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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김상환 방천골목오페라축제 추진위원장
골목에 만든 신세계
‘대프리카’의 화염이 본격화되기 전인 지난 6월, 대구의 한 평범한 골목이 밤마다 오페라로 물들었다. 슬리퍼 끌고 반바지 입고 나간 동네 길. 그 일상의 환경에서 만난 ‘카르멘’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누군가에게는 첫 경험일지도 모를 ‘투우사의 노래’와 ‘하바네라’는 강렬했다. 거리에 앉거나 선 사람들에게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배우들, 모든 자리가 R석이었다. 무대가 된 메타세쿼이아 나무와 주변의 무덤덤한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들이 그날따라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훌륭한 음향 반사판이었다. 차 없는 거리는 하늘로 열린 아레나였다. 화이불치華而不侈, 오페라 축제지만 사치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밤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은 아스팔트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카르멘’에 취했고, 우리의 상상은 어느덧 세비야의 골목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방천골목오페라축제는 그야말로 골목의 축제였다. 같은 콘텐츠라도 건물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오페라하우스 건설에 드는 뻑적지근한 비용을 고려하면, 왜 이제껏 골목이 오페라의 무대가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공연장 하나를 짓는 비용으로 방천골목오페라축제는 수백 년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베로나Verona가 2,000년 전에 지은 원형 경기장을 사용해 매년 도시 인구의 두 배에 달하는 50만 명을 끌어들이고 있는 예나,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레녹스Lenox의 탱글우드Tanglewood 잔디밭에서 벌어지는 유명한 클래식 음악 축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의 지방 도시 골목 오페라의 사업적 타당성과 미래는 무척 밝아 보였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3호(2017년 9월호) 수록본 일부
- 최이규 / 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 2017년09월 /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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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탐독] 이슬람 정원의 상징
문명의 발달과 정신
Civilization=Spiritual. 역사학자 엠마 클라크는 인류가 문명과 정신의 세계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함께 발전시켜 왔다고 말한다. 문명의 발달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단단히 움켜쥐고 흥망성쇠를 같이 해 왔다. 이 정신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종교다. 인류의 문명지마다 그들만의 종교가 발생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람은 쉽게 잊고 변형시키는, 한결같음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잊지 말고 끊임없이 기억하게 할 장치가 필요했고, 그것이 우리가 종교적 건물, 조각물, 예술품 속에 무수히 상징을 새겨놓은 이유기도 하다. 다시 말해 종교의 상징들은 ‘신이 여기에 있다’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 상징을 통해 변형되려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으라는 의미다.
유럽인들은 그들 정원의 정신적·디자인적 뿌리를 중동의 페르시아 정원으로 본다. 중동의 정원 문화를 수천 년 역사를 통해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동의 정원 역사를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 역사, 지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복잡다단한 지역인 중동을 몇 줄로 요약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개략적으로 본다면, 중앙아시아와 맞닿아 있는 지금의 이란 땅에서 발생한 고대 페르시아 문명과 이라크가 있는 아라비아 반도에 세워진 바빌로니아 왕국을 그 근본으로 볼 수 있다. 6세기 무렵 엄청난 변화가 생기는데, 바로 중동 전체를 종교의 힘으로 통합시킨 선지자 모하메드가 창시한 이슬람의 탄생이다. 물론 이곳에 처음부터 정원 개념이 발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략)...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환경과조경 353호(2017년 9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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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덩케르크
시공간의 확장과 압축
영화가 가진 특별함은 무엇일까? 서사를 전달하지만 소설과는 다르고 이미지를 보여 주지만 사진과는 다른 특별함. 그것이 궁금하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전 세계인에게 결과가 알려진 덩케르크 철수 작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시공간을 확장하거나 압축하여 상황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밀려 프랑스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다. 도버 해협만 건너면 영국 땅이다. 군사를 지원해도 번번이 실패하자 연합군은 기상천외의 작전을 세운다. 해변에 고립된 40만 명 가까운 아군을 탈출시키는 것. 실어 나를 배가 턱없이 부족하자 영국군은 민간인의 배를 징발한다. 작은 어선에서 초호화 요트까지 예상보다 많은 배를 모으고, 구축함과 함께 벌인 9일간의 대규모 철수 작전은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요약한 것이지 영화 줄거리가 아니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요즘 개봉한 좋은 영화들을 뒤로 하고 ‘덩케르크’를 한 번 더 봤다. 여러 편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가슴 졸이느라 놓쳤던 새로운 장면도 보이고 결과를 알고 보니 감동은 배가 되었다. 여름을 좋아하지만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게 느껴진다. 여름엔 역시 극장이 최고다.
*환경과조경353호(2017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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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도시의 잠복자들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최근 이 한 문구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원작자 김정민 씨가 과거 자신이 속한 인디밴드 앨범 표지에 썼던 이 문구가 점점 퍼지면서 유사 문구로 패러디되기 시작했고, 이어 현대백화점 유플렉스가 이를 홍보 문구로 사용한 것이다. 상업적 목적으로 해당 문구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원작자에게 사용 문의를 하거나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았다. 소규모 자영업자의 경우 그러려니 했지만, 대기업조차 출처도 밝히지 않고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해당 문구를 홍보와 매장 인테리어에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원작자는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자주 회자되는 어떤 무형의 것을 속담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유행어와 같은 공공재로 인지하고, 그것을 창작자의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얼마든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져다 쓸 수 있다고 생각한 데에서 비롯한 일이다. 어쩌면 누구든지 누군가의 창작물을 끊임없이 쉽게 퍼다 나를 수 있는 인터넷 문화가 한몫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최근에는 인터넷 게시물조차 원작자의 의지에 따라 배포 가부 여부가 결정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환경과조경353호(2017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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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쿨한 도시, 리스본
포르투갈의 도시는 우리에게 낯설다. 이 나라 어떤 도시에 대해서도 국내 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다룬 기억이 없다. 수도 리스본이나 제2의 도시 포르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사람도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다. 물론 단편적인 지식은 적지 않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브라질, 앙골라와 모잠비크, 인도 서부와 동티모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해양 강국이자, 알바로 시자라는 천재 건축가, 그리고 루이스 피구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세계적 축구 스타를 여럿 배출한 나라. 그럼에도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한 채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EU의 경제 열등생. 이런 단편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도시계획사 혹은 수도 리스본의 도시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빈약하기만 하다.
최근 리스본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기사 “어떻게 쇠락하던 리스본이 ‘쿨’한 도시로 거듭났나?”에서 리스본을 “힙hip하고 저렴cheap하고 혁신적인innovative” 도시로 표현했다. 지난 7월 AESOP 컨퍼런스를 계기로 직접 목격한 리스본도 놀라우리만큼 근사했다. 도시 전체가 패치워크처럼 얽힌 랜드스케이프 작품으로 읽힌다. 골목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포르투갈 전통 음악 파두fado는 시적 감성마저 불러일으킨다. 근사한 현재보다 가까운 미래에 더 찬란한 변화가 예견되는 곳, 로마 시대의 골목과 18세기의 도시 격자를 배경으로 젊고 생동감 있는 문화가 꿈틀대는 곳. 이와 함께 관광화, 명소화에 대한 우려가 교차하는 곳이 리스본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53호(2017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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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Skulptur Projekte 2017, 6. 10. ~ 10. 1.
2017년은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쿠멘타Kas sel documenta와 함께 10년마다 열리는 공공 예술 축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cte in Münster(이하 뮌스터 프로젝트)가 열리는 특별한 해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이한 뮌스터 프로젝트는 인구 30만 명밖에 되지 않는 독일 소도시, 뮌스터를 공공 미술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뮌스터는 전 세계에서 온 ‘매혹적으로 늙은, 짜릿하게 젊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뮌스터가 조각전을 넘어서 공공 예술 축제로 여겨지는 것은 그 시작과 특별한 전시 방법 때문이다. 사실 뮌스터는 예술 도시와 거리가 멀었다. 1975년에 뮌스터 시는 카셀 도쿠멘타에 출품된 헨리 무어Henry Moore의 작품을 공공장소에 설치하고자 했지만 빗발치는 시민들의 항의에 취소하게 된다.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헨리 무어의 작품도, 시민에게는 흉측한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대신 조지 리키George Rickey의 ‘세개의 회전하는 사각형Drei rotierende Quadrate’을 설치했지만 한층 더 추상적인 형태로 인해 논란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이에 주립 미술관장 클라우스 부스만Klauss Bussman은 시민들이 현대 조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묘안으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구상, ‘20세기 조각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전시를 열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53호(2017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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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조경디자인 캠프
놀이 도시-공공 공간의 유희적 역할
지난 7월 10일부터 21일까지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제24회 조경디자인캠프’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진행됐다. 이번 조경디자인캠프는 이유미 교수(서울대학교)가 교장을, 송영근 교수(서울대학교)가 교감을 맡아 ‘놀이 도시-공공 공간의 유희적 역할Ludic City-Playful Uses of Public Space’라는 주제로 이끌었다. 총 14개 대학 38명의 학생이 참여했으며, 각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다양한 맥락과 이용자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의 ‘놀이’를 분석하고 실험적 공간과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본격적인 스튜디오 진행에 앞서 4일간 전상인 교수(서울대학교)의 ‘시각도시에서 오감도시로’, 안영노 문화예술기획가의 ‘공공장소가 테마파크가 되는 방법’, 홍보라 디렉터(갤러리팩토리)의 ‘랜드스케이프 디자인과 공공미술: 새로운 가능성’, 이우향 사무국장(서울그린트러스트)의 ‘공원아 놀자!’, 양수인 대표(삶것 건축사사무소)의 ‘처음 들어 이상하지 않은 생각에 희망은 없다’ 등 특별 강연이 진행되어 ‘공공 공간의 유희적 역할’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학생들은 사례지 답사를 통해 주어진 대상지를 직접 분석하고 공공 공간이 어떤 유희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스스로 파악해나갔다. ...(중략)...
*환경과조경353호(2017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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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시상식
‘숲새마당, 사람 사이를 흐르다’ 대상 수상
지난 8월 23일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운영위원회는 문화역서울 284 RTO관에서 ‘제1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날 경희대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네 팀이 대상과 금상을 비롯해 본상을 수상해 이목을 모았다. 올해 신설된 지도교수상 역시 경희대학교의 서주환 교수에게 돌아갔다.
이번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의 공모 주제는 ‘광장의 재발견’이다. 그 어느 해보다 ‘광장’이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던 것을 고려해 ‘광장’을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 결과 총 77개 작품이 접수됐으며, 심사 결과 본상 16개 작품과 입선 13개 작품이 선정됐다. 대상은 이지현·김유진 팀(경희대학교)의 ‘숲새마당, 사람 사이를 흐르다’가 선정됐으며, 금상은 한지민·이은진 팀(경희대학교)의 ‘광장자리, 나누어 잇다’, 은상은 김관수·김자정·우진명 팀(동아대학교)의 ‘Be;울’과 김지한·최다영 팀(강원대학교)의 ‘연’이 수상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53호(2017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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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쿠드랴프카의 차례
변덕스러운 계절이었다. 몇 달간 에어컨 없이는 잠들 수 없는 폭염이 계속되더니, 몇 주 전부터는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볕더위도 끝인가 싶어 숨을 돌리는 순간 이번엔 습하고 뜨듯한 바람과 언제 내릴지 알 수 없는 소낙비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다. 어정쩡한 날씨 때문일까, 이맘때쯤이면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꼭 찾게 되는, 등골을 서늘하게 할 공포 영화나 소설이 생각나지 않았다. 납량 특집이라는 문구로 치장한 TV 프로그램에도 별 흥미가 생기지 않고, 악령에 씐 인형(악령이 들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괴기하게 생겼다) ‘애나벨’을 다룬 영화가 제법 재밌다는 이야기에도 극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이번 여름은 범죄 수사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검찰 조직 내부의 비밀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을 풀어 나가는 검사와 그 주변 인물을 다룬 드라마 ‘비밀의 숲’.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루는 사건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는 작은
사건들이 정교하고 촘촘하게 배열되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매회 새로운 증거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의심스러운 인물도 매번 바뀐다. 시시각각 변하는 등장인물들의 눈빛, 왠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손짓이나 행동들이 주인공 황시목 검사의 시선과 별개로 나만의 추리를 펼치게 했다. 너무 집중한 탓에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지막 회를 보고 난 뒤에는 ‘단짠단짠’의 법칙처럼 가볍게 즐기며 볼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든 『쿠드랴프카의 차례』, 요네자와 호노부 ‘고전부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빙과』,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쿠드랴프카의 차례』, 『멀리 돌아가는 히나』, 『두 사람의 거리 추정』 으로 구성된 ‘고전부 시리즈’에는 흔히 추리 소설의 소재로 사용되는 살인 사건이 없다. 대신 ‘왜 금요일마다 2학년 학생들이 돌아가며 같은 책을 대출하는 걸까?’, ‘책상 위에 올려둔 발렌타인 초콜릿이 어디로 갔을까?’ 등 일상생활 속 작은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엄청난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아니기에 긴장감은 덜 하지만, 덕분에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짬짬이 시간을 내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자극적인 소재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힘은 섬세한 심리 묘사에 있다. 일반적인 추리 소설이 범죄를 파헤치는 과정과 트릭에 집중한다면, ‘고전부 시리즈’는 범인이 사건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로 인해 초래된 씁쓸한 결말, 추리 과정에서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내면과 변화에 집중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빙과』에서 “안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간략하게”(각주1)를 주장하던 주인공이 스스로 귀찮은 사건에 뛰어드는 모습은 다섯 권이나 되는 시리즈를 후루룩 읽고 싶게 만든다. “무미건조한 학창시절도 괜찮다고 생각하던 소년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고교 시절이 좀 더 장밋빛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한층 성장한다. 지금 이 시절을 십 년 뒤에도 후회하지 않을 시간으로 만들려고 조금 더 노력하게 된다. 시간은 회색 토양에서 장미를 피우고, 추억을 아름답게 만든다. … 고전부원들이 『빙과』에서 찾아낸 진짜 진실은 그러한 깨달음이 아닐까.”(각주2)
『쿠드랴프카의 차례』는 ‘고전부 시리즈’ 중 치밀한 심리 묘사가 가장 돋보이는 편이다. 이야기는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학원제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호타로를 비롯해 고전부원들은 실수로 문집을 200부나 찍게 되어 골머리를 앓는다. 그리고 그 와중 각 동아리의 핵심 물품이 ‘쿠드랴프카의 차례’에 따라 도난당하는 ‘십문자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에 뛰어드는 등장인물의 모습들이 장마다 다른 시점으로 그려지는데, 이 과정에서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작은 에피소드들이 ‘열등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앞서 나가는 무네요시에 대한 지로의 열등감이 ‘십문자 사건’을 벌이게 했고, 아이코가 고전부원인 미야카와 말다툼을 벌인 이유는 자신의 작품이 결코 하루나의 작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웠기 때문이다. 매번 추리 대결에서 호타로에서 패배해 온 사토시는 이번에도 호타로보다 먼저 ‘십문자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한테 자신이 있을 땐 기대란 말을 쓰면 안돼. 기대란 건 체념에서 나오는 말이야”(각주3)라는 사토시의 대사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열등감에 시달려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전 편인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호타로에게 자신의 재능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하던 이리스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고전부 시리즈’는 2015년에 발간된 『두 사람의 거리 추정』을 끝으로 멈춰서 있다. 호타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했던 작가의 말을 믿으며,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작품인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을 읽어보려 한다. 제목처럼 달콤하고 시원해 늦더위를 날려줄 신선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를 바라며.
1. 요네자와 호노부, 권영주 옮김, 『빙과』, 엘릭시르, 2013, p.12.
2. 박현주, “해설, 장밋빛 추억은 시간의 조카”, 위의 책, p.254.
3. 요네자와 호노부, 권영주 옮김, 『쿠드랴프카의 차례』, 엘릭시르, 2014,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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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디지털 세상, 아날로그 취향
대학에 다닐 때, 학교 앞에는 작은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의 문에는 늘 흰색 대자보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 동아리의 약속 장소와 시간이 빼곡하게 적혀 있곤 했다. 삐삐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라, 어스름해질 무렵이면 누군가 메모판에 적어 놓은 약속 장소에 삼삼오오 모여들곤 했다. 지난밤에 적어 놓은 메모인줄 모르고 엉뚱한 술집에서 하릴없이 사람들을 기다린 적도 있다. 요즘 같으면 단톡방에 주소와 지도를 올리며 시간과 위치를 공지할 테니,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동아리에서 공연을 올릴 때면, 학교 앞 서점들은 단골 광고주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가의 작은 서점들이 대형 서점에 밀려 문을 닫기 시작했고, 몇몇 선배들은 학교 앞 서점을 살리기 위해 후원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학교 앞 서점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역ㆍ문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일종의 연대감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학교 앞 서점이 사라졌다. 나도 대형 서점에 포인트를 쌓기 시작했다. 출판 업계에 종사하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오프라인 서점보다 온라인 서점을 더 자주 이용하고, 때때로 아마존 같은 글로벌 온라인 서적 유통망을 이용하기도 한다. 여전히 종이책의 책장 귀퉁이를 접거나 밑줄을 그으며 보는 것을 선호하지만, 더 이상 종이책을 쌓아둘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여행갈 때 짐을 줄이기 위해 이북e-book을 구매하기도 한다.
200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긴 서점이라는 종로서적이 문을 닫았다. 이후 몇몇 대형 서점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서점을 제패하는 듯했다. 이미 오프라인 서점은 대형 쇼핑몰이나 영화관 등과 결합했고, 서점 내부는 문구류나 디자인 용품 매장과 카페가 큼지막한 공간을 차지하는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변모했다. 동네 서점에는 사망 선고가 내려진 듯했다. 디지털 세상에서 종이책이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즘 소위 핫한 동네에는 어김없이 작은 서점들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독립 서점에서는 대형 서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독립 출판사의 책들을 볼 수 있다. 책방 주인의 관심사에 따라 서점마다 다른 색깔의 책들이 모여 있고,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해주는 서점도 있다. 홍대 주변이나 이태원에는 연예인이나 아티스트가 서점을 열고 책을 큐레이팅하기도 한다. 내가 사는 망원동에도 작은 동네 서점이 서너 개는 되는 것 같다. 이런 책방들은 핫한 장소로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 등에 소개되기도 한다. ‘길’들이 인기 있자 서울시에서는 최근 책방길 11선(망원, 홍대앞, 연남, 이대앞, 해방촌, 이태원, 경복궁, 종로, 혜화, 관악, 강남)을 홍보하고, 책방길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역대 최대 규모로 흥행했다는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20여 개 독립 서점이 참가했다. ‘서점의 시대’라는 기획전을 통해 작은 서점들은 독자의 마음을 잘 읽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각주1)
물론 이러한 작은 서점들이 대형 유통망이 쥐고 있는 헤게모니를 가져올 수 있다거나, 하다못해 ‘생존’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종이책과 서점이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는 요즘, 책을 파는 작은 공간에 대한 관심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사실은 선택지가 줄어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욕구를, 작은 공간에서 면대면 접촉을 통해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지역을 토대로 한 유대감, 혹은 세련된 취향을 공유하고 독특한 문화를 소비한다는 만족감이 덧붙여지지 않을까.
비단 책과 서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지드래곤이 USB 앨범을 내면서 ‘이것이 음반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레코드판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디지털에 비해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이 다시 자라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같이 아날로그를 파괴한 디지털 테크놀로지 업계 종사자들은 “낮에는 코딩을 하지만 밤에는 LP레코드판을 모으고 수제 맥주를 만들고 보드게임을 하고 낡은 오토바이를 수리”한다.(각주2)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디지털 라이프가 일반화된 오늘날 아날로그가 다시 유행하고 있는 현상은 일부 힙스터에게 국한된 일시적인 트렌드나 노스탤지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훨씬 더 잘하는 영역에서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종이책/잡지 출판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디지털 콘텐츠를 판매해 돌파구를 찾으라고 권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많은 출판사, 매체들이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콘텐츠를 생산하거나 종이책을 디지털화했지만, 아직까지 명백한 성공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아니 투자비를 회수하거나 뚜렷한 수익을 낸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다. 일례로 한때 태블릿 PC용 전자 잡지가 만들어져서 시장의 변화를 예고했지만, 지금은 태블릿 PC 자체의 인기가 시들하다. 하지만 이것이 국내에 한정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양한 사례를 수집한 데이비드 색스는 전자책의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음악 업계에서 MP3가 했던 일을 출판 업계에서 전자책이 해낼 거라는 섣부른 예측은 점차 빗나가는 듯하다”고 평가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읽는 것과 종이 매체를 읽는 경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날로그의 반격』에서는 「뉴욕타임스」를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에 비유한다. 하이퍼링크나 경쟁 신문들에 의해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환경에서 읽기 때문이다. “종이에 인쇄된 뉴욕타임스를 읽는 것은, 세상의 나머지 소식들을 함께 전달하는 디지털 플랫폼에서 뉴스를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종이로 만든 조경 잡지를 보는 것은 디지털 콘텐츠와 비교해 어떤 장점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우선 배터리 잔량이나 와이파이 연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로딩을 기다리지 않고도 손으로 훌훌 넘겨가며 고해상도 사진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두면 인테리어 효과도 훌륭하다. 그리고 마치 책방 주인이 권해주는 책을 읽듯이, 수많은 정보 중에 엄선되어 잘 배치된 콘텐츠를 보면서 만족감을 얻을 수도 있다. 혹시 자신의 글이나 작품이 실렸다면, 남에게 선물하기도 좋다. 물론 디지털 콘텐츠라면 링크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이 잡지에는 쉽게 휘발되지 않는 물리적 실체가 주는 ‘진짜’라는 느낌이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한 달 한 달 종이 잡지를 만들다보니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을 일시적 트렌드가 아니라 균형을 찾아가는 현상으로 읽고 싶어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요즘이다.
1. 이대희, “서울국제도서전 성공의 의미는?”, 프레시안 2017년 6월 30일.
2. 데이비드 색스, 박상현ㆍ이승연 옮김, 『아날로그의 반격: 디지털, 그 바깥의 세계를 발견하다』, 어크로스, 2017. 이하 모두 같은 책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