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치의 혁신
Column: Value Innovation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과 회원국, 그리고 전 세계인들의 미래에 대한 값지고 귀중한 통찰!”이라고 극찬한 베스트셀러 『유엔미래보고서 2045』에 따르면, 조경사는 의사, 약사와 함께 로봇으로 인해 멀지 않은 미래에 소멸될 직업이다. 무인 자동차의 등장으로 운전기사와 집배원이 사라지고, 드론의 활약으로 택배기사와 음식 배달원도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또 3D 프린터의 등장은 목수와 건축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언론 기자와 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교사 등의 직업도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평균 수명 130세 시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고 인간은 종교로부터 멀어진다. 얼굴도 인간과 똑같고 지능도 인간보다 뛰어난 로봇과 휴머노이드가 등장해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인간은 일자리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긴다. 기후 변화는 인류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로,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화석 연료를 대신할 새로운 에너지를 찾는 개인과 기업이 미래의 헤게모니를 쥐게 될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예측하고 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한 조경 분야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유망 직업으로 살아남기 위해 조경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가치의 혁신’이 필요하다. 지난 건설 호황기 시절의 아날로그적인 조경의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환경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점점 높아질 것이고 건축, 임업, 원예 등과의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므로 소위 ‘노가다’ 시공이나 ‘도면 공장’ 같은 설계 방식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제조업과 같은 전통 산업도 지식 기반을 고도화하지 않을 경우 날로 치열해져가는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고 있는 실정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코닥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애플의 아이폰으로 최강 노키아가 무너졌다. 반대로 일본의 유니클로가 방한복은 두꺼워야 한다는 상식을 파괴하고 얇고 다양한 색상의 ‘후리스fleece’를 개발해 최고의 패션 기업이 된 것은 가치 혁신의 성공 사례다. 매킨토시 같은 고가 사양의 컴퓨터에만 집중하던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복귀 이후 과거의 아집을 버리고 고객층을 폭 넓게 끌어들일 수 있는 아이팟 같은 대중적 상품을 만들고 기술 집착증에서 벗어나 CDO(최고디자인책임자)라는 직책까지 두며 개방적 협력을 통해 성공한 사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조경 분야도 노동 집약적 성격이 강했던 과거의 산업적 구태를 벗고 글로벌 경쟁자들이 모방하기 어려운 차별적인 디자인, 기술력, 경영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한다.
‘가치의 혁신’을 위해서는 조경을 넘어 다른 분야와 협력하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 현대 사회는 엘빈 토플러가 주창한 제3의 물결(과학 기술 및 정보화 시대)을 넘어 제4의 물결, 즉 융합의 시대를 향하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활발하게 소통하고 각국의 경제 체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글로벌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에서 알 수 있듯이, 지구촌 한편에서 일렁이는작은 물결이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모든 전문 분야는 새로운 영역에서 보다 혁신적인 방식으로 경쟁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ASLA(미국조경가협회)는 “조경은 협업이 강조되는 분야”라고 전망한다. 조경은 건축, 도시설계, 엔지니어링은 물론 시각 디자인이나 의상 디자인과도 협력하고 있고 그 중심에 프라임 컨설턴트prime consultant로서 조경가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조경가 제임스 코너James Corner를 중심으로 건축가와 엔지니어가 공동으로 작업했던 뉴욕의 하이라인 프로젝트가 좋은 사례다. 타 분야와의 컨버전스를 통해 영역을 확장하고 상호 협력하고 상생하는 전략적 제휴가 필요한 시점이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조경계는 건축과 임업 등 다른 분야의 도전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서울역고가를 공원화하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나 철거된 옛 국세청 별관 지상·지하 공간을 공공 공간으로 전환하는 ‘세종대로 역사문화공간 설계공모’ 등은 조경가가 앞장서야 할 프로젝트였음에도 건축가들만의 화려한 잔치로 끝났다. 조경계와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산림청의 약속을 믿고 ‘수목원ㆍ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제정에 동의했던 조경계는 건설기술자 조경 직무에 산림과 원예 관련 자격이 포함된 ‘건설기술자 등급 인정 및 교육·훈련 등에 관한 기준’이 이미 지난 6월 30일부터 시행되고 있다는 황당한 소식 앞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지키기에만 매달리는 수성 전략을 버리고 오히려 다른 분야와 협력하여 상생을 모색하는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다. 산림청이나 환경부와의 오래된 갈등을 풀고 산림청 일이든 환경부 일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다변화와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 조경계의 미래를 보장하는 길은 내부 구성원의 협력과 단합에 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한 결속력과 통합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긴급한 외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환경조경발전재단의 공동이사장제 논란으로부터 비롯된 관련 학회와 단체의 갈등은 조경계에 불어 닥치고 있는 연이은 업역 침해에 선제적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을 해결하는 것도 벅찬 상황이다 보니 미래에 대한 준비는 기대하기조차 힘들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조경의 미래를 위해 권위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필요하다면 조경 분야를 대표하는 통합된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정비할 필요도 있다. 이제라도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 한국 조경의 미래를 위한 체계적인 전략을 세우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조경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정원을 산림청이 가져갔다고, 조경 설계공모를 건축에 빼앗겼다고 더 이상 원망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ASLA는 조경가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조경가는 지역 사회와 소통하여 건강한 도시를 만들 수 있으며, 각종 질병과 범죄로부터 안전한 도시, 지속 가능하고 보다 경제적인 도시를 만들 수 있다. 보다 건강하고 경제적이며 경쟁력 있는 도시 조성의 중심에 조경가가 있다는 점이야 말로 조경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에디토리얼] 마감
Editorial: Deadline
마감을 며칠 앞둔 편집실, 출품 전야의 설계실 못지않은 전쟁터 풍경이다. 지면 배열의 수정, 서너 차례 반복되는 원고 교정과 교열, 편집 디자인 수정과 보완이 복합적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내부 원고도 뒤늦게 생산된다. 이어지는 야근과 철야는 문제도 아니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최종 데드라인까지 외부 필자의 원고가 도착하지 않을 때다.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한계선에 임박해 필자들의 원고를 챙기다 보면 편집자들의 “혼이 비정상”이 되곤한다.
고백하자면 아마추어 편집주간도 혼돈의 마감 풍경에 한몫 톡톡히 한다. 매달 거의 제일 마지막으로 디자이너에게 넘어가는 원고가 A4 두 장이 채못 되는 이 에디토리얼 원고다. 편집된 잡지 전반을 다 검토하고 뭔가 아우르며(?) 쓰겠다는 심산이지만, 잡지 첫 쪽에 등장하는 데 대한 부담감, 글감의 고갈에 따른 막막함, 고질적인 게으름, 이 셋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결과라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할 것 같다. 한해를 마감하는 12월호이니 이번 달만큼은 제 시간에 끝내는 모범을 보이겠다고 작심했다. 그러나 순백색 모니터를 마주하니 갑자기 연말의 멜랑콜리가 몰려오고 창밖에는 열흘째 가을비가 내리고 서울광장의 물대포에, 파리와 레바논의 테러에, 케냐의 학살까지, 핑계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무래도 이번 달도 문을 닫는 원고가될 것 같다.
필자 입장에서도 마감 시한의 압박감은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고통 그 이상이다. 영어로는 데드라인, 참 무시무시한 단어다. 글쓰기의 스타일이 모두 다르듯 “마감에 임하는 필자들의 태도”도 천차만별이다. 자칭 “야매 출판인” 김홍민이 출판계의 속사정을 다룬 책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어크로스, 2015)를 보면, 여러 필자들의 다양한 마감 타입이 소개되어 있다. 첫째 유형은 ‘모범생형’. 마감을 칼같이 지키는 필자, 모든 편집자의 로망이다. 심지어 마감일 하루나 이틀 전에 원고를 보내와 감동을 선사해 준다. 『환경과조경』의 연재 필자 중에도이런 분들이 몇 명 있다. 심지어 일주일 전에 주는 분도 있다. 둘째는 마감을 지키지않았지만 도리어화를 내며 담당 편집자를 당황하게 하는 ‘적반하장형’. 유명 필자와 초보 편집자 사이에서 이런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물론 『환경과조경』 필자 중엔 이런 분이 없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잠수형’ 필자가 등장하는 경우는 있다. 세 번째 유형은 ‘천리안형’이다. 편집자는 원고를 청탁할 때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마감일을 당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안전핀도 잡지사의 생리를 잘 아는 베테랑 필자들에게는 소용없다. 그들은 언제가 진짜 마감일인지 뻔히 알고 있다. 『환경과조경』에도 이런 유형의 노련한 필자들이 여럿 계시다. 그들과의 줄다리기는 즐거운 게임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읍소형’이 있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가 마감이 한참지나 독촉 문자, 메일, 전화를 하면 그제야 아직 못쓴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타입이다. 그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환경과조경』 편집자들을 붙잡고 또 어떤 마감 스타일이 있는지 취재해 보니, ‘연쇄살인형’도 있다고 한다. 며칠 사이에 연달아 가족이 아프고 친구가 사고를 당하고 스승이 돌아가시는 유형. 거의다 썼다, 이제 곧 끝난다고 계속 연락이 오지만 결국엔 맨 꼴찌로 마감하는 ‘철가방형’도 있다. 언제 쓴다고 했냐고 되묻는 ‘기억상실형’, 몸이 너무 안좋다고 하소연하는 ‘동정유발형’, 이제 절필한다는 ‘은퇴형’도 있다. 밤을 새워 다 썼는데 컴퓨터 바이러스에 날아갔다는 ‘목수 연장 탓하기형’도 드물지 않다. 17년 경력의 베테랑 남기준 편집장에 따르면, 마감에 얽힌 인생 최고의 추억은 인쇄소로 넘기기 직전 절체절명의 심야에 캔맥주 식스팩을 들고 편집실에 쳐들어와 편집자와 함께 밤을 새우며 원고를 쓴 어느 필자라고 한다. 듣다보니, 아뿔싸,몇 년 전 나의 행각이다. 도대체 무슨 형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마감에 속이 타고 피가 마르는 강도는 편집자보다 필자의 경우가 더 셀 것이다. 2015년 과월호 열한 권을 다시 펼쳐보니 여러 필자들의 분투가 새삼 피부에 와 닿는다. 그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연재 필자들의 노력과 인내에 깊이 감사드린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것이 일상을 감옥에 가두는 일임을, 불안과 초조의 늪으로 자신을 내모는 일임을.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잡지 리뉴얼 이후 2년간 연속된 최이규 교수의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가 막을 내린다. 사실 이 연재 인터뷰는 2013년에도 조금 다른 이름의 꼭지로 실렸으니 그는 3년간 무려 35명의 해외 디자이너와 매달 이야기를 나눈 강행군을 펼쳐온 것이다. 편집부의 도움 없이 뉴욕에서 홀로 기획과 섭외부터 인터뷰와 기사 작성까지 모두 담당했다. 김세훈 교수의 연재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도 이번 달에 최종회가 실린다. 다른 어느 원고보다도 두터운 독자층을 가졌던 연재물의 마지막 회를 읽으니 인기 드라마의 종영일처럼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는 마지막 원고와 함께 “지난 1년, 글을 쓰는 고통(?)과 함께 했지만, 차분히 우리 도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두 분의 수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두 연재물 모두 단행본으로 새롭게 편집되어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김연금 소장의 연재 ‘그들이 설계하는 법’도 이번 달로 맺는다. 세달 간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좁은 지면 탓에 일일이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지난 1년간 옥고를 보내주신 모든 필자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 몇 년간 한창 유행했던 긍정심리학 류의 책들을 보면, 감사할 일을 떠올리고 늘 감사할 때 우리는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환경과조경』을 사랑해주시는 여러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며 한해를 행복하게 마감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순백색 모니터를 응시하다 보니 그만 마감 에피소드로 흐르고 말았다. 문득 우리 인생에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아주 큰 마감이 있음을 깨닫는다. 삶의 마감일을 미리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없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살까, 매일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한층 열심히 살까. 아마 우리는 그 마감의 시한을 알더라도 “마감에 임하는 필자들의 태도” 못지않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지 않을까? 이렇게 2015년을 마감한다. 아니 통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