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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한강개발과 환경변화
    도시는 강을 끼고 있을 때 한층 그 겨관이 돗보여지고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강 기슭에서 바라다 보는 저 건너 거리의 풍경은 그처럼 아늑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이때문에 프랑스의 파리를 찾았던 사람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세느강을 잊지 못한다. 유럽에서도 가장 멋진 도시적 센스가 넘쳐 흐르는 곳이 바로 세느강이기 때문이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지만 풍부한 물은 깨끗하기만 하다. 강 양쪽 기슭에는 주요한 기념비적 건물인 노틀담사원 루불박물관 에펠탑 등이 줄비하게 늘어서 있고 다리의 훌륭한 디자인 또한 건축적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유람선들, 거기에는 어린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과 관광개그로 늘 붐비고 있고 유람선의 고동소리와 함께 세느강은 줄거운 회유공간이 되고 있다. ※ 키워드 : 한강, 세느강, 환경, 물 ※ 페이지 : 36 ~ 39
    • / 1985년06월 / 9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한강의 어제와 오늘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나라를 지배한다는 말은 옛부터 있어 온 말이다. 그래서 삼국시대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다. 한강을 가장 늦게 나라로 자리잡은 신라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뒤에도 한강을 빼앗기 위한 세나라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악착같이 한강을 지킨결과 풍부한 물적자원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당나라로 가는 길까지 열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니,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나라를 차지한다는 말은 이미 옛날에 사실로 나타난 셈이다. - 일찍이 한강은 중부와 동부 산악지대를 서울로 잇는 큰 물길이였으니, 이미 고려조 공양왕때 한강에 수첩을 설치한 것만 보아도 나라에서 이 강을 산업로로서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때부터 한강 곳곳에 창을 설치,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조세로 징수한 적곡을 저장하였다가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하고, 또 서울에서는 거꾸로 어물이며 소금, 그밖의 생활 필수품을 배어 실어 한강 상류 각 고장으로 날랐다, 한강 곳곳에 소금배에 얽힌 노래, 서울로 가는 적곡을 실은 배를 털던 강도들 이야기 따의가 많이 남아 있는것도 이래서이다.- 한강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역시 뗏목이었다. 떼에는 궁궐떼, 가재목떼, 편목떼, 화목떼가 있었다. 궁궐떼, 가재목떼는 건축용 상질의 재목으로서 12자가 넘는것이 허다했으며, 하질의 편목떼나 화목때도 여섯자는 실히 되었으며, 상질 화목의 떼를 타는 쪽이 품삯이 더 높은 것은, 더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더욱이 한강은 의암댐, 소양댐, 청평댐, 팔당댐, 충주댐 등으로 뗏목이니 소금배 커녕 꼴이 아예 바뀌고 말았다, 댐을 막을 강 유역에는 엄청나게 큰 육지 속의 바다가 생겨, 가령 소양호나 충주호는 배를 타고 백리를 훨씬 더 가야 끝에서 끝을 갈 형편이 되었다. - 문제는 소양댐, 춘천댐, 팔당댐 등으로 해서 몇 천의 자연부락이 물에 잠겼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느나는 눈에 보이는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삶의 모습, 삶의 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당장의 삶의 터전을 읽는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문화란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땀과 때로 얼룩지는 역사적 쌓임이기 때문이다. 양수리에서 팔당에 이르는 강유역 20리는 특히 선사시대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던 지역이다, 그것이 연구되지도 않은채 물 속에서 잠기고 말았다. 팔당댐을 만들 때, 이댐이 가동하게 되면 선사시대의 유적들은 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을 먼저한 것은 우리나라 사학자도 아니였으며, 댐관계자들은 더욱 아니였다. 부끄럽게도 그것은 댐을 만들기 위해 와서 일하고 있던 외국 기술자였던 것이다. ※ 키워드 : 한강, 한강의역사, 댐, 물길, 뗏목, 자연※ 페이지 : 26 ~ 29
    • / 1985년06월 / 9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하천과 도시
    하천은 인류문명을 탄생시킨 곳이고 꽃을 피워온 터전이다. 물을 먹지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여지겠지만 하천은 그자체가 교통수단이 없고 생존을 위한 자양분이였다. 나일강이라는 연장900km, 폭, 20km의 계곡을 따라 이집트문명이 발상하였고 타이그리스와 유프라데스강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인더스강이 인더스문명을, 황하가 중국문화의 발상지였음을 부연할 필요는 없다. 로마문명이 티베르강을 낀 일곱의 언덕에서 자리잡았다면 중세에 들어와 베네치아는 거미줄 같은 도하의 산물이었다. 런던의 테임즈강이 그러하고 파리의 세느강이 그러하다. 합스부르그도조가 만든 위대한 도시 비엔나는 도나우강이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서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평양, 부여, 개성, 한양 모두가 한반도를 흐르고 있는 대하천을 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도시의 형성과 하천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를 흐르고 있는 하천을 도시의 일부로서 어떻게 가꾸고 지혜롭게 이용했느냐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 키워드 : 하천, 한강, 물, 도시, 문화, 강 인류문명, 역사 ※ 페이지 : 40
    • / 1985년06월 / 9
  • 한강 어떻게 살릴 것인가? ; 생태학적측면에서의 한강
    1. 한강에 갯지렁이가 몰려오고 있다.서울의 한강에서 갯지렁이가 서식한다고 하면 서울의 시민들은 놀랠 것이다. 그것도 민물 지렁이가 아닌 바다에서 서식하는 갯지렁이인 것이다. 필자가 1980년 12월 겨울부터 한강에 서식하는 조류의 생태 및 종류룰 조사하던 중 1983년 9월 7일 오후 5시경 한강의 난지도에서 갯지렁이가 발견되었다. 이사실은 생물 생태계의 연쇄의 군집상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강에 이제까지 없던 갯지렁이와 갈매기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동안 많은 생물이 찾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몰려 온다는 증거이다. 갯지렁이를 좋아 하는 물고기, 물고기를 좋아하는 오리루, 논병아리류, 도요류, 갈매기류는 생태학적으로 볼 때 상관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2. 한강 개발은 자연의 섭리에 맞추어 개발해야 할 것이다.최근에 마포 대교 부근에서 많은 낚시꾼들을 보게 되는 이유도 갯지렁이가 많아짐과 때를 같이 해서 보게 되는 이유도 갯지렁이가 많아짐과 때를 같이 해서 물고기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즉 갯지렁이의 서석밀도에 따라서 물고기를 비롯한 모든 생물의 판도를 변화시킬 것이다.3. 한강에 찾아오는 조류는 118종1960년 초인 4월 서울 한강의 생태적인 환경은 대부분 갯벌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단 교각 부터 하류인 여의도 밤섬까지는 거의가 철새 도래지로써의 좋은 환경이었다.4. 결론지금까지 60년대 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한강은 많은 변화를 가져 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야생동물에게는 더 말할나위도 없는 것이다. 매년 행정적으로 여려가지고 한강이 변화 변모하고 있는 대신 여깃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등동물인 원생동물에서 고등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조류에 이르기 까지도 즉 생태변화에 따른 생물의 군집상도 시시각각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 키워드 : 한강, 갯지렁이, 물고기, 조류, 생태학적, 생태계, 생태변화, 갈매기, 자연※ 페이지 : 46 ~ 49
    • / 1985년06월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