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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조건 Conditions For Survival』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노융희 교수가 제안하는‘태양에너지사회’를 제창하는『생존의 조건 Conditions For Survival』환경 문제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 지구는 앞으로 어떻게 미래 사회를 열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노융희 명예교수는『생명의 조건-생명력 넘치는 태양에너지사회로-Condition For Survival-Toward “Solar Energy-Based Society”Full of VibrantLife-』을 제안하고 있다. 친지구환경적인 사회 구성을 제창하고 있는 이 책은 현재 노 교수가 많은 통계 자료와 사진, 도면과 함께 국문 번역본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번역본이 출판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노융희 명예교수는 본지를 통해『생명의 조건-생명력 넘치는 태양에너지사회로-』영문번역판 소개를 전해왔다. _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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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경봉사회
나누는 기쁨, 나누는 삶, 봉사활동 하던 날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등, 5월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달인 것 같다. 너무도 화창했던 지난 5월 5일, 작업복 차림의 조경인들이 성북구 북정마을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엔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부터 업체와 회사에 몸담고 있는 조경인들이 있었고, 1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하버드 디자인스쿨(GSD) 커크우드(Niall G. Kirkwood) 교수도 눈에 띄였다. 고추 모종을 잔뜩 싣고 있는 차가 마을회관 앞에 도착하자, 집결 시간인 오후 2시가 되기 훨씬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한 여대생이 까르르 달려와 묻는다. “지금 시작하면 안되나요? 봉사활동 빨리 하고 싶어요.” 그렇게 시작된 한국조경봉사회 2011년 첫 번째 활동의 소소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볼까 한다.
한국조경봉사회는 언제 창립되었나요?한국조경봉사회(Korea Free Landscaping Service for the Poor: KOFLASPO)는 조경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 각계의 조경인 50여 명이 소외 계층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9년 1월 17일 창립되었다. 마침 그날은 우겨 심우경 교수님의 회갑일이기도 했고, 들어온 회갑 축의금의 상당 부분을 조경봉사회의 창립기금으로 쾌척하기도 하셨다. 한국조경봉사회는 창립 이후 성북구 북정마을을 지속적으로 찾아 일곱 차례에 걸쳐 봉사활동을 실시해 왔다. 보통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한 가로수 식재와 공동 경작지나 주민들의 주거지 앞 텃밭에 고추 모종을 식재하는 일을 했지만, 2009년에는 지역 주민의 요청으로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공터의 낭떠러지 앞에 휠스탑을 설치했고,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이 앉아 쉬는 낡은 평상 자리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쉘터를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성북구 북정마을과의 인연은?한국조경봉사회가 창립된 직후 처음에는 봉사 대상지를 선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봉사의 취지에 적합한 장소가 분명 많이 있을 테지만 막상 활동을 시작하려니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전국적인 규모로 봉사활동을 하는 한국봉사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자원봉사 실천마당에서 조경분야를 맡아 참가하게 되었다. 그 장소가 바로 북정마을이었다.2009년 4월 22일의 행사는 끝났지만, 심우경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이곳이 바로 한국조경봉사회에서 찾던 적소임을 동감하게 되었고 주민들과 지속적인 교류와 활동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후로 일 년에 두세 번씩 북정마을에 모여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묻고, 조경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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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따라 밟아본 삼국지 유적과 경관(15)
유비가 한을 품고 병사한 장강삼협 봉절 백제성동오의 육손은 유비의 촉군을 효정 이릉 땅에서 크게 무찔렀다. 유비는 백제성으로 몸을 피하고, 무슨 면목으로 성도로 돌아가겠냐며 백제성에 머물기로 하고 거처를 영안궁이라 했다.유비는 병들어 앓고 있는데 점점 심해질 뿐 낫지 않았다. 더욱이 관우와 장비 두 아우를 잊지 못해 통곡하다가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 승상 제갈량을 급히 오라고 해서 유명을 남기려 한다. 마침 마량의 동생 마속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말이 앞서니 크게 쓸 인재가 아니라고 한다.공명의 손을 잡으며 “그대의 재주가 조비보다 열 배는 나으니 반드시 천하를 안정시키고 대사를 이룰 것이오. 태자를 도울만하면 돕되, 그만한 그릇이 못되거든 그대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라고 말한다. 공명은 유비의 간곡한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발이 떨려왔다. 그대로 땅에 엎드려 고하며 머리를 땅에 짓찧으니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선주는 유영 유리 아들 형제에게 공명에게 절을 올리게 하면서 승상 대하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라고 분부한다.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니(223) 그의 나이 63세였다.황석영『삼국지』8권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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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식물이야기(13): 사람과 같이한 식물의 긴 역사 6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감자의 길감자의 원산지는 미대륙의 안데스 산맥이다. 잉카인들은 감자를 잔인한 표범의 신과 짝을 지어주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감자는 18세기에 유럽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곧 유럽의 주식이 된다. 유럽의 주식은 빵이 아니라 감자다. 19세기 중반, 유럽에 커다란 기근이 온 적이 있다. 전 유럽의 절반가량이 굶었던 엄청난 재앙이었는데 이때 수백만의 농부와 노동자들이 감자의 원산지인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썩음병이 심하게 번져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었다. 그 당시의 아일랜드 농민들에겐 감자가 거의 유일한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다.지금 미국인의 대부분이 이때 감자를 찾아 이민 간 유럽인들의 후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유럽 이민사를 감자의 관점에서 해석해 본 것이다. 내 생각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인간사를 식물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인디언들이 몰살당해 미대륙이 텅 비자 다시 사람으로 채우기 위해‘감자의 신’이 개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감자의 신이 유럽의 감자를 썩게 해서 굶주린 사람들을 미대륙으로 불러들인 거라는 거다. 이런 식으로 작은 식물 하나가 역사를 움직인 사례가 적지 않다. 온 세상 사람들의 옷을 만들어 입힌 목화가 그렇고 비단이 되어 중국과 유럽의 문화 교류에 앞장선 뽕나무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