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하면 남들은 흔히 아름다운 산천에 실개천이 휘돌아가는 시적(詩的) 풍경을 들먹이지만 나는 갯벌의 비린내나는 선창가에 해풍(海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각(風角)과 궁(宮), 상(商), 각(角), 치(緻), 우(羽)의 오음(五音)으로 감별해도 변함없는 사방 네 모퉁이 바람이 촉감으로 나를 반겨주는 곳, 인천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잊고싶지 않은 고향속의 추억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이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런닝셔츠바람에 화수동(花水洞) 선창가 언덕배기 위에 옷을 벗어 던진후 밀물이 밀려오는 짠물속에 머리와 배를갯벌속에 깔고 미끄러져가는 스릴을 만끽하며 한여름을 시원하게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인천 시가지내엔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탑이 서있는데 이는 응봉산 전체를 공원화하여 조성한 만국공원의 맨꼭대기에 독일인 존스턴이 별장으로 조성한‘인천각’이라는 명물이 있었던 곳으로 나중에 호텔로 사용되다 6.25때 폭격을 맞아 사라진 곳이다. 이곳은 봄이오
면 온 산이 벚꽃으로 뒤덮이는데 꽃이 떨어진 지 20여일이 되면 버찌가 무르익는다. 인천공립상업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하교후면 벚나무에 올라가 버찌를 따먹곤 했는데 운이 없으면 공원관리자에게 그 자리에서 붙들려 벌을 서거나 실컷 따먹고 입술이 시퍼렇게 물든
채 공원길을 지나가다 붙잡혀 5~6시간씩 청소와 쓰레기 태우는 벌을 서기도 했다. 지금은 이곳에 인천항을 굽어보는 맥아더 원수의 동상을 건립하면서 자유공원으로 개칭,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공을 기리는 관광지는 물론 인천의 명소로도 유명해지게 되었다
인천’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바로 월미도인데 내가 어릴때는 월미도 입구에서 좌측으로 10분쯤 걸어 들어가면 바닷물을 가둔 해수욕장과 조탕이 함께 있었다. 이곳은 1년내내 실내에서 바닷물로 수영하고 바닷물을 뜨겁게 하여 만든 조탕에서 목욕할 수 있어 사람
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월미도의 산중턱에는 필자가 가장좋아하는 꽃사슴 5~7마리가 꽃사슴칸에 모여 있었고 이들과 조금떨어진 곳에는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본원숭이들도 있었다. 그 애교스런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월미도의 좁은 석축길을 따라 약1시간 가량 걸어 들어가면 월미도의 1/1000 정도 되는 섬이 나타나고 그 위에 하얀 등대가 보인다. 우리는 이 작은 섬이 보이는 곳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하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했다. 이 때의 우리들의 소풍은 하루종일 걸어다니는 것만도
마냥 즐거웠기에 월미도와 소월미도의 아련한 추억만으로도 생생한 지도를 그릴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월미도와 소월미도의 원형은 오간데 없고 월미도 산등성이만 미군기지로 남
아있으며 시장터나 부두가는 횟집과 놀이동산이 판치고 있는 모습으로 변질돼 버렸다. 바
다 이외엔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인천항의 명물인 갑문식 도크는 내가 중학교때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견학했던 곳으로 고향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인천항은 조석간만의 차가 극심한 관계로 전천후 하역작업이 어려워1911년 10월부터 10년 계획사업으로 제1 선거(船渠)가 시작되었
는데 이것이 인천항의 그 유명한 갑문식(閘門式) 도크로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 키워드: 인천, 화평동, 인천시 화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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