그룹으로,전통적인 마르크시즘에 반기를 든 반자본주의적 사회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스펙터클의 정치에 반대하여 일상의 삶과 대상에서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으며,문학,시각 예술,건축 도시 분야의 이론과 접목된다.
3.시게루 반은 일본의 건축가로2014년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수상자다.종이를 건축 소재로 실험적으로 사용하여 주목 받았으며,종이 같은 값싼 재료를 재난 상황에서의 건축에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인다.지속적으로 재난 상황에서 건축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실제 고베,쓰촨,동일본,네팔 대지진 당시 임시 구조물을 현장에서 설계하여 제공했다.
4.아키텍처 포 휴머니티는 재난,전쟁 등의 극한 상황에서 건축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결성된 비영리 단체로,자급자족적이고 협력적인 가치를 제시하며 전 세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여 왔다.
*환경과조경365호(2018년9월호)수록본 일부
김영민은1978년생으로,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하버드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의SWAGroup에서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했다.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으며,설계 방법론을 다룬『스튜디오201,다르게 디자인하기』를 썼다.『용산공원』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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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식물의 선
3회 연재의 마지막 글이다. 첫 회에는 ‘분위기, 맥락, 주제’라는 키워드로 설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설계적 개념)를 다루었고, 2회 차에서는 ‘스케일’을 주제로 개념을 실재화하는 구체적인 방식(설계적 문법)을 논의했다. 이번 3회 차에서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설계 요소, 즉 설계 재료(설계적 어휘)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간다. 조경이 다루는 설계 재료는 꽃과 나무 같은 식물 재료, 돌이나 철 같은 무기 재료, 빛, 바람, 습도 같은 물리적 환경 요소 등 무수히 많지만, 본 연재에서는 조경 설계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식물에 관한 개인적 관점을 소개한다.
자연을 다루는 작곡가
“저는 조경학과를 나왔지만 나무는 잘 몰라요.” 업계에서 일을 하다보면 이렇게 말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미학, 계획, 설계, 역사, 이론, 생태학 등 그 앞에 조경을 붙일 수 있는 다양한 세부 학문이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가 설계가라면 분명히 문제다. 조경 설계에 있어 식물은 가장 중요한 설계 재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식물에 대한 이해는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설계가는 악기의 소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곡가에 비유할 수 있다. 악기 소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화성학 같은 음악 이론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만든 곡이 듣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더욱이 그 곡이 하나의 악기로 연주하는 독주곡이 아니라 여러 악기를 함께 연주해야 하는 협주곡이라면 어떨까? 다양한 소리가 함께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위해 작곡가는 각 악기의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그 소리들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음색의 변화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조경가는 자연을 다루는 작곡가 같은 역할을 한다. 악기 소리에 해당하는 식물 재료의 특질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설계 재료로서 식물을 어떻게 배우고 익혀야 할까? 악기 소리는 직접 연주해 보고 그 음을 들어 봐야 깊게 이해하고 다룰 수 있듯이, 식물 재료도 직접 보고 만지고 심어 봐야 알 수 있다. 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많은 것이 있지만 적어도 식물을 다루는 방법은 글로 익히기 어렵다. 설계가의 몸이 직접 식물과 만나면서 배워야 하는 일이다.
식물 없는 식재 설계
학창 시절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 있었다. 바로 ‘빵빵이를 돌린다’는 말이다. 식물에 일자무식이었던 신입생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스튜디오 수업의 과제는 주택 정원 설계였다. 지금은 잘 쓰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제도용 손 도구 중 여러 가지 크기의 원이 뚫린 도형자가 있었다. 그때의 식재 설계란 하얀 바탕 위에 나무를 상징하는 여러 크기의 원을 보기 좋게 배치하는 일이었다. 때로는 컴퓨터 툴을 활용해 나무 이미지를 붙여 넣는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도형자의 원이 나무 형태의 심벌로 바뀌었을 뿐 결국 하는 일은 같았다. ‘빵빵이를 돌린다’는 말은 나무를 잘 모른 채 식재 설계를 하는 행위를 향한 자조 섞인 표현이었다. 이렇게 작성한 도면이라면 그 안에 진정한 의미의 식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실체는 없고 공허한 개념만이 부유할 뿐이다.
학생이 아니라 현업에 있는 동시대의 젊은 조경가들은 식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종종 젊은 설계가와 교류할 기회가 있는데, 공간에 대한 예리한 감각, 창의적 표현, 세련된 의사 전달 방식 등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이들조차 정작 식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식물의 생물학적 특성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공간을 구성하는 회화적 표현 재료로써 식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색과 질감, 양감 같은 공간의 구성 요소를 식물 재료로 표현하는 데 미숙한 젊은 조경가가 많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담론이 중요했던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조경은 공원 스케일의 프로젝트에 전념해 왔다. 조경가를 양성하는 대학도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추어 왔다. 공간에 대한 종합적 구성, 빈틈없는 프로그래밍, 설계 개념을 전달하는 강력한 표현 전략같이 큰 프로젝트를 다룰 때 유용한 방법을 주로 다루었다. 반면에 식물 소재의 선, 색, 질감 등에 대한 교육은 부족했다. 몇 차례의 특강 또는 실습만으로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이런 주제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배워 나가야 하는 부분이라 간주하고 미루어 놓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경 설계 실무를 시작하면 식물을 배울 기회가 많은가?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법적 조경 감리 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설계가들은 식물을 가까이 마주하며 다루어 볼 기회를 좀처럼 갖기 어렵다. 학교 교육에서 모자랐던 부분이 실무에 종사하면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다.
식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더 좋은 식재 설계를 하기 위해 젊은 설계가들은 나름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떤 이는 정원을 설계하는 회사에 취직하거나 정
원박람회에 참여해 개인적 차원에서 식물을 익히고자
노력한다. 어떤 이는 식재 설계가 중요한 프로젝트에
서 정원 디자이너와 협업해 부족한 부분을 배우고자
한다. 또 어떤 이는 식물을 깊게 알고 싶어서 설계 사무실에서 퇴사하고 식물원에 취직을 하는 강수를 두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는 이들이 마음에 품은
공통된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식물 없는 식재 설계를 하고 싶지 않다.”
식물의 선
학생일 때 나는 식물의 색, 질감, 형태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었지만, 형태의 세부적인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선線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계 관점이 없었
다. 식물이 갖는 선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 시작한
것은 정원 설계를 하는 회사에 취직하고 식물을 일상
적으로 마주하며 일하면서부터다.
우리는 흔히 어떤 대상의 외양을 묘사할 때 ‘선이 곱다’ 혹은 ‘선이 투박하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선이 아름다운 사람, 선이 아름다운 자동차, 선이 아름다운
옷, 선이 아름다운 풍경 등 우리는 일상에서 아름다운
선을 수없이 보고 경험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자. 선이 아름다운 나무, 선이 아름다운 풀, 선이 아름다운 꽃이란 어떤 것일까? 누군가 이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녀)는 평소 식물의 형태를 눈여겨본 사람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 식물도 선을 가지고 있다. 땅에서
하늘을 향해 자라면서 아래부터 위를 향해 점점 얇아
지며 뻗어나가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선이
바로 식물의 선이다. 이런 선은 수종마다 다르고 또 같
은 수종이라도 개체 하나하나마다 다 다르다. 여름철
이면 이 선들이 잎에 가려져 두드러지지 않지만, 잎이
진 겨울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눈에 띄는 가지가 없
는 풀과 꽃에도 선이 있는가? 당연히 그렇다. 봄부터
겨울까지 성장하는 가느다란 줄기 또는 억새처럼 가늘
고 긴 잎 등이 풀과 꽃의 선을 만든다. 어떤 선은 가늘
고 섬세하며 어떤 선은 굵고 투박하다. 어떤 선은 가지
런하고 어떤 선은 어지럽게 교차한다.
큰 나무에도 선이 있고 작은 풀과 꽃에도 선이 있기에
정원 안에서는 수많은 선이 교차한다. 정원 전체의 풍
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려면 그 안의 무수히 많은 선이
질서를 가지고 조율되어야 한다. 선을 어떻게 조율하
는가? 나름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배운 방법은 제일
먼저 큰 선, 그 다음에는 중간 스케일의 선,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선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화가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과 유사하다. 큰 밑 선을 먼저 그리고 나서 단계적으로 작은 선
을 정리해 나간다. 이런 점에서 정원 일은 회화와 많이
닮아 있다. 다만 회화에서는 대개 평면 작업이 주를 이루지만, 조경은 3차원의 공간을 다룬다.
이 때문에 선을 조율하는 일 역시 다각도의 시선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시점에서 볼 때 아름다운 선의 흐름이 다른 시점
에서는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한 시점에서의 완벽함을 포기하더라도 전체적으
로 좋게 보이는 최적의 선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경
험 많은 설계가라면 최선이라 할 수 있는 선을 빠르게
찾아내겠지만, 식물의 선을 읽는 경험이 적은 설계가
라면 이를 쉽사리 발견하기 어렵다.
나무의 선
식물의 선 중에서도 나무의 선은 특히 중요하다. 큰 나
무의 선은 공간의 골격과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을 때는 전체적인 수형뿐만 아니
라 나뭇가지 선 하나하나의 흐름을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선의 흐름은 나무가 본래 어느 방향으로 자라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그 선을 잘 살려 심으면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느껴지고 곁에 다가선 사람에게 편안함을 준다. 반대로 선에 대한 고민 없이 무
심하게 심긴 나무는 주변 풍경과 부조화를 이룬다.
수많은 종류의 나무는 저마다 고유한 선을 갖는다. 예를 들어 단풍나무는 기둥부터 중간 가지 그리고 잔가
지에 이르기까지 그 선이 큰 굴곡 없이 매끈하게 이어
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고운 곡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에 반해 배롱나무는 잔가지가 적고 가지가 분지되는 부분마다 큰 굴곡이 있어 꺾인 선
이 강조되는 특징을 갖는다. 단풍나무보다는 투박하게
보이는 선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조형성을 느끼게 한다.
어떤 나무의 선은 다른 나무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느티나무의 선은 가지에 비해 기둥부가 굵은 특징을 지
니는데, 마치 큰 붓으로 그린 나무처럼 묵직한 인상을
준다. 매화나무의 선도 흥미롭다. 다른 나무보다 상대
적으로 키가 작고 큰 가지가 옆으로 퍼진 후 작은 가지가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자라는 매화나무의 선은,
얼핏 보았을 때는 어지럽고 산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불규칙한 선이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 준다. 과거
선비들이 그린 사군자 속의 매화나무에도 그런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노각나무의 선도 독특하다. 노각나무는 자작나무처럼 주 가지가 수직으로 길게 자
란다. 그런데 보통의 나무는 가지가 나무 바깥쪽에서
나무 기둥 쪽으로 안으로 굽듯이 자라는 반면, 노각나
무는 종종 가지가 안에서 바깥으로 꺾이며 자란다.비유하자면 팔꿈치가 몸 안으로 굽는 것이 아니라 몸 바깥으로 굽는 격이다.
나무를 바라보는 설계가의 관점은 모두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경가가 나무가 갖는 고유한 선을 섬세
하게 읽어 내고 자기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설계 재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의 전체 수형
만 생각하고 진행하는 설계와 가지의 디테일한 선까지
고려하는 설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와 같은 방식
으로 설계를 하고 시공할 때 기존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조경가 김용택이 설계한 여주 주택은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적절한 사례다. 주택의 현관 옆에 심은 낙상홍 한
그루에 관한 이야기다. 건축을 압도하지 않는 적절한
스케일의 나무를 선정하고 가지의 선을 공간에 맞추어
심어, 마치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공들여 키워온 나무
처럼 보이게 했다. 기둥이 하나인 큰 나무를 심지 않고
땅에서부터 가느다란 가지가 여러 개 올라오는 다간형
나무를 심음으로써, 큰 선에 해당하는 건축의 외곽선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하는 동시에 공간에 적절한 양감을 부여했다.
초화의 선
나무에 선이 있듯이 초화에도 선이 있다. 초화의 선을
만드는 요소는 나무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나무
의 선은 가지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지만, 하나의 정원을 만들 때도 수십 가지 종류가 쓰이는 초화 식물
의 경우, 선을 구성하는 요소도 매우 다양하다. 바늘
꽃이나 부처꽃처럼 긴 줄기가 큰 선을 만들기도 하고,
범부채나 유카처럼 독특하게 생긴 잎이 선을 형성하기도 한다.
톱풀이나 원추리같이 꽃이 필 때만 올라오는
긴 꽃대가 선을 느끼게 하기도 하며, 꼬리풀처럼 독특
하게 생긴 꽃 자체가 흥미로운 선을 보여 주기도 한다.
털수염풀처럼 하늘을 향해 나풀거리는 선을 만드는 식
물도 있고, 줄사철 같이 땅을 기는 듯한 수평적 선을
가진 식물도 있다. 모닝라이트 억새같이 길고 섬세하
게 느껴지는 선을 갖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은쑥처럼
잎이 짧고 촘촘해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그래
서 선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질감이 더 드러나 보이는
식물도 있다.
초화를 식재할 때 단일 수종을 군식하기도 하지만 비
교적 작은 공간에 수십 가지의 수종을 혼식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수많은 종류의 초화의 선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화가가 캔버스 위에서 선과 질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 조경가도 저마다 초화
의 선을 조율하는 방식이 모두 다를 것이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원칙을 가지고 초화의 선을
조율한다. 첫 번째 원칙은 식물의 선이 서로 상충하지
않도록 식재하는 것이다. 만약 한 지점에 큰 선을 갖는
식물을 심었다면 그 주변에는 선이 강한 식물을 심지
않고, 대신 색, 질감, 양감 등을 보충하는 식물을 함께
심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한 선의 아름다움은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공간에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부여한다.
두 번째 원칙은 식재 시점의 완성도에 관한 것인데, 식
물이 갖는 선의 결을 맞추는 것이다. 조금 모호하게 들
릴 수 있겠지만, 이는 앞서 나무의 선을 결정할 때 본
래 그 자리에서 자란 나무처럼 심는다고 한 것과 같
은 맥락의 이야기다. 즉 여러 가지 초화를 혼식하더라
도 식물들이 본래 그 자리에서 함께 태양을 바라보며
자란 듯 선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식재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선이 방향성을 가지고 켜켜이 쌓
이면 하나의 결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심을 경우 비교
적 단기간에 안정되어 보이는 초화 공간을 연출할 수
있다. 초화의 색과 질감만을 고려하고 작은 선을 읽지
않은 채 식재할 경우, 누군가 헤집어 놓은 듯 어수선한
모습의 공간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식물들이 태양을
따라 반응하며 자연스럽게 선을 잡아 나가겠지만, 제
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잔잔한 것이 더 아름답다
자연을 담은 공간을 설계하고 짓는 일을 하면서 느낀 점 한 가지를 공유한다. 주로 정원을 만드는 설계
사무소에 취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질문을 한 적
이 있다. “소장님은 어떤 나무가 좋으세요?” 설계가로
서의 기호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
다 좋다. 다 좋은 점이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답
을 조금씩 이해해 가는 것 같다. 나무도 꽃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일견 개성이 없고 평범해 보
이는 풀 한 포기도 자세히 바라보면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잔잔한 아름다움을 갖는 풀이 없다면 그 옆에 있
는 화려한 꽃의 아름다움도 드러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을 빛나게 하는, 자기 본연의 가치를 드
러내는 그런 잔잔한 것이 더 아름답다(연재 끝).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정원과 조경 설계 실무를 익혔다. 수상 경력으로 제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제3회 대한민국 신진조경가 대상 설계공모전 대상, 2017 코리아가든쇼 대상 등이 있다. 2017년 한강예술공원 시범사업의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스튜디오 오픈니스(Studio Openness)를 창업하여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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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명주의 경관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
누구에게나 술에 관한 기억이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발을 들이키던 시큼털털한 상투적 레퍼토리, 언젠가부터 속속 생기기 시작한 와인바에 여친을 데려갔다가 높은 가격에 놀란 자존심을 지켜 주었던 고마운 칠레산 와인, 할아버지 묘소 잔디 위에 뿌려 주고 마시지도 않았던 제례주, 동네 성당의 신부님이 맛보라며 권해 주신 달달한 국산 포도주 마주앙 등 주량이 매우 적은 나에게도 술과 얽힌 인연은 지겨울 만큼 많다.
술은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것 혹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등식은 다행히 사양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점점 사그라들었지만, 잔뜩 취해야만 하는 우리 문화만 탓했지 우리 술의 단조로운 시시함이 그 원인일 거라는 의심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스물다섯 즈음이었나, 일본 구마모토에서 그들이 소주라며 내온 술을 마신 그날 밤은 내 알코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후 외국에서 술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동안 술의 전부라고 알아왔던 소주와 맥주에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술은 당연히 수입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세상 좋은 술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고 꽤 고가의 술을 나누며 행복할 수 있어 좋지만, 그럼에도 여느 전시회 오픈식에 가서 으레 서빙되는 와인을 홀짝거리자면 뭔가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국산 와인을 접했다. 토종 농산물 오미자로 만든 술이었다. 왠지 소비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잔을 들긴 했지만 의외로 품질이 놀라웠다. 국산 와인 몇 가지에 대한 그리 탐탁지 않던 기억을 말끔히 밀어내는 멋진 경험이었다. 몇 달 후 전시회 오프닝 때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아 금방 동이 났다. 술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답해 주기 위해서 약간의 리서치를 한다는 게 그만 인터뷰로 이어졌다. ‘오미로제’가 만들어지는 문경은 경북 내륙의 첩첩산중이다. 고속 도로 개통으로 접근성이 훨씬 높아졌지만 소백산맥 언저리의 이 지역은 여전히 가 볼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 국토의 구석이다. 이종기 대표의 구상은 크고도 아름다웠다. 프랑스의 부르고뉴, 미국의 나파 밸리, 일본의 구마모토처럼 계곡마다 양조장들이 자리 잡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술을 빚는다면,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거친 술 문화를 바꿀 만큼의 세계적 명주가 생산된다면, 그건 단순히 풍경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저변을 개혁하는 의미 깊은 작업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와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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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탐독] 식물, 인간 그리고 가능성
큐가든과 카를로스의 추억
2008년 9월부터 2009년까지 나는 정원 디자인 학업을 중단하고 영국 왕립식물원인 큐가든에서 인턴 정원사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일했던 곳은 열대 식물 재배 온실(Tropical Nursery)인데, 이곳의 주된 업무는 전 세계 열대 우림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재배하고 보존하는 일이었다. 매일 온실에 도착해 씨앗에서 발아되어 손가락 한마디쯤 자란 열대 식물을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어 주거나, 벌레를 잡아 영양분을 보충하는 식충 식물에게 물을 주고, 사막 기후에서 자생하는 식물의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내가 하는 일을 관리·감독하는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들은 큐가든의 3년제 대학을 졸업한 식물·원예 전문가였다. 그중 한 사람이 스페인 출신의 카를로스(Carlos Magdalena)였다. 카를로스와는 매일 아침 회의가 있을 때 마주하고 그로부터 작업을 지시받기도 했다. 스페인어 억양이 강한 영어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그의 말에 더 많이 집중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은 원래 소믈리에 출신으로 레스토랑에서 일했고 큐가든에 들어온 후에는 멸종 위기의 식물을 다시 살려내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등의 수다스러운 대화가 추억으로 남아 있다. 1년 후 큐가든과의 인연이 끝나면서 그와의 인연도 끝인가 싶었다. 하지만 2017년 그의 책 『식물 메시아(The Plant Messeiah: Adventures in Search of the World’s Rarest Species)』를 영국의 어느 서점에서 만나면서 카를로스의 활약을 좀 더 깊게 알 수 있었다.
번식이 중단된 식물, 라모스마니아
카를로스의 책은 인도양의 섬 로드리게스에 자생하고 있는 멸종 위기의 식물을 큐가든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려냈는지에 대한 노력과 성공의 기록이다. 수십 제곱킬로미터 넓이의 산호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는 섬, 로드리게스는 지금도 산호 때문에 배로는 진입이 불가능해 비행기로만 착륙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 탓에 로드리게스 섬은 그간 외부 식물의 침입 없이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식물의 보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섬도 서방 세계와의 접촉이 생기면서 자생 식물이 자라던 숲이 사라지고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는가 하면, 도로가 발달해 자생 식물은 물론 그 식물을 터전으로 삶고 사는 동물의 멸종이 급속화되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식물의 멸종은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식물이 더 이상 씨앗을 맺지 않는 일이 먼저 발생한다. 식물의 보고였던 로드리게스 섬은 지금은 더 이상 번식을 하지 않는 식물이 즐비한 “죽은 생명체의 섬”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살아 있지만 번식이 끝난 죽은 식물 중 하나가 바로 카를로스가 살려낸 식물 라모스마니아(Ramosmania rodriguesi)다. 라모스마니아라는 식물이 과학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이 섬의 원주민이자 교사인 레이먼드 아키로부터였다. 평소에도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레이먼드는 자신의 학생에게 인근에 보이는 식물 채집을 과제로 시켰고, 이렇게 채집된 식물을 수업 시간에 활용했다. 식물의 학명을 확인하고 그 식물이 자라는 환경과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학생 중 한 명인 헤들리 매넌이 가져온 식물이 좀 이상했다. 로드리게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지만 식물의 속과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어떤 식물과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중략)...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 리틀 칼리지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정원생활자』,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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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스케이프] 칠면초의 숲
그야말로 기록적으로 뜨거운 여름입니다. 40도에 육박하는 온도가 이젠 그리 낯설지 않네요. 이 글을 읽으실 때는 좀 더위가 꺾였겠지요? 더운 여름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을까 해서 아주 잠깐 짬을 내 제부도를 찾았습니다. 한두 시간의 여유를 상상하고 찾은 바닷가지만, 역시 뜨거운 햇빛만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런.
제부도는 경기도 화성시에 속한 작은 섬인데, 썰물 때면 물이 빠지면서 육지와 연결되는 특이한 곳입니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데 물때를 놓치면 한참을 섬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바다도 바다지만, 사실 제부도를 찾은 건 최근에 여섯 개의 컨테이너를 쌓아 새로 만들었다는 제부도 아트파크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다를 향한 조망 장소와 전시 공간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더군요. 아트파크를 둘러볼 때 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구경을 마치고 나니 더위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끼게 됐습니다. 게다가 밀물이 되기 전에 나와야 해서 허둥지둥 서둘러야 했습니다.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도로를 따라 겨우 섬을 빠져나오니 그제야 주변을 가득 메운 빨간 색의 귀여운(?) 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칠면초. 칠면조 아닙니다!
칠면초는 바닷가에서 군생하는 붉은 색의 한해살이풀입니다. 군락을 이룬 칠면초를 멀리서 보면 마치 단풍이 물든 것 같은 모습인데 비현실적인 붉은 색 해변이 아주 장관입니다. 제부도 칠면초 군락은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둑길에서 아주 가까워서 몇 걸음만 내려가면 자세히 볼 수 있더군요. 가까이에서 본 칠면초는 군락으로 보일 때와 상당히 달랐습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가원조경, 도시건축 소도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경 계획과 경관 계획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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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더 스퀘어
공간과 비공간, 그 경계 더 스퀘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의 인터뷰로 영화가 시작된다. 전시와 비전시, 공간과 비공간 등 현대 미술에 대한 개념적이고 모호한 의미를 기자가 묻는다.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은 당황한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나요?” 미술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이냐는 첫 번째 질문에 단호히 ‘예산’이라고 대답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듬거리며 억지로 대답을 만들어내자 이해 못 한 표정이 역력한 기자는 잘 알았다고 얼버무린다.
설치 작품 ‘더 스퀘어(The Square)’는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Ruben Ostlund)가 2015년에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설치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더 스퀘어’는 이 작품을 매개로 만들어졌다. 작품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전면 광장에 설치된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전통적 외관의 미술관은 왕궁을 개조한 것으로, 그 자체로도 웅장하고 아름답다. 작품 설치를 위해 중앙에 있던 청동 기마상을 들어 올리자 기마상이 덜컹거리며 파손되는 장면은 두 시간이 넘는 긴 상영 시간 동안 벌어질 소동을 암시한다. 파상형으로 깔린 사고석 포장 위에 가로세로 4m의 사각형을 따라 포장 면을 커팅한 후 돌을 걷어 낸다. 같은 재료인 사고석을 선에 맞추어 다시 놓는다. 두 줄의 사고석 사이에 띠 조명을 설치하고 면을 다진 후 고르게 만든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공간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라는 해설판을 붙이는 것으로 공사가 마무리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크리스티안은 곤경에 처한 사람 누구나 스퀘어 안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애를 강조하려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전형적인 북유럽풍의 훤칠한 신사인 크리스티안은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크고 작은 어려움에 휘말린다. 출근길에 곤경에 처한 여자를 도와주다가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으로 문제가 시작된다. 지갑과 핸드폰을 찾기 위해 벌인 엉뚱한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고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팔려 전시 홍보 영상을 제대로 체크하지 못하고, 자극적 영상이 널리 퍼지면서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자 큐레이터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미술 작품을 설명하는 내용이 작품 자체보다 더 난해할 때가 많다. 과연 몇 명이나 그 의미를 알까라는 의심은, 이 영화를 보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예술을 구구절절 설명한다는 시도 자체가 어쩌면 난센스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