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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목욕탕에서 예술로 목욕하기
5월 15일, ‘행화탕프로젝트’ 개관식 개최
버려진 목욕탕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난 5월 15일,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행화탕에서 ‘행화탕프로젝트’ 개관식이 열렸다. 축제행성이 주최하고 61311 기획단이 주관한 이 행사는 아현동 일대와 더불어 행화탕이 재개발될 때까지, 2년간 진행될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다. 기획단의 명칭인 ‘61311’은 행화탕의 지번 주소에서 따왔으며 ‘행화탕’이라는 건물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지역의 기억과 문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61311 기획단은 문화, 예술, 공간, 건축, 대중음악, 커뮤니티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 기획가인 권효진(문화·공연 기획가), 김반야(대중음악 평론가, 방송 작가), 김보경(독립 문화 기획가), 박경린(독립 큐레이터), 서상혁(축제 기획가), 양은혜(마실와이드 문화부 에디터), 이아림(매거진 및 사보 에디터), 이원형(건축가, 워니스튜디오(wonystudio) 대표), 임경민(전시 기획·운영가), 주왕택(테크니컬 슈퍼바이저, 제이투커뮤니케이션 대표)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그룹이다. 이들은 공연, 시각 예술 분야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예술 기금에 의존해 신작을 발표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며 대안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또한 ‘행화탕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행화탕을 지역 커뮤니티 활동과 예술프로그램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낡은 목욕탕의 재발견
1976년에 지어진 행화탕은 아현동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오던 목욕탕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찜질방과 고급 스파 시설이 증가해 행화탕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1년 아현동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됐다.
5년여간 비어 있던 공간에 올해 초부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축제·공연 기획사인 축제행성이 행화탕을 임차해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한 것이다. 축제행성은 다양한 예술 작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일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낡고 어둑한 분위기의 행화탕은 예술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기에 적합한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2월부터 본격적인 공간 보수 작업이 기획 단원인 이원형 건축가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61311의 다른 단원들도 틈틈이 행화탕에 방문해 공사와 청소에 참여했다. 폐관될 때, 욕조와 목욕 시설이 모두 정리되어서 행화탕이 과거에 목욕탕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았다. 벽과 바닥에 남은 공간 분할의 흔적을 이용해 기존 목욕탕의 구조를 최대한 되살리고 천장을 제거하여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이어 물청소, 전기 배선 설치, 지붕 방수, 화장실 보수, 화단 정리 등 대대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탈의실, 목욕탕, 사우나실 등 10개의 다채로운 공간이 조성되었다. 행화탕은 문이 많아 전시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입구를 변경할 수 있으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새로 태어난 행화탕은 다양한 전시와 공연, 워크숍, 교육 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대관료가 저렴해 창작자들에게 열린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목욕탕을 가득 채운 문화·예술 프로그램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 200여 명이 행화탕의 개관식에 참여했다. 특히 과거 행화탕을 이용했던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아와 그 의미가 컸다. 개관식에는 행화탕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공연프로그램인 상상 발전소의 ‘수중인간’, 보이스씨어터 몸MOM소리의 ‘도시소리동굴프로젝트’, 모다트의 ‘전봉준’, 서울괴담의 ‘마술극장’이 진행됐다. 또한, 개관 초청 전시 작품으로 이원형의 ‘몸의 정원’, 구수현의 ‘The Ferris Wheel페리스 휠’, 신용구의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가 설치되었다.상상발전소의 공연 ‘수중인간’은 뱃사람을 유혹하던 사이렌의 모습을 현대 융복합 콘텐츠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탈의실에 길쭉한 원통형 수조를 설치하여 수중 퍼포먼스를 펼쳤다.
목욕탕에 설치된 전시 작품 이원형의 ‘몸의 정원’은 공간의 용도와 동선의 재구성을 통해 버려진 행화탕을 ‘예술로 목욕하는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바닥을 채운 검은 물과 한쪽 벽면에서 잔잔히 쏟아져 내리는 물, 하얀 징검다리,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통해 공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작품을 감상하기위해서는 행화탕의 뒷문인 보일러실의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둡고 좁은 보일러실은 넓고 밝은 목욕탕을 돋보이게 한다. 또한 목욕탕 바닥의 물과 물이 빚어내는 소리는 잠들어 있던 몸의 감각을 깨우고, 하얀 징검다리 위를 건너는 관객들의 움직임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작가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겨 주었던 물이 이제 마음을 씻어 주고, 물소리와 말이 뒤섞여 울리는 소리는 음악이 되어 관객이 행화탕을 ‘몸의 정원’으로 느끼기를 바랐다.
창고에 설치된 신용구의 전시 작품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는 한지로 만든 꽃을 통해 밝음과 어둠, 삶의 순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늘색 계단, 슬레이트 지붕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꽃이 가진 상징성을 이용해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중 ‘몸의 정원’, ‘The Ferris Wheel’과 공간투어, 기획단 소개 및 행화탕 옛모습 소개 상영 프로그램은 5월 28일까지 전시 및 진행되었다. 이후 ‘몸의 정원’은 공연 프로그램 중 하나인 ‘수중인간’, 수중 사진작가의 사진 전시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물의 풍경(가제)’이라는 융복합 작품으로 재탄생될 예정이다. ‘물의 풍경’ 전시는 6월 1일부터 12일까지로 계획되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추후 행화탕 페이스북(www.facebook.com/haenghwatang)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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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에 누워 백두대간을 노닐다
‘백두대간 와유’ 전, 2016. 4. 2. ~ 2016. 5. 29.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문을 연 지 만 2년이 지났다. 개관 이후 매번 흥미로운 전시를 올리고 있지만, DDP 특유의 비정형 공간을 ‘활용’하여 작품의 의미를 더하는 전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건축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말이 무색하게도 전시를 통해 DDP의 흥미로운 공간성과 소통하며 의미를 끌어내는 노력이 열매 맺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DDP 공간과 소통하는 전시’가 비로소 무대에 올랐다. 바로 지난 4월 2일부터 5월 29일까지 진행된 ‘백두대간 와유臥遊’ 전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전시는 작품, 내러티브, 그리고 건축의 힘이 한데 맞물려 시각, 촉각, 체험, 그리고 공간성이 시너지 효과를 자아내며 관람객을 백두대간 안으로 이끌고 있다.
와유, 누워 노닐다 ‘백두대간 와유’ 전은 문봉선 작가의 수묵 산수화 ‘강산여화’(2014),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의 ‘자리’(2014), 산악사진가 10명의 백두대간 실경 사진, 그리고 동선의 곳곳을 꾸미고 있는 백두대간 자생 동식물 일러스트와 문학, 역사, 철학 자료 30점 등이 상호 작용을 통해 풍부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의 메인 작품인 문봉선의 ‘강산여화’는 산과 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우리 강산의 담담한 모습에장대한 서사시와 같은 격格을 부여한다. 하지훈의 작품‘자리’에 누워 이 강산여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가 꾸며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와유臥遊(누워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다.
와유란 중국 송나라 화가인 종병이 산천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 나이가 들어 나가지 못하자 집 안에 그림을 걸어놓은 채로 누워 감상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감상법이다. 사실 이 감상법의 진면목은 직접 체험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난다. ‘자리’에 기대 누워 ‘강산여화’를 올려보면 고고한 높은 산봉우리를 마주하는 듯하고, 귓가에 시원한 계곡 바람이 느껴지는 듯하다. 디자인 둘레길을 따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백두대간은 발걸음을 멈추고 편안하게 누워 감상할 때 그 속내를 조금씩 풀어낸다. 수묵 수풀 사이로 점차 사람이 보이고, 그늘을 내어주는 짙은 녹음이 보이고, 드문드문 자동차와 비닐하우스, 철도 길처럼 화폭에 현재성을 부여하는 작은 요소들도 시야에 들어온다. ‘강산여화’와 ‘자리’가 표현하는 공간은 오래된 과거가 아닌, 느긋한 완행열차를 타고 갈 때 창밖으로 보일 법한 실제의 공간이다.
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폭포수 앞에 술잔을 놓고 바위언덕에 걸터앉아 강산을 사유하는 신선의 모습은 우리가 잘 아는 동양 산수화의 한 모습이다. 신선을 바라보는 이는 그 모습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화폭의 산수를 ‘체험’한다. 이처럼 화폭이라는 매개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강산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다.
따라서 동양 산수화의 산수는 화폭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차원에 실재한다. 어릴 적 읽던 무협지에 나오는, 산수화를 통해 이 산 저 산으로 노니는 고승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비록 높은 도력이 없더라도 시원한 ‘자리’에 의지해 ‘강산여화’ 속 두타산 너머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환유 공간과 수묵화의 만남
‘강산여화’의 백미는 무엇보다 작품의 스케일 그 자체다. 폭 1m, 길이 150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수묵 산수화가 한눈에 관람객의 시선을 앗아간다. 둥그렇게 꺾어지는 벽을 따라 전시된 작품은 나선형 비탈을 걸어 올라갈수록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마치 산길을 걸어 오를수록 지평선으로부터 새로운 경관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비록 실내라도 꾸준히 비탈을 오르며 산수를 감상하니 그 기분만은 덕유산, 지리산을 오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강산여화’의 힘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데는 공간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서로 주고받으며 동선을 따라 오가는 DDP 안팎의 공간을 거닐고 있으면 거대한 클라인의 병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 열린공간들이 상생하는 것을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환유의풍경metonymic landscape이라 표현한 바 있다. DDP내부 전시 공간도 외부의 비정형 곡선에서 생겨난 경관 요소를 그대로 이어받아 둥근 원기둥, 경사면, 타원형 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전시 공간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비정형 공간이 미술 작품의 전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근대 미술에 있어 하얀색 직사각형 공간, 또는 화이트 큐브white cube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기 때문이다. 20세기 뉴욕에서 ‘발명’된 근대 공간의 일환으로서 현재까지도 ‘갤러리’ 공간은 보편적으로 하얀 벽, 높은 천장, 그리고 무채색의 바닥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행처럼 전 세계로 번졌던 이 양식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공간의 단조로운 형태가 미술 작품의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거슬러 올라가자면,미국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설계로 건축되어 1959년 문을 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이 화이트 큐브 현상의 문제에 부딪혔다. 작은 추상 작품을 걸 목적으로 원기둥 형태의 곡면을 가지게 된 이 미술관은 이후 여러 근대 작품―크고, 무겁고, 입체적이며, 벽에 거는 형태의―의 전시에 어려움을 겪었다. 화이트 큐브를 전시 공간으로 상정하여 제작된 작품이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에 전시될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술계에서 화이트 큐브의 영향은 아직도 가시지 않아 비정형 공간 내 회화 전시는 아직도 여러 문제를 동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DDP와 같이 현대적, 또는 미래적 공간에 흔히 ‘오랜 전통’과 함께 연상되는 수묵 산수화를 전시하며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은 선입견을 깨부수는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낮은 비탈을 오를수록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의 추상 지형역시 공간 내러티브의 깊이를 더해준다. 흑백의 강조가 공간을 순간적으로 단순하게 보이게 할지 몰라도, 그안에서 벌어지는 내러티브는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산수 안 공간 초월transcendence
“산과 산, 골과 골의 연결은 높고, 낮고, 깊고, 얇고, 가깝고, 멀고, 비우고, 채우고, 모이고, 흩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시점이나 원근은 ‘삼원법’을 버무려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안되면 처음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수없이 떠올리며 이 시대의 참된 ‘전통회화의 가치는 무엇’이고 그 방법은 없는가? 나는 수없이 되새기며 풀 한 포기, 소나무 한 그루, 계곡 그대로 그 답을 찾고자 이 산 저 산을 헤매었다.” _ 문봉선, ‘백두대간에 부는 바람’ 중 ‘강산여화’의 산수는 여러 방향, 위치, 시각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화폭 안에서 여러 켜가 겹쳐 있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들을 따라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장소로 빨려 들어가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동양의 산수화는 서양의 소실점과 다른 삼원법三遠法을 사용한다. 중국 북송 시대 화가이자 동양 산수화론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화론가인 곽희는 화폭을 통해 산을 바라보는 시점에는 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고원高遠, 산 앞에서 산의 뒷면을 넘겨보는 심원深遠,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는 평원平遠이 있다고 했다. 문봉선은 이 세 시점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관람객을 숲 안에 데려다 놓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로 옮겨 놓기도 하고, 또는 넓은 평원에서 날아가는 새와 구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화폭을 통해 모든 공간이 열리며 겹침과 확장을 반복한다. ‘강산여화’에 화답하듯 소설가 김훈이 쓴 글‘강산여율’은 삼원법을 통해 나타나는 산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본다는 것은 활로 표적을 겨누는 자의 시선이 아니다. 대상이 위치한 환경 전체를 자신의 시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전체 속에서 가파른 봉우리들이 나무와 바위의 개별성을 포용하고, 아무 발길도 닿지 않는 산비탈에서 구부러진 생애를 보내고 있는 나무 한 그루도고유한 존재감으로 당당하다. 이 겹눈의 시선이 산과 산 사이의 보이지 않는 구도를 연결해가면서 화폭을 강물로 흐르게 한다.”
필자가 전시장에 방문한 날은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하지훈 작가의 ‘자리’에 누워 ‘강산여화’에 펼쳐진 산수를 지켜보니 짙은 안개를 지나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지리산의 산기슭, 법적 ‘어른’이 되어 처음 가본 겨울의 속리산 자락, 말로만 듣던거창의 고송 모습이 떠올랐다. 문봉선의 거친 초묵법이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윤곽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아 와유하던 중에는 내가 산수의 장소로 옮겨졌고, 또 일어나 걷다 보면 산수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고요한 새벽 숲 속의 명상과 같은 행위에서 내 신체는 정신과 산수가 오고 가는 매개가 되어 굳은 땅 위에 자릴 지키는 고목과도 같다 느껴졌다. 시공간 여행이 이런 기분일까? ‘백두대간 와유’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겹침은 전시를 풍부하게 만들고 경험과 체험을 압축하며 우리의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백두대간은 부분적으로나, 전체로나 우리나라 정서와 가장 맞닿아 있는 기억의 공간이자 살아가는 장소다.
백두대간의 실경 사진과 글, ‘강산여화’의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산자락과 높이 뻗은 산봉우리, 이 모든 것을 감상하기 위한 ‘자리’, 그리고 미소를 자아내는 동식물 일러스트레이션. 전시장과 산수를 오가다 보면 어느새 북한에 위치한 두류산 산맥의 빈자리에 닿는다. 텅 빈화폭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 땅의 경관이 너무나도 많음을 한탄하게 한다. 푸른 천지의 모습과 문봉선 작가의 마지막 글귀가 진하게 울리며, 대지의 경관이 정치,사회적 경계와 별개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백두대간의 감성이 깃든 다양한 작품들과 건축물의 독특함이 만들어낸 ‘백두대간 와유’는 공간과 예술의 독특한 만남을 통해 동서양과 시대를 넘나들었다.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 기분 좋은 궁금증을 남겨주고 있다. 앞으로도 DDP의 독특한 공간성이 전시의 내용에 유의미하게 활용되는 신선한 전시 기획이 계속해서 나올 수있을 것인가? 이번 전시를 통해 체감한 전시 공간으로서의 DDP의 가능성과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고 있는 예술계에 기대를 걸어본다.
신명진은 뉴욕 대학교(NYU)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을 쓰던 중 공간과 경관에 마음을 빼앗겨 조경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재는 석사 졸업 후 몸담았던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학업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생태조경학과 통합설계·미학연구실에서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바쁜 학기 중에도 좋은 전시 소식이 들릴 때면 종종학교 캠퍼스를 탈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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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도시로부터 배우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 국제 심포지엄
지난 5월 6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은 ‘라이브러리 스터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이라는 타이틀을 단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또한, ACC ‘라이브러리파크 프 로그램’으로 아시아의 주요도시 및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 성과물과 수집 자료를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 주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이는 국제 심포지엄과 더불어 아시아 특유의 도시 공간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창조적 생산: 아시아의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 사이의 생산적 가능성’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서울, 뭄바이, 싱가포르, 상하이, 하노이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다섯 개 도시를 사례로 삼아 아시아 근현대 도시 건축의 형태와 각 도시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가 펼쳐졌다.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 사이의 창조적 생산 가능성 심포지엄을 총괄한 서예례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는 “이번 심포지엄은 아시아 근현대 건축 담론에 대한 결론이라기보다는 실험적 질문을 생산하는 시간”이라며 서막을 열었다. 심포지엄의 큰 주제인 ‘형식적-비형식적’이라는 개념은 반反 도시 대 도시 찬양, 계획 대 무계획, 일시적 개발 대 단계적 개발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서 교수는 “도시의 형식과 비형식에 대한 담론들이 서구에서는 계속 존재했지만, 아시아 도시에서는 이런 담론들에 대한 교류가 충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형식과 비형식에 대한 담론의 부재 속에서 아시아 도시들은 거대하고 획일적인 ‘형식적’ 도시계획을 빠르게 경험했고, 그 이면에는 ‘비형식적 공간’이 계속 존재했다. 그는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급속하게 개발된 ‘형식적 도시’ 공간 속에서 ‘비형식적 삶’을 살아가는 아시아 도시민들의 삶을 “잡종 메커니즘”이라 칭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 교수는 “형식-비형식의 문맥에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 이제는 유연한 방식의 도시계획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도시들은 서구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활동력, 자생성, 생산성을 보여주는 독특한공간”이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고층 주거와 새로운 버내큘러의 영역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1000개의 싱가포르’의 기획과 디자인을 맡았던 플로리안 셰츠Florian Schätz 교수(국립 싱가포르 대학교 건축학과)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작지만 영향력 있는 도시 국가 싱가포르만의 독특한 압축도시 모델을 돌아보고 이에 관한 통찰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인구수에 비해 국가 면적이 좁기 때문에 건물이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압축 도시모델’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이 싱가포르 모델은 효과적인 어반 테크닉urban technique과 적절한 테스트를 마친 전략의 혼합체로 타 도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가 주도의 도시계획을 통해 고층 빌딩이 지속적으로 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도시만의 버내큘러vernacular 공간을 유지한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수직적 녹지 시스템vertical greening system은 “싱가포르의 기후 및 자연 환경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 싱가포르의 버내큘러를 재해석한 건축 방식이다.” 끝으로 셰츠 교수는 “인구는 점점 증가한다.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가 필요하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많은 도시들에게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뭄바이, 교환적 공간과 삶의 도시
교류 용적transactional capacity은 몸, 상품, 생각, 금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의 용적을 의미한다. 이 흐름이 강할수록 용적도 커진다. 루팔리 굽테Rupali Gupte 교수(뭄바이 환경·건축대학교)는 교류 공간transactional space과 교류 사물transactional object은 “살아있는 도시의 본질을 만드는 데 중요한 몫을 한다”고 주장했다.뭄바이의 주거 유형 중 하나인 차울chawl은 그가 제시한 전형적인 뭄바이의 교류 공간이다. 긴 복도를 따라 방 하나 또는 두 개짜리의 작은 집들이 늘어선 아파트형태의 공간으로 지상층과 그 위의 두 개 층으로 이루어진 주택에는 약 70~100세대가 거주할 수 있다. 차울의 형태는 개개인의 경계를 흐리고, 주택이나 상점으로 사용되는 밀집된 포켓으로 이루어져 있어 연속적인 도시 공간을 창출한다. 이를 통해 주민들의 교류가 확장되고 독특한 도시성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뭄바이의 부동산 공급 가격 상승과 함께 개발 회사들은 새로운 부동산 개발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당시 대다수의 차울은 낡은 상태였고 이는 공격적인 개발 회사가 새로운 부동산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부는 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슬럼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개혁 정책이 마련되었다. 뭄바이의 차울과 슬럼가가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삶도 변하기 시작했다. 굽테교수는 “아파트 단지 경계 지역의 보안이 강화되었고 경계 흐리기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으며, 생활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던 공동 복도의 부재는 공동체의 소멸을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아시아 도시들에서실행될 도시재생의 방식들이 뭄바이의 경우를 교훈으로 삼기를 바란다.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개발 방식을 택하기를 권한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서울, 전통 도시 조직과 귀금속 산업의 공간적 적응 유형
1970년대의 도시 재건으로 인해 남아 있던 도시의 조직들은 삭제되거나 파괴됐고 근대적인 대형 사무용 건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대지의 용도가 주거에서 산업으로 변경되면서 기존의 도시 조직이 유지되는 지역도 있는데, 종로3가가 그러하다. 양승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는 종로3가의 귀금속 세공 작업장을 사례로 기존의 도시 조직에 구축된 주거 지역이 어떻게 그 조직에 적응하는지 설명했다.
귀금속 세공 작업장은 기존의 조직에 적응하면서 순환적 유형, 손가락 유형, 집합 유형으로 유형화됐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 형태는 대지 사용, 건물, 구획, 거리 등 도시의 형태 요소가 지니는 견고함의 차이로 구분되는데, 이전 시대에 자리 잡은 대다수의 지역에서는기존의 도시망을 대체하는 것보다 기존 토대에 새롭게 적응하는 방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종로3가 귀금속 세공 작업장의 적응 방식을 통해 “서울중심업무지구 도시계획의 혁신적 프로세스의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고, 이를 통해 도시설계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하노이, 프엉坊 조직의 지속과 변동-식민지적 경험과 근대의 도시 건축
우동선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학과)는 식민지 시대에 하노이의 건축과 도시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살폈다. 이 발표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식민성’과 ‘근대성’으로 서구 근대 문명의 이식과 식민지 경험이 하노이의 건축과 도시 변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가 핵심이다. 우리나라처럼 베트남 또한 서구의 식민지가 되면서 근대 건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식민지 지배층은 ‘치환’과 ‘매립’을 통해 하노이에 자신들의 시설을 확보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하노이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중요한 터라는 상징성만큼은 계속해서 유지했다.
상하이, 창조 산업의 새로운 도시 모듈로서 로프트
상하이는 현재 중국에서 창조도시 담론이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도시 중 하나다. 한지은 교수(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창조도시 상하이’ 건설의 핵심은 “상하이 창의산업구의 3분의 2 이상이 옛 공장이나 창고 등 유휴 산업 시설을 개조해 형성됐다”는 점이다.
즉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로프트loft의 활용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로프트는 뉴욕의 소호SoHo와 같은 패션과 유행의 상징이며, 자원을 절약하고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는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 개념으로 환영받는다.
상하이의 창의산업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임대료 상승, 높은 공실률, 불필요한 개발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도시의 창조적 환경 조성과 유휴 산업 시설의 활용, 산업 구조의 고도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상하이의 창조도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다섯 개의 아시아 도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여러 도시들의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 내부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시적이고 창조적인 생산의 가능성이 논의됐다.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은 ‘아시아의 도시로부터 배우기’일 것 이다. 아시아의 도시들에서는 도시 개발에 대한 담론이 전무한 상태에서 급속도로 근현대화가 일어났고, 우리는 잡종 메커니즘이라는 도시 체계 속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오래된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낭만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다.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의 공간 유형을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아시아의 도시를 위한 새로운 이해와 시각이 필요하다.서예례 교수의 말처럼, 그 단계를 넘어설 때 “기존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배움은 혁명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