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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프레시킬스 보고서를 다시 펼치며
이번 호 표지 그림에서 20여 년 전의 강렬한 기억을 다시 호출한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2001년 12월, 50년 넘게 뉴욕 맨해튼의 욕망과 배설물을 받아낸 거대한 쓰레기 산, 센트럴파크 세 배 면적의 초대형 매립지를 공원으로 전환하는 장기 계획의 밑그림이 발표됐다. 22년이 흐른 지난해 10월, 2036년 완공을 목표로 단계별로 조성되고 있는 ‘프레시킬스 공원’ 중 북부 공원 1단계 구역의 문이 열렸다.
세상의 모든 게 변할 것만 같았던 21세기의 새벽, 전 세계 조경계는 두 가지 이유로 프레시킬스 쓰레기 매립지 공원화(Fresh Kills: Landfill to Park) 설계공모에 열광했다. 무엇보다도 프레시킬스 공모전은 도시 곳곳에 버려진 광대한 규모의 탈산업 부지(post-industrial sites)를 경관으로 치유해 재생시키는 설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담론의 영역에서 실천의 장으로 이동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이 공모전이 조경가들에게 끼친 다른 하나의 영향은 당선작 ‘라이프스케이프(Lifescape)’의 실험적 설계 태도와 방법이다. 매립된 쓰레기, 야생 동물 서식지, 식생 천이, 수문 체계 등 서로 충돌하는 이질적 조건을 다이어그램으로 조정하고 완결적 마스터플랜 대신 과정 중심적 단계별 계획(phasing)으로 설계를 조율해 나간 필드 오퍼레이션스FO의 방식은 이제 하나의 교본으로 자리 잡았다. 20년 넘게 흐른 지금, 프레시킬스 공원은 또 다른 세 번째 이유로 조경가들의 주목을 초대한다.
인류세(Anthropocene)와 기후 위기를 맞은 도시에서 공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공원과 도시 재야생화(rewilding)의 함수 관계를 질문하게 한다. “도시의 경계선은 한자리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는다”(어니스트 로슨). 1790년 3만 3천 명이던 뉴욕시의 인구는 1900년 348만 명으로 급증했다.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던 맨해튼의 습지와 원지형은 완전히 사라졌다. 맨해튼의 욕망을 마주 보고 있는 스태튼 아일랜드는 수천 년 전 빙하가 녹은 물이 자갈과 모래를 퇴적시키면서 형성됐다. 이 섬 동부의 높은 모래 언덕은 빗물을 프레시킬스의 낮은 습지대로 흘려보냈다. 프레시킬스는 네덜란드에서 온 초기 정착민들이 ‘신선한 개울’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빙하 토양, 독특한 배수 패턴, 특별한 미기후가 결합된 프레시킬스에는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풍부한 생태적 다양성이 만들어졌고 철새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뉴욕의 탐욕은 이 거대한 미개발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저돌적인 성장주의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지스는 1940년대까지 손상되지 않고 남은 생태학적 보물창고 프레시킬스에 맨해튼의 쓰레기를 채우기로 결정했다.
1948년 쓰레기 매립이 시작됐다. 1955년이 되자 이미 프레시킬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매립지로 바뀌었다. 매일 쓰레기 3만 톤이 폐기됐고, 평평한 염수 습지는 높이 70미터의 쓰레기 산맥으로 변했다. 『어반 정글』(매일경제신문사, 2023)의 저자 벤 윌슨은 “프레시킬스는 도시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악몽 같은 유적이 되었다”고 일갈한다. “도시는 맹렬한 식욕으로 자연을 삼키고 오염과 폐기물을 배설해서 강과 습지를 오염시키고 자연 서식지를 독성 매립지로 바꾼다.”
2001년 3월 마지막 폐기물을 실은 바지선이 도착했다. 공원화 설계공모 당선작이 발표된 12월 프레시킬스의 문이 닫힐 예정이었지만, 비극적인 9‧11 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를 받아내느라 2002년 3월에야 폐쇄됐다. 장기간의 공원 설계와 조성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프레시킬스는 새로운 변화를 겪으며 놀라운 잠재력을 드러내고 있다. 50년 넘는 세월을 거치며 매립지로 쓰였지만 매립 가능한 최대 면적은 프레시킬스 전체의 45퍼센트였다. 비옥한 습지 생태계는 사라졌지만, 역설적이게도 매립지 운영은 나머지 55%의 땅을 도시 개발로부터 피해 가게 했다. 살아남은 습지, 간석지, 초원, 삼림 지대와 함께 유독성 쓰레기 더미 위에는 새로운 생태계가 등장하고 있다. 지하 깊은 곳에서는 미생물들이 반세기 동안 쌓인 쓰레기를 메탄으로 바꾼다. 지하의 가스와 침출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추출되어 인근 지역의 전력원으로 쓰인다. 1억 5천만 톤의 쓰레기가 지표면 아래에서 서서히 분해되는 동안 악명 높은 쓰레기 산은 새로 정착하는 야생 생물의 안식처로, 뉴욕 시민을 환대하는 공원으로 계속 변해갈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프레시킬스에 새로 덮인 풀밭에는 새로운 미생물, 식물, 곤충, 조류, 포유동물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새 개척자들에 의해 복구되고 있는 프레시킬스는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역동적인 자연의 과정이 살아 있는 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재야생화는 완전한 방치의 결과가 아니다. 랜드스케이프가 아닌 ‘라이프스케이프’를 목표로 한 혁신적 조경설계, 마스터플랜이 아니라 과정적 계획으로 만들어가는 설계가 재야생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다음 일은 인간의 설계와 조절 범위를 벗어난다. 앞으로 오랜 세월 동안 광대한 프레시킬스는 공원의 새 거주자인 비인간 생명체들에 의해 복구되어갈 것이다. 벤 윌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작업은 대부분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할 것이다.” 도시 재야생화의 거대한 실험실인 프레시킬스는 인류세의 공원이 지향해야 할 좌표를 제시해준다.
이번 호에 담은 북부 공원 1단계 구역은 프레시킬스 공원 전체 면적 2,315에이커의 1/100에 못 미치는 21에이커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재야생화된 매립지의 생태적, 문화적, 경관적 잠재력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기사와 함께 프레시킬스 공원화 계획 보고서를 구해 일독해보시기를 권한다. 보고서의 첫 문장을 옮긴다. “라이프스케이프는 장소이자 과정이다(Lifescape is both a place and a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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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단칸방에 나무를 심는 방법
지난여름 진행한 북토크에서 정원이 생긴다면 어떤 식물을 심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다. 식물원에 다닐 때마다 “나중에 정원이 생기면, 이 친구와 저 친구는 꼭 키울 거야!”라는 말을 했었고, 분명 마음 속 위시 리스트에는 식물 이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런데 오래된 지층 속 화석처럼 굳어버린 걸까. 하나 꺼내 보이기가 쉽지 않았다.
“늘 정원을 꿈꿨는데, 막상 심을 수 있다고 하니 식물 하나가 바로 떠오르지 않네요.” 조금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수련과 연꽃을 떠올렸다. 언젠가 베란다에 작은 크기의 원예종을 아기 욕조만한 그릇에 심은 적이 있는데 꽃을 단 한 송이밖에 구경하지 못했다고, 정원이 생긴다면 당장 연못을 파고 수생 식물을 실컷 심겠다고 했다.
그때 한 말은 분명 진심이었고 정정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걸 안다. 그런데 대답을 바꾸고 싶다. 수련과 연꽃 대신, 오래 전에 그린 ‘단칸방에 나무를 심는 방법’이라는 그림으로. 그림은 시방서나 실시설계 도면이 아니다. 그러니 저 푸른 단칸방 안에 그림 같은 대온실 하나 짓고 사랑스런 기화요초를 그려 넣어도 된다. 그러나 그림 속 작은 방은 텅 비어 있고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정확한 답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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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역사, 문화유산
현대 도시에서 오래된 건축물과 다리, 담장, 무덤 등의 건조물은 역사문화유산으로서 ‘제도’에 의해 보호받고 존재한다. 유형의 문화유산은 문학이나, 음악, 공예 등 무형유산처럼 기록과 재현을 통해 그 원형을 지키는 것이 아닌, 유일무이하며 장소와 결합된 물리적 실체로서 그 자체가 원형이다.(각주 1) 또한 문화유산은 현재 도시 안에 공존하며 도시를 이루는 구성 요소 중 하나다. 이런 특성 때문에 문화유산이 보호받고 존재하는 제도적 방식에 의해 문화유산은 ‘과거’에 박제되고 주변의 ‘현재’ 도시 공간의 필요와 충돌한다.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많은 노력과 고민을 통해 이룬 바를 부정하거나 문화유산 보호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전 시대의 요구와 기술, 문화로부터 만들어진 건조물이 시대를 가로질러 원형으로 보호받고 존재하기 위해 유산이 박제되고, 또 현재와 갈등을 겪는 것은 불가피하고 심지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형의 유산이 현재 도시 공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살펴보고 그 한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생각해본다.
논의의 전제로서 몇 가지 짚자면, 우리는 왜 여러 제도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할까? 로버트 파우저(Robert Fouser)는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이전 시대 역사 유적을 보존하려는 공적인 행위를 해왔고, 이 행위에는 전혀 순수할 수 없는 의도가 있다고 설명한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 같은 권력자에 의해서건, 일정 시민 집단에 의해서건,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 노력에는 정통성 과시, 사회적 통합, 정체성 강화, 우월성 증명 같은 정치적 목적이 분명히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가진 역사 보존은 현재도 계속된다.
문화유산 보존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당연히 역사를 정치적으로 선택해 보존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궁성이 민가와 마을보다 먼저 보존의 대상이 되고, 한 장소에 누적된 여러 시간 중 특정 시간으로 복원한다. 이전 시대에 만든 것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지켜 그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미래의 기회를 열어 두려는 것이 문화유산 보존의 순수한 인류학적 목적이라면, 선택적 보존은 그런 기회를 미리 편집하는 것이다. 물론 그 편집도 우리 시대가 만드는 역사일수 있다.
문화유산 보존의 당위성은 경제적 가치로 증명되기도 한다. 문화유산은 간접적으로 도시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로 여겨진다. 또한 중산층 중심의 소비주의 하에서 문화유산을 점점 더 관광이라는 신산업을 위한 ‘자원’으로 여기며 그 보존과 활용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커지고 있다. 문화유산이 주민의 현실적인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신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논리다. 그럼에도 역사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나아가 유산을 둘러싼 포괄적 역사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것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공간적 필요를 동시에 달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팽팽한 밀고 당기기에서 역사유산의 보존이 우선되거나 반대로 개발 압력 등 현대의 공간적 수요가 우위에 있을 때 어떤 도시적 상황이 나타날까.
복원은 원형의 회복일까
역사문화유산을 현재 기능하는 도시 공간보다 우위에 두는 가장 강한 방식은 유산의 원형을 위해 이미 들어선 건물과 시설을 없애거나 변형하는 복원이다. 최근 사례로는 2022년에 마무리된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사업’을 들 수 있다. 이전 광화문광장은 2009년 세종로의 가운데 녹지대를 넓혀 만들어졌으나 넓은 세종로 가운데 섬처럼 위치한 탓에 일상적인 공공 공간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광장 조성 10년 만에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광장을 넓혀 광장이 도시 가로와 연결되도록 하자는 결정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는 도시 공간적으로도 큰 변화고, 보행 환경의 개선과 더불어 그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이고 상징적 의미가 강했던 광장이라는 도시 시설을 일상의 공공 공간으로 만드는 시도다.
이번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또 다른 큰 변화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월대를 복원하기 위해 광화문 전면 사직로-율곡로의 도로 선형을 바꾼 것이다.(그림 2) 월대의 복원과 현 도심의 교통 흐름, 그리고 비용을 두고 여러 대안이 검토됐고 찬반 논쟁도 이어졌다. 그런데 월대의 복원이 그 공간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일까. 조선시대 경복궁 앞 육조거리인 광화문광장이 경복궁이라는 권력의 정점으로 들어가는 막다른 공간이었다면, 현재 경복궁은 시대의 뒤편으로 물러나 도시의 배경이 되었고 그곳은 현재 사통팔달의 한복판이다. 광화문 일대가 작동하는 공간의 구조가 이미 달라진 것이다.
물론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는 당위가 관철된 것이다. 하지만 월대 복원의 원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조선시대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월대라는 개별 요소를 복원한다고 그 공간의 도시적 의미가 복원되지 않는다. 자동차 도로가 휘감은 월대에서 과거 그 공간의 구조가 의도한 권위와 위엄을 느낄 수 있는가. 왕정이 아닌 지금, 월대가 아니라 그 무엇을 복원해도 그것은 진정한 원형이 아니라는 비현실적이고 편협한 주장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월대를 복원한 것은 왕궁 전면의 공간 구성 요소를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문제는 이미 당시의 사회와 분리되어 남은 유적을 보전함에 있어서 종종 원형이라는 것을 물리적인 개별 요소의 합과 등가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서 실행되는 복원의 결과물은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환경과조경437호(2024년 9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물론 문화유산이 전쟁이나 화마로 부서지거나 소실된 경우 복원을 하며, 원형 확인은 복원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됐으나, 조선 정조 당시 화성의 건설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기초해 복원할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당시에도 수원화성 상당 부분이 현대에 복원된 것이나 원형을 명확히 고증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됐다.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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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
자연과 인간, 그 사이의 조율
비브르 앙상블
10~12년차 설계사무소 실장, 부소장으로 근무할 때는 오히려 겁이 없었다. 설계사무소를 대표한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컸다. 건축과의 협업에서도 투쟁을 불사하듯 설계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무리한 요구에는 거침없이 노(no)를 외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3년 차가 되었을 때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인터)대표가 됐다. 12년 차와 13년 차, 그 일 년 사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장이자 사무실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는 전혀 다른 고민과 의무 그리고 책임감을 갖게 했고 설계뿐만 아니라 직원, 협력사 등 모든 관계에 대해 다시금 뒤돌아보게 했다. 설계사무소 운영과 설계 철학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었고 결국 하나의 줄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브르 앙상블(vivre ensemble)은 동거라는 뜻도 있지만 더 넓게는 ‘함께 살아가기’라는 뜻의 불어로 인터를 맡아 운영하면서 카카오톡 프로필에 ‘살고, 살게 하라’는 글과 함께 항상 써놓는 문구이기도 하다. 첫 전공이 불어불문학이라 불어가 친숙하기도 하지만 대표가 된 그해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연설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사무실 운영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고민이 있었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문장이 나에게 찾아왔다.
실무진으로서 10여 년은 업무를 배우기에 바빴고 대표가 되고 나서는 직원이 아닌 대표의 삶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조경설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점점 더 많은 관계를 맺게 되는 조경 관련 분야를 포함한 타 분야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구축할지 고민했었다. 대표로서 직원들의 삶과 전문인으로서의 발전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직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마음으로 임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사무실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적었고 대부분 다른 이와 함께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각종 시설물을 비롯한 조경 관련 업체부터 건축, 토목, 전기 등 건설 관련 분야와의 협업은 매 순간,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협업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가 그대로 직원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이때 나를 바꾸게 했던 문장이 바로 ‘살고 살게 하라’였다.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완성해 가며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게 일하면서 잃지 않으려는 생각이 함께 살아가기다. 나도 살아가고 다른 이들도 살게 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 조경설계를 잘하기 전에 그렇게 함께 잘 살아가는 관계를 쌓고 싶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더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내게 설계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목적이라서 조경설계란 업을 매개로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과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해왔던 프로젝트를 되돌아봐도 조경설계는 공공이든 민간이든, 그 사업의 주체가 누구든지 어쩔 수 없이 공공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하는 작업이, 우리가 만들어 낸 설계 결과물이 자연의 주인인 지구에 또 하나의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고 조율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세 개의 정원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비브르 앙상블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식물, 땅, 자연을 대상으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을 디자인하면서 공존할 방안을 모색하거나 자연과 인간 그 사이의 거리를 조율하는 것이 조경설계가 아닐까. 우연히 참여하게 된 몇 번의 정원설계 프로젝트는 이러한 생각을 가다듬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조경설계를 하더라도 그 설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발주처의 의견, 각종 심의 및 인허가 과정을 거치면서 설계의 주인은 계속 바뀌며 설계자가 그 프로젝트의 손과 발로만 전락하면 초기에 품었던 콘셉트에 대한 설계자의 의지는 수차례 꺾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그렇게 꿈이었던 설계사무소 운영에 대한 회의를 느낄 정도였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 한 것이 정원설계와 시공 작업이었다. 우연히 접한 정원박람회 공모전에 앞뒤 재지 않고 참여한 적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사무실 운영 2년 차, 실무 15년 차였던 2014년에 참가한 제3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작가정원이었고, 두번째는 사무실 운영 10년 차, 실무 24년 차였던 작년에 참가한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이었다.
오로지 대상지 현황, 주제, 콘셉트만으로 설계되고 시공될 수 있는 디자인에 대한 단순한 욕망이 10여 년 주기로 꿈틀거리는 걸까. 감사하게도 그런 설계와 시공의 기회를 통해 정원과 조경과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가장 근본적인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도 돌아볼 수 있었다. 다음 세 작업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조율된 거리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연과 일상의 만남
제3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작가정원 공모전은 2014년 7월에 열렸고 시공 및 관련 행사는 1년 뒤에 진행됐다. 2014년은 온 국민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슬픔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하루아침에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 우리에게 주어진 공모전의 주제는 ‘일상’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 등교하고 출근하고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일상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정원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고 그 정원 속의 자연은 우리를 감싸안아 주면서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존재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일상의 한편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시처럼 다가와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마음이 담긴 모델정원 ‘일상이 시가 되다’(2015)에 자연을 상징하는 동서남북의 녹지와 함께 중앙에 삼각형의 셸터와 수경 시설을 배치했다. 사실 설계와 시공이 분리된 작업만 계속하다 보니 모든 디테일 하나하나를 돋보기로 보듯이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게 디자인과 시공을 함께 했던 경험은 조경설계에서 토양과 식재,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체득한 결과였다.
한 발짝 들어가 자연을 만나는 방법
우리의 작품 중 이렇게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공간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기 있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 풍경쉼터(2017)다. 전주수목원이라고 검색하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의 주인공이 바로 연못가에 있는 한국적으로 해석한 정자인데,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이곳을 배경으로 한 인물 사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이곳을 벤치마킹한 정자가 다른 공원에서도 많이 보인다. 수목원 안에 조성되는 포켓쉼터였기 때문에 수목원의 근본적인 자연성, 방향성을 해치지 않는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이용자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설계 목표였다. 수생식물원, 죽림원, 수국원 등 수목원 내의 다양한 자연 안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기존 식생을 이식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시설물만 설치했다. 조금 먼발치에서 만나는 자연과의 조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과 정원의 공존, 하늘 파빌리온
모든 설계가 그렇듯이 해답은 대상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참여를 결정했던 건 매력적인 대상지 덕분이었고, 하늘공원이 가진 강력한 경관, 자연의 힘으로 인해 콘셉트도 비교적 쉽게 정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늘과 바람, 풀뿐인 하늘공원에 자연을 함께 공유하고 공존할 수 있는 정원을 품은 ‘하늘 파빌리온’(2023)을 제안했다. 파빌리온은 드넓은 억새 초지의 장엄함을 색다르게 경험할 수 있는 경관의 틀이 되고, 때로는 거친 자연으로 상징되는 억새와 그에 대응하는 연약한 질감의 초화로 이루어진 정원을 품어주는 또 다른 틀의 역할도 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연 속의 정원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남거나 사라지거나
숫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터의 설계 프로젝트는 어림잡아도 1년에 적게는 10여 개, 많게는 20여 개 내외가 진행되어 전체 프로젝트 수는 300개가 훌쩍 넘는다. 300여 개가 모두 설계가 완료되어 시공될 리는 만무하지만 아쉽게도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그리 많지도 않다. 현상설계에서 출발해 순조롭게 시공까지 마무리된 프로젝트부터, 실시설계까지 납품하고도 사업이 불발된 프로젝트, 또는 종이로만 남아 두고두고 사례로만 참조하는 프로젝트까지 그 시작과 끝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설계를 하다보니 남아 있다고 반드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종이로만 있다고 의미가 없는 것도 결코 아니다. 새로운 시도, 시공 단계까지 유지된 콘셉트 아이디어 등 살아남았거나 사라진 작업이 있다. 그중 디자인적으로 의미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대구 이시아폴리스 패션스트리트
때론 자연을 완전히 배제한 채 디자인하는 경우도 있다. 대구 이시아폴리스 패션스트리트(롯데아울렛) 조경설계가 그런 경우였다. 드라이한 대상지의 현황 및 상업 공간의 시각적 차폐에 대한 우려로 인해 녹지는 일부분에 불과했고 자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레인 드롭(rain drop)이라는 콘셉트로 전체 바닥 포장을 패턴화했고, 시설물까지 원형 디자인으로 통일했다. 조경 디자인 콘셉트 그대로 시공, 준공된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세종시 대우 푸르지오 P3 지구
공동주택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규모였고 무엇보다도 현상설계부터 시공 단계까지 대규모 아파트 설계에서는 쉽지 않게 현상설계에서 했던 조경 콘셉트가 유지됐다. 자연과 도시의 관계를 단지 내부로 끌어들여 디자인했다.
카카오 데이터센터
준공한 지 1년이 안 된 최근 프로젝트로 첨단 시설이 들어서는 건축물이지만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내에 위치해 있어 무엇보다도 외부 공간에 대한 이용자들의 배려가 필요했다. 킵 온 딥 인 네이처(keep on deep in nature)라는 주제로 자연의 본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해 원초적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래 기술과 함께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숲 조성, 비정형적 공간 구획이 특징이다. 대지에 자연이 스며들듯 공간에 녹음이 스며들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아난티 펜트하우스
가평 아난티 펜트하우스의 주변 설계를 통해 건축물에 의해 둘러싸인 경계를 허물고 건축을 넘나드는 자연을 표현했다. 절제된 자연의 모습이 아닌 태고의 자연의 모습을 더해 살아있는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리조트를 꿈꿨다. 이때의 설계 콘셉트와 평면, 스케치의 분위기 등은 지속적으로 소환해서 비슷한 결의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꺼내 보곤 한다.
파주운정3 GTX 문화공원 설계공모
사무실 운영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설계공모에 굳이 참여하지 않아서 다행스러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수동적인 계약 시스템에 따른 편향된 프로젝트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새로운 대상지에 대한 목마름과 계획안에 대한 탐구가 회사 내부적으로 필요했다. 파주 운정역 GTX 상부에 조성하는 공원의 콘셉트를 통해 과거의 오래된 유산에서 미래 공원의 의미를 찾으려 했고, 건축, 조형물 디자인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을 모색했다. 비록 낙선으로 끝났지만 올여름 한 차례 휘몰아친 설계공모 덕분에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실패했으나 실패는 없었다. 앞으로 관심 있는 설계공모 대상지가 있다면 지속적으로 참여할 생각이다. 공모에 함께 해준 인터의 모든 직원과 백순철·홍수연 소장(레드트리), 임근풍 소장(AIM 건축)에게 감사한 마음 뿐이다.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는 2000년에 人터조경기술사사무소로 출발했다. 1대 대표인 선우성에 이어 2013년부터 김수연 대표가 이끌고 있는 25년 차 조경설계사무소다. 좋은 생각과 함께하는 좋은 경험을 토대로 사람(人)과 터를 위한 디자인을 하려고 한다. 현란한 디자인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진 편안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정원, 공원, 오피스, 공동주택, 병원, 리조트 등 공공과 민간 영역을 아우르며 박준영, 최아람, 정구영, 김태현, 박준기, 서현호와 함께 다양한 조경 디자인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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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이름을 붙이지 않을 용기
도시공원은 실험이다
세계적 화학 회사 듀퐁(DuPont)의 어느 랩에서 한 실수가 나일론이라는 혁신으로 이어졌다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는 ‘실험 중에 일어난 의도치 않은 기적’의 대명사가 됐다.(각주 1) 요즘이야 실험 노트를 꼼꼼하게 적는 게 일반화되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시스템이 정착하기까지 오만 가지 실수들이 존재했을 테고 그중 어떤 것들이 의도 밖의 성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혁신의 전제는 체계도, 천재성도 아닌, 수많은 실험의 반복(iteration)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공간적 한계와 예산의 조건으로 도시공원 혹은 도시 공간에서 다양한 실험이 쉴 새 없이 이어지기란 어렵다. 준공까지 많은 자원이 요구되는 도시계획과 조경 분야의 특성상 일정한 수준의 성공이 보장되지 않으면 실험대에 오르기조차 쉽지 않다.
동시에 조경은 필연적으로 과정 중심적이다. 조경의 주요 요소―교목, 관목, 지표면의 생물, 수공간, 시설, 그 안의 사람들―가 서로 연계되는 과정을 통해 조성된다는 설계 이론적 차원의 과정 중심성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접근 가능한 공간을 직접 분석하고, 설계하고, 조성하고, 재조성하는 책임을 지고 있기에 매 순간 목적과 이용의 변화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즉 실험을 표방하고 작업을 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실 거의 모든 단계가 아주 조심스러운 공간적 실험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1980년대부터 이어진 도시공원 조성 과정은 국가 주도로 진행된 ‘도시 오픈스페이스 실험’ 그 자체다.
에피소드 1. 땅, 불, 바람, 물, 마음
공해와 싸우고 자연을 살리는 다섯 가지 힘이 모여 나오는 캡틴 플래닛.(각주 2) 얼마 전 영등포구에서 진행한 수변 공공 디자인 해커톤 ‘소셜 픽션, 수변 픽션’ 시민 참여 프로그램의 퍼실리테이터를 맡아 수변 문화와 도시 경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도시 경관, 공공 설치, 커뮤니티 디자인, 문화 프로그램, 미디어 아트의 다섯 분과(시민 참여를 표방한 팀플이다)가 수변 문화를 실험하고 확장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공공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 다룬 다섯 가지 주제만으로도 이렇게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는데, 실제 공공 문화를 이루고 있는 수십, 수백의 얽히고설킨 요소들을 어떻게 같이 굴러가게 만들 것인가. 최소 다섯 가지 초능력이 모여야 캡틴 플래닛이 튀어나온다. 지구를 지키고 자연을 살리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건가 싶다. 적어도 이렇게 다섯 개 분과가 모여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뒤 박수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캡틴 플래닛’이 나와서 뭔가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팀플, 진심으로 히어로를 찾게 되는 순간이다.
*환경과조경437호(2024년 9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해당 실수가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이 실수를 혁신으로 인지한 것이 듀퐁의 기지.
2. 생소한 단어의 나열이라면 꼭 구글링을 해보길 권한다. ‘출동! 지구특공대(Captain Planet and the Planeteers)’는 1990년대 제작 방영된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꾸준히 방영됐다. 다섯 대륙에서 모인 다섯 주인공이 공해 빌런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각자가 지닌 초능력 반지를 통해 슈퍼 히어로 캡틴 플래닛을 불러낸다는 설정. 몇 년 전부터 배우이자 환경운동가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회사를 중심으로 실사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