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에디토리얼] 소통과 연대의 건축
    불벼락 뙤약볕, 독자 여러분은 이 여름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잠시나마 불볕더위를 피하며 일상의 도시 경험을 다채롭게 할 수 있는 장소로 이번 8월호에 소개하는 아모레퍼시픽 신사 옥을 권한다. 대기업 본사 건물이라고 미리 위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공항 못지않은 검색을 거쳐야 할 거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 반바지 입고 샌들 신었다고 주저할 이유도 없다. 4호선 신용산역에서 바로 연결되는 지하층에서 에스컬레이터 한번만 타면 외부인에게 개방된 이 건물의 넓고 높은 아트리움이 나온다. 특별한 정문 없이 사방의 가로 어디에서든 문만 열면 이 아트리 움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1층부터 3층까지 하나로 트인 공용 공간이다. 한강로 쪽 출구 옆 갤러리에 전시 중인 ‘아모레퍼시픽과 건축가들’에서는 이 건물의 설계자 데이비드 치퍼필드뿐만 아니라 그동안 아모레퍼시픽의 건축과 조경 프로젝트를 맡아 온 알바로 시자, 김종규, 정영선 등의 작업을 영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 도록과 자료, 포스터가 2층 구조의 서가에 빼곡한 도서관 apLAP 에서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미술 아카이브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 유료이기는 하지만 지하층의 미술관 APMA 에서는 양질의 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지금은 개관 기념으로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인터렉티브 작업이 전시되고 있다. 이 초대형 보이드 공간에서 꼭 교양 있는 문화인인 척해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1층과 3층 사이의 아트리움은 일종의 광장이다. 다양한 색의 나일론을 엮어 만든 1층의 대형 벤치 ‘집착’(이광호 작)은 친구를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이미 자리 잡았다. 아모레 스토어를 구경하다가 2층과 3층에 널려 있는 세련된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윤여범, 최형문 작)에서 마음껏 책을 보거나 졸아도 된다. 독서와 휴식에 지치면 고개를 들어 천장을 감상하면 된다. 아트리움의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5층 공중 정원의 연못 바닥이 겹쳐 빛과 물이 협연한다. 실내의 광장을 충분히 즐겼다면 건물 밖으로 나와 거대한 금속 원판과 얕은 연못이 서로를 비추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 작품 ‘오버디프닝overdeepening ’의 환영을 둘러보고, 키 큰 백합나무 100주가 심긴 야외 정원을 산책하면 된다. 이면 도로로 몇 걸음 옮기면 이른바 ‘용리단길’ 이다. 신사옥 입주 이후 ‘아모레 효과’에 힘입어 수십 년째 멈춰 있던 한강로2가와 용산 우체국 주변 골목이 변하고 있다. 여느 ‘뜨는 길’들이 그렇듯 하루가 다르게 ‘힙’한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민간 기업의 사옥이나 업무 공간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교류와 연대의 철학이 시도된 건축이다. 설계자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말하는 “직원뿐 아니라 지역 주민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소통과 유대의 건축” 은 듣기에만 그럴듯한 레토릭이 아니다.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서 초고층 거대 건축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속이 텅 빈 건축을, 개방형 공유 공간을 존중한 건축주의 철학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건물에 담긴 공공적 가치의 핵심은 마치 광장과도 같은 초대형 아트리움이지만, 더 큰 매력은또 다른 텅 빈 공간 세 곳에 있다. 5층, 11층, 17층에 과감하게 배치한 세 개의 공중 정원은 도시 건축의 백미다. 각각의 공중 정원에는 조경가 박승진의 단순하면서도 섬세하고 정갈하면서도 강한 디자인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본문에 싣는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조경 설계와 이명준 박사의 비평 에서 그 면모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박승진 소장이 그간 추구해 온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의 조경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세 개의 공중 정원이 숭고한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상상의 한계 그 이상으로 다가오는 도시의 풍광 때문이다. 5층 정원 에서 조감할 수 있는 용산 미군 기지의 풍경에 용산공원의 미래가 오버랩된다. 지난 이십 년간 그려온 여러 버전의 용산공원 계획안보다 훨씬 감동적 이다. 11층 정원에서 마주하는 용산과 한강 경관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생생하게 도시 서울의 민낯과 속살을 보여준다. 북쪽으로 열린 17층 정원의 풍광은 글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다. 남산이 왜 서울의 랜드마크인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아쉽게도, 우리는 이 공중 정원들에 오를 수 없다. 홍보팀의 협조와 안내를 받는 취재나 공식 행사가 아닌 이상, 전망대가 아니라 기업의 업무 공간이자 직원의 휴식 공간인 곳을 개방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환경과조경』 이름으로 취재차 방문했을 때 경험한 감동을 연구실 학생들과 함께 간 답사에서는 전달할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까웠다. 소통과 연대의 건축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자 한 아모레퍼시픽이라면, 조금 더 섬세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요일의 특정한 시간대에 한해 제한적으로라도 공중 정원을 개방하면 어떨까. 아니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라도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어떨까.
  • 비평: 정원섬, 보이는 정원
    조금 우회하여 이렇게 시작하자. 지금까지의 조경은 보이지 않았다고. 피터 워커와 멜라니 시모는 『보이지 않는 정원들(Invisible Gardens)』에서 동시대의 조경 작품들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하면서 이에 반해 조형성이 두드러진 작품을 내놓았던 모더니즘 계열의 조경가들을 탐구한 바 있다.1 조경 이론가 엘리자베스 마이어는 이러한 논의를 좀 더 정교한 담론으로 진화시켰다. 마이어는 조경을 크게 ‘환경적 혹은 생태적 조경’과 경관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예술로서의 조경’으로 분류하고,2 두 가지 조경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생태적 성능을 탑재하면서도 예술로 인식되는, 말하자면 지속의 미(sustaining beauty)를 지향하는 조경 설계가 필요 하다고 주장했다.3 조경이 ‘보이지 않는다(invisible)’고 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 설계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하여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예술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생태적 성능을 지닌 경관을 만들기 위한 조경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대지 예술에 영감을 받은 조지 하그리브스는 생태적 성능을 탑재한 유려한 랜드폼(landform)을 설계해 왔고, 마이클 반 발켄버 그는 자연의 프로세스를 경험하게 하면서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설계 작품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근래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은 재활용한 건축물과 구조물 덕택에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쉬웠다. 마이어의 논의는 밀레니엄을 갓 넘긴 시점에 시작되었지만, 그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랜드폼을 디자인하는 실험이 빈 번하지 않은 국내에서 아직 조경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인식적으로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조경은 좀 더 보일(visible)필요가 있다....(중략)... * 환경과조경 364호(2018년 8월호) 수록본 일부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의 실무와 교육 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과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스케일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는 차원에서 본 연재의 흐름을 다시 짚어 보자. 나는 설계의 구성 요소를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세 차례의 연재를 통해 각각의 범주에 속하는 요소에 대한 나의 설계 관점을 공유하고자 한다.1첫 번째 범주에는 분위기, 맥락, 주제와 같이 개념적인 요소가 속한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요소는 스케일, 형태, 비례, 색, 질감과 같이 개념적인 동시에 실재성을 갖는 것들이다.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요소는 식물, 빛, 온도, 습도, 바람 등과 같이 공간을 구성하는 실재적 재료다. 공간을 짓는 일은 종종 글을 쓰는 일에 비유되곤 하는 데, 앞서 예시한 요소 중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은 글을 구성하는 어휘(단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요소는 어휘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문법 내지는 어투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아직 설계가로서의 독창적인 어투를 만들지 못했다. 아마도 많은 젊은 설계가가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스타일2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요소 중 최근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스케일’에 대해 집중하여 다루고자 한다. 스케일 ‘이 드로잉은 스케일이 안 맞다’ 또는 ‘이 공간은 스케일이 잘 맞다’. 설계 수업을 들은 적 있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이와 비슷한 코멘트를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케일이란 무엇일까? 흔히 우리는 스케일을 ‘크기나 치수’라고 이해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스케일은 모든 공간 구성 요소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작은 정원을 예로 들면, 정원의 규모, 그 안에 놓인 나무와 꽃의 크기, 산책로의 폭, 그것을 포장 하는 재료의 크기와 패턴, 산책로 옆에 놓인 벤치의 적절한 높이 등을 결정하는 일이 모두 스케일 이슈에 해당한다. 그런데 과연 스케일을 단순히 크기나 치수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까?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스케일 이라는 표현 대신“친밀함의 수준”3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의 표현은 크기나 치수에 집중하는 기존의 스케일에 대한 관점을 확장시킨다. 이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크기뿐만 아니라 공간이 나와 떨어진 거리, 근접성, 공간이 나에게 전달하는 감정적 요소(편안함, 압도감, 친밀함 등)를 포함한다....(중략)... **각주 정리 1.논의의 자세한 취지와 방향은 연재 1회차(『환경과조경』 2018년 7월호, pp.94~101)를 참고 바란다. 2.문학 작품에서 작가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이나 구성의 특질, 『표준국어대사전』, 2018. 3.Peter Zumthor, 장택수 역, 『분위기』, 나무생각, 2013, p. 49. *환경과조경364호(2018년8월호)수록본 일부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정원과 조경 설계 실무를 익혔다. 수상 경력으로 제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제3회 대한 민국 신진조경가 대상 설계공모전 대상, 2017 코리아가든쇼 대상 등이 있다. 2017년 한강예술공원 시범사업의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스튜디오 오픈니스(Studio Openness)를 창업하여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정강환 배재대학교 관광축제호텔대학원장 축제의 정석
    지난 5월, 대전 둔산에서 서구힐링아트페스티벌이 열렸다. 주말을 낀 사흘간의 이 축제는 올해로 3회를 맞은, 미술을 주제로 한 보기 드문 지방 축제다. 전국적으로 아트×페스티벌 형태의 행사가 무수히 많은데 무슨 소리인가라는 의문에는 약간의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대부분의 아트 페스티벌은 공연 위주다. 음악, 무용, 연극 등 사실상 시각 예술보다 훨씬 흡인력이 강한 장르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미술은 관람객 스스로 다가가야 하고 작품의 뜻과 선호에 대한 꽤나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요구한다. 지금 시대에도 대중화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밥 한 끼 값만 지불하면 장영주든 카라얀이든 내게 편한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음악에 비해 미술은 아무래도 기본 단위가 크고 상당히 번거롭다. 그래서 여느 미술 축제나 엘리트주의로 흐르기 마련이다. 예술 감독을 중심으로 작가를 선정하고 대형 설치 위주로 진행된다. 서구힐링아트페스티벌은 지역의 명망 있는 예술가 80여 명이 도심 공원 내 작은 천막에 각자의 갤러리를 마련하는 방식이다. 콜렉터에게 익숙한 아트 페어가 거리로 나온 셈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부담 없이 관람하고 구입할 수 있는 소품을 출품하는 원칙을 세웠다. 알아먹지도 못할 거대한 조형물이 아니라 중년 여성층이 선호하는 공예 작품, 맘먹으면 살 수도 있는 눈높이 예술이 주가 됐다. 고객이 누구인가를 고민하고 고객 중심의 사고를 한 덕분이다. 단지 관람객만이 아니다. 작가 또한 주민이고 고객이다. 축제는 그동안 만날 일이 없었던 두 고객층의 직접적 대화의 장을 이끌어냈다. 지역민이 보지 못하는 지역의 핵심 자산, 즉 집약화된 예술인 인구를 발굴하고 그들을 산업화하려는 노력이 곧 축제였기 때문이다. 서구힐링아트페스티벌은 배재대학교 정강환 교수의 근작이고, 소품에 가깝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심플하다. 성공하는 축제를 만드는 마이다스의 손.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대표 축제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보령머드축제, 서울정동야행, 고령대가야체험축제, 서산해미읍성축제, 광주7080충장축제, 감천마을골목 축제 등을 개발했고, 금산인삼축제, 진주남강유등축제, 김제지평선축제, 함평나비 축제 등 장기간 컨설팅을 해 오며 육성한 축제는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덕분에 그는 보령시, 금산군, 진주시, 고령군, 서울시 중구, 김제시 등 전국 여섯 곳의 명예 시민, 군민, 구민이기도 하다. 관광의 약한 고리였던 야간, 겨울, 골목에 축제를 결합시킨 혁신을 이끌어왔으며 우리나라 축제의 패러다임을 바꾼 장본인이다. 도시 디자인과 재생에서 축제와 관광이 너무나 중요한 시대다. 건강하고 매력적인 도시가 되려면 특정 시간대에만 이용된 후 나머지 시간엔 공동화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선망하는 글로벌 도시는 대부분 소위 말하는 24시간 도시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과 새벽까지 도시는 여러 종류의 사람에 의해 사용되고 즐겨진다. 24시간 도시를 만드는 데 있어 축제와 관광의 역할은 막대하다. 관광객은 단지 도시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도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주체가 된다....(중략)... * 환경과조경 364호(2018년 8월호) 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와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명사의 정원 생활] 양산보의 소쇄원, ‘출처지의’의 본보기로서 도의적 삶의 실천 현장
    인간 양산보 짧은 유학, 긴 산림처사 양산보(1503 ~ 1557, 호는 소쇄공瀟灑公또는 처사공處士公) 는 조선 중기 사화의 소용돌이를 비켜 살았던 사람이다. 나이 17세 되던 해에 스승 조광조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목격하고는 그길로 벼슬길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생을 마쳤다. 한참 세상을 향한 푸른 꿈을 키우던 청년 양산보에게 탁월한 학식과 도덕적 가치로 당시 조정을 쥐락펴락했던 스승이 졸지에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건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10대 후반에 좌절된 청운의 꿈 대신에 택한 은자로서의 삶을 죽을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지켜낸 그는 진정한 처사(處士)로 높이 평가받았다. 비록 본의 아니게 포기한 벼슬이었지만 중년 이후 몇 번에 걸쳐 들어온 벼슬 제의에 일절 응하지 않았던 그가 평생 지키려 애썼던 가치는 ‘소학(小學)’으로 대표되는 도의와 윤리적 규범이었다. 양산보와 비슷한 시대를 산 율곡 이이는 “참된 유자(儒者)는 벼슬길로 나가서는 당대의 도를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자유로운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물러나 은거하면 만세에 가르침을 전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깨우침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양산보는 근처에 있던 옛 절터에 죽림재라는 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가난한 이들의 혼인이나 장례를 돕는 등구휼에도 힘써 인근에서 두루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 조선 선비의 신념으로서 출처지의(出處之義)를 제대로 실천한 그의 삶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정원가로서 소쇄옹 양산보 평생 단 하나의 정원을 조영했지만 양산보는 한국 최고의 정원가로 손색이 없다. 필자는 그 근거를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정원 자체가 심미적으로 빼어나다는 점이다. 소쇄원은 흔히 한국 정원의 특질을 가장잘 보여주는 현장으로 불린다. 기존 계류와 지형에 맞춰 자연스럽게 구성한 공간의 영역이나 요소의 안배,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시각적 연계와 동적 연결성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극적 효과를 연출한다. 둘째, 정원에 담긴 뜻과 이상이 각별하다는 점이다. 정원을 작정자의 이상이나 신념이 표상되는 장소라고 보면 소쇄원은 그 대표적 현장이라할 수 있다. 소쇄원 곳곳에는 양산보의 도가적 꿈과 유가적 이상이 담겨 있다. 광풍각과 제월당의 이름은 물론 대, 오동, 버들, 복숭아, 연 등의 식물 그리고 애양단, 오곡문, 대봉대, 도오(복숭아나무 둔덕)등이 그 대표적 산물이다. 셋째, 소쇄원은 양산보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수많은 문인이 찾아 시를 짓고 문예를 즐겼던 곳이다. 문화 예술 발전소이자 향유 무대로서 정원의 효용을 한껏 발휘한 대표적 현장인 것이다. 문예 창작보다는 예학(禮學)과 수신(修身)에 더 치중했던 양산보가 남긴 글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가 교유했던 송순 (1493 ~ 1582), 김인후(1510 ~ 1560), 김윤제(1501 ~ 1572) 등은 수시로 소쇄원을 찾아 많은 시문을 남겼다....(중략)... *환경과조경364호(2018년8월호)수록본 일부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 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 [이미지 스케이프] 영국보다 낫네!
    지난달 영국의 도시재생 프로젝트 현장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여러 곳을 둘러보고 왔는데, 많은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요약하자면 생산 기반의 과거 도시의 체질을 새로운 산업 구조에 맞춰 개선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산업 구조의 변화가 진행 중인 우리나라 도시도 참고해야 할 교훈이 많았습니다. 우리보다 한두 발 정도 앞서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답사 직후 지인들과 부산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간 김에 잠시 틈을 내 최근 새롭게 단장한 ‘F1963’이란 곳에 들렀지요. 암호처럼 보이는 이름은 1963년에 처음 지은 공장 factory 이라는 의미라는군요. 이곳은 2008년까지 와이어로프를 생산하던 고려제강 공장이었는 데, 2016년 부산비엔날레를 계기로 서점, 전시 및 공연장, 커피 전문점, 펍 등이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건축가 조병수의 꼼꼼하면서도 감각 적인 아이디어가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공장 지붕을 일부 걷어내어 만든 중정, 기존 부재에 새롭게 덧댄 재료의 신선한 조화, 와이어로프를 활용한 소품들까지. 공간을 둘러보는 내내 보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하더군요. 시간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한참더 있고 싶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4호(2018년 8월호) 수록본 일부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가원조경, 도시건축 소도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 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경 계획과 경관 계획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 [시네마 스케이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88세의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와33세의 사진작가 제이알JR이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공동 작업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다.아녜스 바르다는 영화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장 뤼크 고다르(Jean Luc Godard)등과 함께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다.누벨바그는1950~196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영화 운동으로,기존의 영화 형식과 문법에 대항하는 새로운 영화 세계를 지향했다.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평생 작업해 온 영화감독과 혁신적 작업 방식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사진작가는 포토 트럭을 타고 다니며 즉석 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다. 발터 벤야민은‘사진의 작은 역사’에서“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르다”고 말한다.인간이 의식을 갖고 엮은 공간에 무의식적으로 엮인 공간이 개입 한다는 것이다.그는‘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도 사진과 영화의 기술은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던 익숙한 사물의 숨겨진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주위 환경을 다시 인식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영화‘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면 이20세기 매체 미학자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카메라 렌즈가 어떻게 평범한 이웃 사람과 주변 공간을 예술로 만드는지 느낄 수 있다. 바르다와 제이알의 여정은 프랑스 북부의 쇠퇴한 탄광 마을에서 시작한다.그곳에서 평생 일한 광부들과 철거가 예정된 집에서 마지막까지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수습 광부 시절의 전신사진을 확대해2층 벽돌 건물의 벽에 붙이고,최후 거주자의 집 벽면 전체에 얼굴 사진을 확대해 붙인다.주민들은 그곳의 삶 자체를 상징 하는 오래된 집에 담긴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다.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건물,벽,컨테이너,자동차 등에 사진을 붙이는 작업은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이어진다....(중략)... *환경과조경364호(2018년8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지방 도로를 지날 때면 특산물을 직설적으로 형상화한 조형물이나 가로등이 자주 눈에 띈다. 키치도 하나 둘이면 모를까, 전 국토의 경관이 한줌의 상상력도 허용하지 않는 게 너무나 아쉽다. 지난 주말 고속 도로 변에서 보았던 난데없는 조형물 꽃은 코스모스였을까 채송화 였을까. 궁금하게 만들어 졸음 운전을 방지하려고 했다면 성공한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