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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인 경관속에서
    우리가 경관을 얼핏 보고 느기끼에는 변화가 없는 정적인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재의 경관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경관 구성인자들이 끊임없이 변화되어 온 것임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경관이란 갑자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부터 현재를 지나서 미래로 연속하는 일련의 과정속의 한 순간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경관이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시간성 때문에 특징적인 경관이 되는 것을 역사적 경관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경관은 오늘날의 도시경관처럼 수 년이 멀다하고 몰라보게 달라지는 경관도 아니며 일시에 창조할 수 있는 경관도 더구나 아니다. 역사적 경관의 중요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경관은 그 시대의 인간사회의 특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경관의 형성은 그 시대의 문화적 특셩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경관속에서 우리는 우리들 선조들의 우수한 문화적 특질들을 느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로 여겨진다. ※ 키워드 : 경관, 역사, 문화, 특성, 변화, 역사적경관 ※ 페이지 : 90
    • / 1985년06월 / 9
  • 샤모니의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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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5년06월 / 9
  • 인간거주 환경과 과학기술의 과학만박 - 쯔쿠바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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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5년06월 / 9
  • 돌과 함께 사는 사람 - 정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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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5년06월 / 9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한강개발과 환경변화
    도시는 강을 끼고 있을 때 한층 그 겨관이 돗보여지고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강 기슭에서 바라다 보는 저 건너 거리의 풍경은 그처럼 아늑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이때문에 프랑스의 파리를 찾았던 사람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세느강을 잊지 못한다. 유럽에서도 가장 멋진 도시적 센스가 넘쳐 흐르는 곳이 바로 세느강이기 때문이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지만 풍부한 물은 깨끗하기만 하다. 강 양쪽 기슭에는 주요한 기념비적 건물인 노틀담사원 루불박물관 에펠탑 등이 줄비하게 늘어서 있고 다리의 훌륭한 디자인 또한 건축적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유람선들, 거기에는 어린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과 관광개그로 늘 붐비고 있고 유람선의 고동소리와 함께 세느강은 줄거운 회유공간이 되고 있다. ※ 키워드 : 한강, 세느강, 환경, 물 ※ 페이지 : 36 ~ 39
    • / 1985년06월 / 9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한강의 어제와 오늘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나라를 지배한다는 말은 옛부터 있어 온 말이다. 그래서 삼국시대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다. 한강을 가장 늦게 나라로 자리잡은 신라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뒤에도 한강을 빼앗기 위한 세나라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악착같이 한강을 지킨결과 풍부한 물적자원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당나라로 가는 길까지 열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니,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나라를 차지한다는 말은 이미 옛날에 사실로 나타난 셈이다. - 일찍이 한강은 중부와 동부 산악지대를 서울로 잇는 큰 물길이였으니, 이미 고려조 공양왕때 한강에 수첩을 설치한 것만 보아도 나라에서 이 강을 산업로로서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때부터 한강 곳곳에 창을 설치,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조세로 징수한 적곡을 저장하였다가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하고, 또 서울에서는 거꾸로 어물이며 소금, 그밖의 생활 필수품을 배어 실어 한강 상류 각 고장으로 날랐다, 한강 곳곳에 소금배에 얽힌 노래, 서울로 가는 적곡을 실은 배를 털던 강도들 이야기 따의가 많이 남아 있는것도 이래서이다.- 한강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역시 뗏목이었다. 떼에는 궁궐떼, 가재목떼, 편목떼, 화목떼가 있었다. 궁궐떼, 가재목떼는 건축용 상질의 재목으로서 12자가 넘는것이 허다했으며, 하질의 편목떼나 화목때도 여섯자는 실히 되었으며, 상질 화목의 떼를 타는 쪽이 품삯이 더 높은 것은, 더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더욱이 한강은 의암댐, 소양댐, 청평댐, 팔당댐, 충주댐 등으로 뗏목이니 소금배 커녕 꼴이 아예 바뀌고 말았다, 댐을 막을 강 유역에는 엄청나게 큰 육지 속의 바다가 생겨, 가령 소양호나 충주호는 배를 타고 백리를 훨씬 더 가야 끝에서 끝을 갈 형편이 되었다. - 문제는 소양댐, 춘천댐, 팔당댐 등으로 해서 몇 천의 자연부락이 물에 잠겼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느나는 눈에 보이는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삶의 모습, 삶의 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당장의 삶의 터전을 읽는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문화란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땀과 때로 얼룩지는 역사적 쌓임이기 때문이다. 양수리에서 팔당에 이르는 강유역 20리는 특히 선사시대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던 지역이다, 그것이 연구되지도 않은채 물 속에서 잠기고 말았다. 팔당댐을 만들 때, 이댐이 가동하게 되면 선사시대의 유적들은 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을 먼저한 것은 우리나라 사학자도 아니였으며, 댐관계자들은 더욱 아니였다. 부끄럽게도 그것은 댐을 만들기 위해 와서 일하고 있던 외국 기술자였던 것이다. ※ 키워드 : 한강, 한강의역사, 댐, 물길, 뗏목, 자연※ 페이지 : 26 ~ 29
    • / 1985년06월 / 9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하천과 도시
    하천은 인류문명을 탄생시킨 곳이고 꽃을 피워온 터전이다. 물을 먹지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여지겠지만 하천은 그자체가 교통수단이 없고 생존을 위한 자양분이였다. 나일강이라는 연장900km, 폭, 20km의 계곡을 따라 이집트문명이 발상하였고 타이그리스와 유프라데스강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인더스강이 인더스문명을, 황하가 중국문화의 발상지였음을 부연할 필요는 없다. 로마문명이 티베르강을 낀 일곱의 언덕에서 자리잡았다면 중세에 들어와 베네치아는 거미줄 같은 도하의 산물이었다. 런던의 테임즈강이 그러하고 파리의 세느강이 그러하다. 합스부르그도조가 만든 위대한 도시 비엔나는 도나우강이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서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평양, 부여, 개성, 한양 모두가 한반도를 흐르고 있는 대하천을 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도시의 형성과 하천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를 흐르고 있는 하천을 도시의 일부로서 어떻게 가꾸고 지혜롭게 이용했느냐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 키워드 : 하천, 한강, 물, 도시, 문화, 강 인류문명, 역사 ※ 페이지 : 40
    • / 1985년06월 / 9
  • 콘크리트숲속의 정원
    녹지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간은 토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토지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고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하게 된다. "정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도 에덴동산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도시만은 그런 즐거움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미국의 도시는 밀도가 매우 높아져서 쓰레기가 덮인 빈터나 주차장이 유일한 오픈 스페이스인 경우가 많다. 루이스멈포드는 "매트로폴리스의 중심지로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계획가는 도심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고 말했다. 한동안 뉴욕시 특히 맨하탄 중심부가 이런 경향에 앞장을 섰다. 아마도 이처럼 광선과 공기를 차단하는 마천루로 뒤덮인 도시는 또 없을 것이다. 약 20여년 전 이런현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전 CBS 국장인 윌리암에스팔레이는 이 건물군의 중심에 사람들이 수시로 앉아서 즐길 수 잇는 오픈스페이스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팔레이는 대도시의 한가운데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공원을 세우고자 했다. 그정원은 전형적 의미의 정원 즉,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나무를 심은 오아시스 였다. 그리고 이 공원은 공해물질 속에서도 항상 푸르름을 유지해야 했다. ※ 키워드: 콘크리트, 정원, 녹지공간, 에덴동산, 도심, 대도시. 나무, 토지, 숲속 ※ 페이지 : 76 ~ 79
    • / 1985년06월 / 9
  • 정원기행 ; 평창동 P씨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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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5년06월 / 9
  • 우리들의 얼굴 간판
    낯설은 동네에 가서 남의 집을 찾느라고 길을 헤메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패들이 왜 이리 작은가' 하면서 짜증스러웠던 적이 있었을는 지 모르겠다, 개인주택의 문패도 말하자면 일종의 간판인데, 그 손바닥만한 크기의 문패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집을 찾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든 가정집이 한결같은 크기의 문패를 걸고 있는 것은 모든사람이 집안의 사정을 특별히 밖에 알릴 필요도 없고 알리고 싶어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고작해야 우편물 정도를 받기위해 이름석자를 적어 내다걸면 그 뿐인 것이다. 또한 몇십년씩 한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관공서나, 거대한 빌딩을 가진 대기업체의 사무실들도 일의 규모나 건물크기에 비해서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점잖은 간판을 달아놓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고보면 적어도 개인주택이나 관청 또는 대기업의 사무용건물들에서는 간판이 도시경관에 관련되어 말썽이 된 적은 없었다. ※ 키워드: 간판, 문패, 이름, 가정집 ※ 페이지 : 86 ~ 91
    • / 1985년06월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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