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으로부터
2021년 5월 처음 작성한 ‘설계경기 기록원 스코어러(scorer)’의 사업 계획 발표 자료 첫 페이지는 『환경과조경』 2001년 6월호에 게재되었던 만평으로 시작한다. 그림 속 “○○총국 현상설계”라는 현수막이 걸린 건물 옆에는 제출된 계획안들이 건물 높이만큼 쌓여 있다. 등 뒤에 출력된 계획안을 지고서 땀 흘리며 걸어오는 응모자는 지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프로젝트 규모가 적은데…”라고 말하지만, 건물 위에 선 사람은 웃는 얼굴로 “그래도 좀 더…”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림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아무리 다다익선이 좋다지만…”이라고 쓰여 있다.
당시 스코어러의 기획 의도와 문제의식은 대략 사반세기 전에 그린 만평에서 매우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문가들의 지적 생산물들이 일회적으로 소모됨으로써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만평 속의 땀 흘리는 응모자와 같이 영세한 소규모 설계사무소의 비용 부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다소간의 제출물 간소화가 이루어졌음에도 오히려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관련 법령의 개정에 따라 설계공모 시행 의무화 설계비 기준이 절반가량 하향되어 더 작은 규모의 공공 프로젝트까지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통계상으로 시행 건수는 약 2배 정도 증가했으며, 그렇게 늘어난 소규모 설계공모들은 경우에 따라 제출물을 쌓는 높이가 건물보다 높아지는 지점에 이르고 있다.
또 다른 원인은 심사의 표결 과정과 평가 사유서가 공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설계공모에서 소모되는 지적 생산물은 응모 작품뿐 아니라 그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포함한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심사 과정 공개 규정이 마련되었으나, 평가 대상 없이 수기로 거칠게 작성되어 공개된 서류들은 그 제도의 취지를 충분히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문제는 지난해 4월 설계공모 심사 과정 전체를 실시간 영상으로 송출할 것을 의무화함으로써 점차 심화되고 있다. 상당한 비용을 들여 심사 과정에 대한 방대한 영상, 음성 데이터를 생산하고 있음에도 그 가치가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만평으로 시작한 발표를 통해 결국 개발 자금을 확보한 스코어러는, 이처럼 일회성 사회적 비용으로 소모되는 전문가들의 지적 생산물을 다가올 공공의 장소를 만들어가는 데 활용하기 위한 서비스를 제작하는 소셜 벤처로 설립됐다.
* 환경과조경 435호(2024년 7월호) 수록본 일부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설계경기 기록원인 스코어러(www.scorer.co.k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건축 디자인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으며,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