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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가을 잡지
    가을을 여는 9월호에선 뭔가 가을 냄새가 나야 할 것만 같다. 서걱한 바람에 흔들리는 풀밭 같은 느낌을 지면에 담을 방법이 없을까. 책장 구석에서 김수영을 꺼내 그의 ‘풀’을 다시 읽어본다. 알랭 코르뱅의 아름다운 역사책 『풀의 향기: 싱그러움에 대한 우아한 욕망의 역사』(2020)도 들춰본다. 이리저리 궁리해보지만 뾰족한 아이디어가 없다. 가을 잡지를 마감하는 시점이 무더운 8월 하순이라 그런 거라고 핑계를 찾는다. 입추도, 처서도 지났는데 정말 더워도 너무 덥다. 돌이켜보니 매년 9월호 만들던 때엔 늘 숨이 막혔다. 급기야 2014년 리뉴얼 이후에 나온 『환경과조경』 9월호 아홉 권을 쌓아놓고 짧은 시간 여행에 나선다. 2014년 9월호(317호) 특집은 ‘활자 산책’이다. 책으로 가을을 열자는 호기로운 기획. 네 명의 기자, 편집장과 편집주간, 여름방학 인턴까지 편집부 일곱 명이 출동했다. 9년 만에 다시 읽으니 뜨거웠던 그 여름의 파주가 떠오른다. 당시의 인기 연재물, 고정희의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의 제목은 ‘풍경의 발견’이고, 서영애의 ‘시네마 스케이프’에서 다룬 영화는 ‘프란시스 하’다. 세 달씩 이어가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필자는 김아연. 이달의 눈에 띄는 작품은 거버넌스 아일랜드. 예외 없이 더웠던 2015년 9월에는 그해 6월 완공된 경의선숲길 2구간의 설계 과정과 성과를 담았다. 설계자 안계동과 이남진의 원고에 유현준, 조동범, 조한결, 최정한의 글을 함께 실었다. 최이규의 인터뷰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에는 로리 올린이 등장한다. 2016년 9월호 표지는 오피스박김의 CJ 블러썸 파크다. 비평문을 쓰기 위해 광교 사이트 답사에 나섰던 그해 8월의 폭염이 아직도 생생하다. CJ 블러썸 파크 외에 오피스박김의 와이시티 공원과 한화데이터센터도 함께 실었고, 이화원의 국립세종도서관, 대통령기록관, GS SHOP 강서타워 옥상정원도 담았다. 당시에는 매달 외고 칼럼이 나갔다는 걸 새삼 깨달았는데, 이 341호의 칼럼은 허대영의 ‘랜드스케이프, 더 비기닝’이다. 잠시 시애틀에 체류하면서 밤낮 바꿔가며 편집자들과 소통하던 2017년 9월, 이달의 지면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건 제1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에서 수상한 학생 작품들이다. 그래서인지 잡지 느낌이 젊다. 꼭 6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잊고 있던 연재물, 설계 디테일을 꼼꼼히 짚는 안동혁의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를 다시 만난다. 2018년 9월호(365호) 주신하의 ‘이미지 스케이프’ 사진은 ‘칠면초의 숲’이다. 이 사진은 후에 두 권의 책 표지에 쓰였다. 그해 여름 화제와 논란을 함께 낳았던 패트릭 블랑의 부산현대미술관 수직 정원도 볼 수 있다. 2014년 리뉴얼부터 2018년까지 유지하던 표지 디자인을 2019년부터 변경했는데, 이 해 9월호 표지는 그룹한의 시흥 배곧한울공원이다. 전속 사진가 유청오가 조감으로 클로즈업한 갯벌 풍경에서 가을 냄새가 물씬 난다. 이달에는 그룹한뿐 아니라 이수, KnL, CA, JWL, 자연감각, 호원 등 여러 국내 조경설계사무소의 근작을 실었다.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이명준의 ‘그리는, 조경’과 곧 출간될 김충호의 ‘공간의 탄생’이 2019년 가을에 연재되고 있었다. 2020년 9월호(389호)에서 눈을 사로잡는 작품은 요즘 전 세계 조경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태국 조경가 꼿차꼰 보라콤(Kotchakorn Voraakhom)(Landprocess)의 탐마삿 대학교 옥상 농장과 쭐랄롱꼰 대학교 백주년 공원이다. 그녀가 이렇게 핫한 스타 조경가로 뜰 거라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다. 학생들 열독율이 높았던 나성진의 연재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는 그래스호퍼 연대기를 다룬다. 2021년 9월호(401호) 표지는 세월호의 상처를 치유하는 416 생명안전공원 설계공모 당선작의 평면도다. 표지 오른쪽 윗부분 통권 숫자에 401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전 달 8월호가 『환경과조경』 400호 기념호였던 것. 코로나 시대의 한복판, 2021년 봄과 여름의 지면에는 400호를 맞는 흥분과 부담이 가득했었다. 매달 책 한 권을 소개하는 연재, 황주영의 ‘북 스케이프’는 ‘옴스테드의 첫 영국 여행’을 다룬다. 2022년 9월호(413호) 에디토리얼은 한국 조경 50주년과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 광주 개최를 맞아 펴낸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한숲)을 소개한다. 2022년부터 새로 기획한 권두의 작품 소개 및 인터뷰 지면에는 얼라이브어스의 포스코 파크 1538을 담았다. 박희성의 연재 ‘모던스케이프’는 근대기의 동물원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더위를 핑계 삼아 과월호 삼매경에 빠진 사이, 편집부 기자들이 이번 호 마무리 작업을 마쳤나 보다. 김모아 기자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주간님, 에디토리얼 언제 끝나세요? 열 번째 9월호, 2023년 9월호와 함께 즐거운 가을 맞이하시길.
  • [풍경 감각] 이상하지만
    잠에서 깨면 싱크대를 구경하러 주방으로 간다. 지난밤, 거품을 내서 닦은 접시와 행주가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텅 빈 싱크대는 물기 없이 깨끗하다. 기분이 좋다. 지금 충분히 봐두어야 한다. 밥상을 차리고 커피와 간식을 만들어야 하니, 텅 비고, 말랐으며, 가지런한 싱크대는 지금 뿐이니까. 설거지는 고약한 일이다. 만든 음식은 하나인데 생긴 설거짓거리는 여러 개다. 달걀 프라이 하나를 해도 프라이팬과 뒤집개, 담은 접시, 젓가락까지 네 개의 설거지 감이 나온다. 기름 묻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그면 다른 그릇까지 자국이 남으니 따로 닦아줘야 한다. 구멍이 송송 뚫린 찜기와 채망은 사이사이 때가 남으니 구석구석 닦아야 하고, 수세미가 닿지 않는 깊은 물병은 청소 솔을 꺼내어 씻는다. 헹군 그릇은 카드로 성을 만들듯, 포개지 말고 공기가 통하도록 공간을 만들어 가며 쌓아줘야 잘 마른다. 깨끗하게 텅 빈 싱크대가 왜 좋을까. 바삭하게 마른 행주와 새것 같은 그릇, 물 자국 없이 매끄러운 싱크대 표면을 만져볼 때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펼친 기분이 된다.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오늘 밤에도 설거지를 할 것이다. 내일 아침, 단정한 싱크대를 구경하고 싶으니까.
  • [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비움
    근대적 도시 제도는 태생적으로 밀집 포비아 성향을 가진다. 18세기 산업화와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야기한 정주 환경의 악화는 밀집은 죄악이라는 생각을 낳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이 곧 도시계획과 제도의 소명이었다. 그 결과 현 도시 제도는 대체로 ‘채움’을 억제하고 ‘비움’을 강제하는 방향성을 가지며, 채움과 비움의 양과 크기에 대해 비율, 최대·최소의 기준을 제시한다. 우리의 도시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제도, 크기를 정하다’(2023년 5월호)에서 언급했듯, 신도시 계획은 수용 인구와 신도시 규모를 기준으로 공원·녹지의 비율을 설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거 지역에서는 남쪽 대지의 건물이 북쪽 대지에 드는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건물 높이에 따라 이격거리를 만족시키는 계획이 필요하다. 크게는 도시 단위에서 작게는 필지 단위까지, 여러 도시 제도는 채움에 대해 최소한의 비움을 확보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도시 제도가 채움과 비움의 양에 관여하는 것만으로 충 분한 것일까? 채움과 비움의 총량적 비율은 도시의 모습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표지만, 채움에 대한 비움의 방식에 의해서도 도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그림 1). 우리의 도시 제도가 어떤 채움과 비움을 만들어 내는 지 살펴보자. 모아서 크게 혹은 나눠서 여러 곳에, 비움의 배분 근대 도시 제도가 채움에 대해 최소한의 비움을 확보한다면, 그 비움은 도시 내에서 어떻게 배분되어야 할까? ‘그림 1’의 뉴욕과 교외 단독주택지는 밀도와 높이도 매우 다르지만, 비움의 배분 방식도 매우 다르다. 전자는 개별 대지에는 건축물을 거의 꽉 채워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광장과 공원 등 도시에 공동의 비움을 마련하는 것이 우세한 도시를, 후자는 개별 대지 안에 일정 비율의 비움을 확보하는 것이 우세한 도시를 보여준다. 달리 말해, 비움의 배분 방식 매트릭스에서 꽤 극단적인 위치에 해당하는 예다.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실현하는 배분 방식으로 어떤 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시의 기후는 물론 긴 시간 형성된 해당 사회의 공간 문화를 거스르는 비움의 특정한 배분 방식이 무작정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한 도시 내에서도 중심업무·상업지구냐 외곽의 주거지냐에 따라서, 산이나 하천 등 자연 지형요소의 인접 분포에 따라서, 도시 조직의 특성에 따라서, 채움과 비움의 배분 양태는 달리 평가될 것이다. 우리의 도시에서 채움과 비움의 배분에 관여하는 대표 제도로는 공동의 비움을 확보하기 위한 공원·녹지 설치 기준과 개별 대지 내 비움을 확보하기 위한 건폐율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두 제도가 애초에 비움의 배분 방식을 설정하는 짝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며 목적한 바가 서로 다르다. 광장 등 다양한 형태를 포괄하는 공원·녹지 설치 기준은 도시민이 도시공원이라는 어메니티를 공평하게 충분히 누리는가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도시 지역 거주 인구 1인당 6m2로1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이는 총량적 접근으로 대개 시 또는 구, 생활권 등의 공간 단위로 달성 여부를 따지게 된다. 건폐율은 대지 내 위치에 관계없이 최소한의 공지를 확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 대지면적 대비 건축물이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을 용도 지역에 따라 20~90% 이하로 제한한다. 두 제도의 조합이 비움의 배분 방식 매트릭스에서 어디쯤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도시의 비움에서 어떤 방식의 배분이 우세한지를 절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두 제도가 설정한 기준에서 드러나듯, 도시 공간의 여건에 대응해 공동으로 확보하는 비움과 개별로 확보하는 비움 사이 균형점을 달리 설정하고, 이를 위해 두 제도의 기준을 상호 조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거주 인구가 아닌 주간 상주 인구가 많고 건폐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도심지에 공동의 비움을 더 확보할 제도적 근거는 없다. 대지면적이 작은 저층 주거지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이루어진 주거지는 실질적인 건폐율의 차이가 현격하지만 공원·녹지 설치 기준은 동일하게 적용된다(그림 2). 이처럼 현 제도는 도시와 개별 필지라는 양 극단의 단위에서 비움의 양을 정할뿐, 도시 내에 비움이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가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가 만든 나쁜 비움 도시 제도가 채움을 억제해 얻는 비움은 모두 도시 공간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여러 연구자는 어떤 광장과 공원, 블록의 중정과 건물의 전면 공간이 잘 쓰이는지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화이트(William H.Whyte)는 1970년대 뉴욕에서 여러 외부 공간을 관찰해 어떤 곳이 사람들을 모으고 사랑 받는지 분석했다. 적당한 크기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 햇빛을 쬐며 앉을 수 있는 벤치, 아름다운 식생과 수공간 등 매력 요소,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 등이 활력 있는 외부 공간을 만드는 인자로 제시된다.2 이런 특징들을 갖춘 ‘좋은 비움’을 만드는 데는 제도보다는 계획과 디자인의 몫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도가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맞는 좋은 비움의 조건을 개별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며, 설령 몇몇 지침을 제시하더라도 그 지침을 따르지 않는 좋은 공간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쁜 비움’도 개별 계획가와 디자이너만의 몫일까? 우리 도시 공간에 존재하는,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는 외부 공간에는 도시 제도의 몫이 분명히 있다. 토지 수요가 높은 도시에서 대규모 비움을 확보하는 것은 공공 재원과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조성의 타당성과 목적과 활용을 제도 바깥에 둘 수 없다. 따라서 개별 대지의 비움에 비해 공동의 비움에는 상대적으로 더 구체적인 설치 기준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3’ 기사의 사례는 이를 설계한 디자이너의 역량 부족 탓일까? 동인천 광 장은 교통광장 중 역전광장에 해당하며, 관련 법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비움을 만들기에 충분한지 생각하게 된다. *환경과조경425호(2023년 9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2. William H. Whyte, The Social Life of Small Urban Spaces, Project for Public Spaces, 1980.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공간이오 식물과 함께 깊이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정원이 과시의 수단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면서 정원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 비싼 소나무를 식재하는 정원에서 탈피해 내가 심고 가꾸는 한 그루 나무와 한 포기 야생화에 의미를 담고, 꽃이 피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원을 즐긴다. 정원은 더 이상 화려할 필요가 없으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사치스러울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그러나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은 담백한 정원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지향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세 가지 기준을 정했다. 공간 구조의 단순화 너무 복잡한 공간 구조는 오히려 공간에서의 감흥을 떨어뜨리며 조잡해 보이게 만든다. 특히 정원을 처음 만들거나 너무 많은 것을 한 공간에 담고자 할 경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것저것 욱여넣게 되고 완성 후 시간이 지날수록 조잡해진 공간을 보며 후회한다. 공간을 쪼개는 것보다 절제하고 단순화해 공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감흥)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의 감흥이 점점 증폭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자연스러운 식재 우연히 국립수목원을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주목을 보고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띵하게 울린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주목의 자연스럽게 뻗은 줄기와 거친 질감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원뿔형 토피어리 주목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인위적으로 뿌리 주변의 줄기들을 잘라 잘 관리하며 키워온 외대로 자란 교목(공사목 스타일)보다는 멋대로 자라난 다간형 교목이나 밑동부터 여러 가지가 나오는 관목은 정원에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더한다. 다간형의 겹쳐진 줄기를 가진 식물은 좁은 정원에서 오히려 깊은 공간감을 느끼게 해주며, 꽃이나 잎의 색깔이 화려하거나 위압적인 소나무가 아니더라도 정원의 감흥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원 디자인에서 다간형 교목이나 관목을 선호한다. 재료의 물성을 살리는 시설물 과도하게 가공한 시설물의 사용을 지양한다. 그러한 시설물은 재료 본연의 물성이 사라지고 인공적 느낌이 강해지면서 검소하거나 세련된 느낌을 반감시킨다. 최소한의 가공과 디자인으로 나무는 나무로서, 돌은 돌로서, 철은 철로서의 본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을 때, 공간의 편안함과 세련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가급적 돌의 물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두께감과 무게감이 있는 디딤석을 사용한다. 나무는 통나무의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트렁크 형태의 벤치를 활용한다. 철로는 날렵하고 차가움을 느낄 수 있는 형태의 시설물을 디자인한다. 콘크리트는 콘크리트답게 무채색의 도시적 세련됨이 돋보이게 연출하고자 한다. 공간의 켜와 시간의 켜 공간의 켜, 깊이를 더하다 이오(異澳)에 담긴 뜻처럼 깊이가 남다른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공간의 켜를 쌓아 깊이를 만들어 공간에서의 감흥을 극대화시킨다. 오태현 소장의 ‘오픈 월 링크드랜드스케이프(Open Wall: Linked Landscape)’(2020년 제2회 LH가든쇼)는 투명한 커튼 월과 돌 담장, 그리고 그 너머의 수목들이 수평적으로 겹치며 시각적으로 공간이 깊어 보이게 했다. 이러한 깊이 있는 공간감을 만들기 위해서 설계 단계부터 3D 작업으로 끊임없이 공간을 분석하며 시뮬레이션한다. ‘청초: 자세히, 오래 보아야 하는 정원’(2020년 제2회 LH가든쇼)은 산단풍의 배식에서 굵은 줄기의 단풍나무를 앞으로 배치하고, 가는 줄기의 단풍나무를 멀리 식재했다. 두꺼운 줄기는 더 두껍게, 멀리 있는 가는 줄기는 더 가늘게 보이도록 착시 현상을 이용해 공간의 켜를 깊어 보이게 연출했다. 산속 나무들을 보면 여러 줄기가 겹치며 깊은 숲속의 공간감을 만드는 것처럼. 게다가 안과 밖에서 보는 풍경 프레임에 자연스럽게 식재가 겹치는 경관은 공간의 켜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시간의 켜, 즐거움을 더하다 정원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즐거움은 바로 시간의 켜다. 조성한 직후 완성된 모습을 보며 정원의 매력을 느낄 수 있지만, 더욱 풍성한 재미를 맛보려면 꾸준함이 필요한 가드닝이 필수적이다.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이미 많은 이가 공감하고 있다. 사계절로도 부족해 일곱 계절로 정원의 아름다움을 말한 피트 아우돌프가 그랬듯, 정원에 식재된 다양한 관목과 숙근초가 계절마다 변화하는 모습은 다양한 시간의 켜를 만들어 낸다. 한양타워 옥상정원의 여름과 겨울 화단의 모습을 보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상록수는 작은 블루스타향나무 5주가 전부다. 겨울의 썰렁한 경관을 보완하기 위해선 상록수가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디자인했다. 우리가 디자인한 정원에 식재된 수십 종의 식물들이 계절마다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들은 시간의 켜를 쌓아가며 정원의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디테일한 설계와 시공 디테일이 살아 있는 설계와 시공은 설계와 시공이 모두 가능한 우리의 장점이자 자랑이다. 설계만 하는 설계사무소는 현장의 모든 상황을 100% 예상하며 설계할 수 없어 늘 아쉬움이 있다. 시공사는 남이 설계한 것을 도면에 의존해 재현하다 보니 설계 의도를 100% 표현하긴 힘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계와 시공을 같이 작업하다 보니 과도한 도면으로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예상치 못한 현장의 상황으로 부족한 설계를 현장에서 보완할 수 있다. 게다가 정원 디자이너가 현장에 상주해 결정해야 할 사항을 설계 의도와 현장 여건에 맞게 결정한다. 현장 경험이 많은 소장의 경험치가 보태져 섬세한 정원으로 완성되어 간다. 설계는 시공 탓을, 시공은 설계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결과의 책임은 오롯이 우리 몫이다. 현장에서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수시로 소통하다 보니 클라이언트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되며,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도 상당히 높다.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들이 지속적으로 공간이오를 지원하는 정신적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며 우리의 자신감에 힘을 실어 준다. 식재 설계 식재 설계는 우리의 차별점 중 하나다. 일단 수종이 다양하기도 하지만, 도면을 그리는 방법에도 차이가 난다. 특히 초화를 표현할 때 넓은 면적을 하나의 해치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포트 한 포트 직접 현장에서 식재한다는 상상으로 도면을 그려 나간다. 이러한 식재 계획은 자연스러움을 통한 편안함, 그리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정원 디자인을 위한 기본요소가 된다. 섬세한 식재를 하기 위해 관목, 초화 식재 공사 때는 전 직원이 현장에 출동한다. 단순한 관리자 역할이 아닌 직접 식재하는 가드너 입장에서 현장에 투입되며,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스럽게 위치와 꽃의 얼굴을 보며 식재한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기에 입사한 직원들은 공간이오의 스타일을 익히는 일종의 트레이닝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을 땐 모으고 흩어질 땐 흩어지는 공간이오만의 식재 스타일을 구현한다. 식재 계획과 시공이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설물 설계 시설물은 정원의 공간 디자인을 위한 요소로 식물의 섬세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중요한 배경이다. 세밀한 도면으로 계획해 섬세한 시공으로 완성도를 높이려고 한다. 시설물의 디테일한 상세도를 만들어 시공의 완성도를 높이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그 공간만의 시설물을 디자인하고 만들기도 한다. 소재의 종류, 컬러와 마감재 선정은 항상 마지막 발주까지 거듭해서 고민한다. 특히 벽 마감재의 컬러 선정은 면적의 크기에 따라 색감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한다. 울산권역 정원드림프로젝트 때 고래의 색을 결정하기 위해 세 가지 핑크색을 구입해 직접 테스트해서 결정하기도 했다. 청초 작업 때도 자연스러운 목재의 느낌을 찾아내기 위해 목재상을 수차례 찾아다녔다. 정원 관리 공간이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정원 관리다. 설계하고 시공한 정원을 모니터링하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어 일석이조다. 다만 정원 관리를 제초 작업이나 교/관목 전지 정도로 인식하는 탓에 아직은 가드너로서 정당한 인건비를 청구하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 정원 사업이 확장되면 정원 디자이너나 정원 컨스트럭터(constructor)보다 정원 유지·관리를 하는 정원 관리 가드너의 수요가 더 부족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원 관리는 정원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보살피는 중요한 일이며, 우리는 오랜 관리 계약으로 정원을 지속적으로 완성해 가고 있다. 정원 관리의 하이라이트는 정원 조성 후 과도하게 자라난 식물의 분주나 가지치기와 생육에 맞는 환경에 식재되지 못한 식물들의 재배치에 있다. 정원의 방위와 주변 건물들의 그림자를 고려하며 식재했지만, 예상치 못한 그늘이나 물고임 현상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관리계약과 정당한 인건비 책정이 필요하다. 정원 관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관수다. 정원 식물에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양의 물을 공급하는 것이 정원 관리의 기본이다. 우리는 건강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관수 시스템 설치를 권장한다. 물론 초기 비용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기후변화로 생기는 봄 가뭄이나 주기적으로 제 시기에 관수를 못해 발생하는 식물 고사를 막을 수 있어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으며, 설치 후 만족도가 높은 아이템 중 하나다. 우리의 프로젝트 중구 빈집 정원 서울 한복판 구도심에 생긴 빈집의 자투리 공간을 정원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몇 평 남짓한 빈집을 헐어낸 자리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정원을 조성했다. 공사 여건이 열악했지만, 간결하고 절제된 디자인으로 좁고 보잘것없는 공간을 편안하고 세련된 정원으로 만들었다. 카페 정원 2020년 우연히 맡게 된 카페 정원은 LH가든쇼에서 선보인 청초의 확장 버전이다. 늘 관심 가졌던 그늘정원을 구현할 수 있어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청초에서 시도해 보았던 음지 식물들을 실제로 넓은 면적에 식재할 수 있었다. 음지 식물로 차분하고 편안한 그늘정원을 디자인했다. 단순한 선형의 동선 외에는 이렇다 할 디자인은 없지만, 식재 자체로 공간의 아우라를 만들어 낸 프로젝트였다. 지하 주차장 위의 인공지반이라는 제약으로 인해 교목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고 관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립형으로 자연스럽게 자란 관목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이 됐다. 돌이켜보면 매순간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클라이언트의 결정은 늘 한결 같았다. 전문가 관점에서 결정을 내려 달라고 하다 보니, 대부분의 결정은 디자이너 몫이었다. 결과 또한 디자이너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했었고, 그 고민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프로젝트라 애착이 많이 간다. 테라스 정원 최근 하이엔드 레지던스가 많이 늘어나며 테라스에서 정원을 즐기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최근에 우리도 이러한 테라스 정원 프로젝트를 맡았다. 심플한 느낌의 백색 건물에 경관 중심의 자연스러운 정원과 이용자 중심의 모던한 정원을 디자인했다. 진주 월아산 작가정원 지난해 진주 월아산 작가정원 지명 설계공모에 참여했다. 공간이오가 처음으로 공모를 준비했던 프로젝트였다. 음양오행의 원리를 이용한 자연 복원을 콘셉트로 디자인했고, 고정희 박사의 식물적용학을 기반으로 식재 설계를 했다. 아쉽게 당선작은 되지 못했지만, 첫 공모전 작품이라 애정이 남다른 프로젝트였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생활정원 2020년 평택역, 2021년 용인시장 그리고 2022년 전북대학교 특성화캠퍼스(익산)와 광양시청 앞 광장은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발주한 생활정원 프로젝트였다. 정원작가로 참여해 기본계획과 실시설계를 진행했다. 특히 2022년 전북대 캠퍼스와 광양시청 현장은 설계와 시공을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여서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밸런싱 네이처 2022년 제3회 LH가든쇼 해외초청작가 앤디 스터전이 설계한 정원 ‘밸런싱 네이처’를 시공할 기회가 생겼다. 사명감을 갖고 시공했다. 초청작가정원 ‘경외원’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 금전을 쏟아부었다. 앤디 스터전의 기본계획만으로 실시설계 없이 현장의 숍드로잉으로 레벨을 파악하는 등 어려움은 많았지만, 그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다. 주택정원 지난 겨울 동안 설계를 하고 올봄에 시공한 정원이다.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준 클라이언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매순간 합리적이며 이유 있는 결정으로 순조롭게 프로젝트가 흘러갈 수 있었던 즐거운 프로젝트였다. 정원의 배경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요소이기도 한 기존의 대형 수목이 공간에 잘 녹아들게 디자인했다. 공간마다 켜를 만드는 데 고민한 프로젝트였다. 공간이오(空間異澳)는 팀펄리 L&G의 플랜팅 디자인 중심 정원설계와 오스케이프 스튜디오의 공간 디자인 중심 조경설계가 만나 디테일이 살아있는 완성도 높은 정원 공간을 설계, 시공하는 정원 스튜디오다. 정원을 자연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자 삶의 쉼이며 공간을 통해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는 예술로 생각하고 한 땀 한 땀 만들어 나간다. 두 대표의 성인 이(李)와 오(吳)에서 발음을 가져왔지만, 한자는 異澳(다를 이, 깊을 오)를 쓰고, 깊이가 남다른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뜻을 담았다. 미니멀한 디자인을 통해 세련되면서도 정갈한 정원을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 [모던스케이프] 인물을 기념하는 법
    기념과 숭배의 의례는 인류의 오랜 전통으로, 동상은 그 수단이 되었다. 높은 대좌 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 동상은 신전이나 교회에 설치되어 복종 혹은 권위를 상징했다. 이때 동상은 신성한 종교와 같아서 낙서 등의 불경스러운 행동은 용납하지 않았다. 종교와 동일시될 만큼 신성하게 여겨진 동상은 시민 사회의 태동과 함께 국가 권력의 과시용 혹은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상징용으로 전환된다. 대표적 예가 프랑스의 마리안느(Marianne) 동상이다. 마리안느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혁명과 공화정의 가치를 담았던 가상의 여성으로, 도시와 농촌 코뮌 전역에 동상이 확산된 바 있다. 지금은 마리안느 흉상을 설치하지 않은 관공서가 없을 정도니 프랑스의 대표 동상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신생 국가의 경우,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을 동상으로 제작해 이용하기도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회쇠크 테레(Hősök tere, 영웅 광장)는 헝가리 건국 1,000년의 역사와 위대한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에 조성된 곳이다. 광장 중앙의 대천사 가브리엘 동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회랑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헝가리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영웅들을 표현한 청동상을 돌기둥과 나란히 세웠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특별한 장소를 동상을 이용해 기념하기도 했다. 1862년 조성된 오스트리아 빈 시립공원(Stadtpark)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슈베르트, 모차르트, 안톤 브루크너 등 빈의 저명한 예술가 동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근대기에 들어서면서 동상은 때로는 사회의 부조리에 맞선 급진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때로는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영웅을 기념하고, 또 한편으로는 문화예술 분야의 천재를 기념하며, 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공간을 압도하는 강렬한 장치로 다채롭게 활용됐다. 한국에서는 동상이 1960~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건립됐다. 그 중심에는 1966년 8월 11일에 발족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가 있다. 1964년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37인 선현 석고상의 착색, 결락 등의 문제가 불거진 것이 위원회 발족의 배경이었다. *환경과조경425호(2023년 9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류기현, “‘애국선열’의 거리 만들기”, 『광화문 앞길 이야기』, 서울역사편찬원, 2021, pp.182~196. 서울특별시 푸른도시정책과, 『공원현황』, 서울시, 2010. 전우용, “서울의 기념인물과 장소의 역사성”, 『서울학연구』 25, 2005, pp.89~122. 정호기, “박정희시대의 ‘동상건립운동’과 애국주의”, 『정신문화연구』 30(1), 2007, pp.335~363. 조은정, “한국 동상조각의 근대이미지”, 『한국근대미술사학』 9, 2001, pp.285~287. 에릭 홉스본 외, 박지향·장문석 역,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 그림 출처 그림 1~2. 위키피디아 그림 3. 국가기록원 그림 4. 대한뉴스 제468호 장면 캡처, KTV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