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가의 기록법’이란 특집 제목을 보고, 떠올린 이미지는 조경설계를 가르쳐 준 선생님의 낡은 수첩이었다. 정확히는 수첩이 아니라 수첩 커버인데, 선생님은 매년 속지를 교체하면서 계속 쓰는 가죽 수첩 커버를 사용했다. 군데군데 손때 묻고 세월의 흔적이 담긴 수첩. 지금도 선생님은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면 그 수첩을 꺼내서 한두 문장 짧게 메모하곤 한다. 부끄럽게도 제자인 나는 기록에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 연초에 문득 드는 생각이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메모하고자 작은 수첩을 사곤 하는데, 연말에 펼쳐보면 깨끗한 백지가 절반이 넘는다. 하지만 텍스트 중심의 기록에 서툰 내게도 나름의 기록법은 있다. 바로 설계 작업의 중간적 기록인 드로잉이다. 이런 드로잉들은 좀처럼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게 완성된 공간의 사진이나 정제된 도 면들이 먼저 외부에 공개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질문에 답하기보다 자신만의 기록법을 묻는 4번 질문의 답인 드로잉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드로잉을 텍스트보다 많이 쓰는 편이며, 설계 초반 단계부터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용하는 기록 매체다. 크로키-콘셉트 플랜-플랜팅 플랜-플랜팅 스케치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설계 작업 기록이 그것이다.
4 크로키, 대상지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상상의 기록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직접 해설하며 연주하는 영상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음악은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It’s already started)”라고 말하며, 공중에서 맴도는 선율을 살포시 끌어당기듯이 건반 연주를 시작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 또한 새로운 대상지를 만난 순간, 비슷한 맥락으로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곤 한다. 대상지를 바라보며 그곳에 이미 어떤 장소가 펼쳐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이미 새로운 모습을 갖춘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는 풍경을 상상한다. 그리고 이내 그 순간의 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현장에서 빠르게 크로키로 그 장면을 기록한다. 크로키는 일반적으로 회화의 드로잉 기법 중 밑그림에 해당한다. 대강의 윤곽만 빠르게, 간결한 선으로 그려내는 기법인데 조경가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현장에서 느낀 감정을 글로 기록하기보다는 크로키 같은 빠른 스케치로 남기는 방식을 선호한다. 글로 적으려면 생각을 정제해 언어로 환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해서 긴 시간이 소요되지만, 크로키는 더 직관적이고 빠르다. 또한 생생한 감정과 구체적인 상(像)을 기록하기 쉽다. 크로키는 이런 면에서 대상지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상상의 기록이다.
콘셉트 플랜, 다양한 대안을 탐색한 발자취로서의 기록 최근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하는 말인데, 디자인은 결국 디자이너가 자기 이야기를 전달하는 행위이며, 그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디자이너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 매체 중 하나가 플랜이다. 플랜은 공간의 전체 구성과 배치, 나아가 서사적 흐름까지도 하나의 이미지 내에 종합적 시각 정보로 함축한다. 그래서 어떤 프로젝트에서 플랜의 변화 과정만 훑어보더라도 전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설계 스튜디오에서는 플랜의 기록을 중요하게 다룬다. 플랜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최종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로 작성한 것이든지 손으로 작성한 것이든지, 표현이 거칠든지 정교하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가급적 모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누군가에게 공개되는 최종 마스터 플랜이 나오기 전에 다양한 콘셉트 플랜이 작성된다. 콘셉트 플랜은 주요한 아이디어 중심으로 핵심 내용만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다수의 대안이 제시된 뒤 선택과 발전의 과정을 거친다. 마치 새로운 황야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남긴 발자국처럼, 콘셉트 플랜은 설계가가 프로젝트라는 여정 동안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간 흔적을 담은 기록물이다.
* 환경과조경 435호(2024년 7월호) 수록본 일부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정원과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17년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를 창업해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