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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옥상달빛
평범한 도시 남성의 옥상 경험은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공통분모가 가장 큰 옥상의 추억은 흡연이다. 추억보다는 현재진행형의 용도라고 표현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리처드 클라인을 인용해가며 “담배는 숭고하다” 외친들 이미 담배는 천덕꾸러기를 넘어 공공의 적이다.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여전히 40%를 넘나드는데 도시의 거의 모든 공간에는 빨간색 금연 딱지가 선명하다. 옥상은 그나마 융통과 변칙이 묵인되는 일천만 흡연인의 해방구다.
옥상의 두 번째 추억에는 으레 주먹이 등장한다. “옥상으로 올라와.” 이 짧은 명령문 하나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옥상은 군기 잡는 선배 앞에 무릎 꿇는 복종의 공간이(었)고, 학교 폭력의 전시장이(었으)며, 갖가지 명분의 싸움과 결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청소년기에 옥상에서 겪은 사건들을 망각할 능력이나 추억이라 포장할 배포가 없다면, 옥상은 긴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의 공간이다.
세 번째 추억은 현실과 로망의 경계선상에 있다. 많은 이에게 옥상은 아련한 기억 저편의 사랑을 소환하는 가슴 먹먹한 장소다. 뭇 남성이 다 자기 이야기라고 여겼다는 공전의 히트작 ‘건축학개론’. 대학 새내기 서연(수지 분)과 승민(이제훈 분)의 어설픈 두 번째 데이트 장소는 개포동의 어느 아파트 옥상이다. CD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듣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신체의 모든 감각을 무장 해제시킨다. 옥상은 이렇게 이성은 물론 감성마저 마비시키는, 아름다운 기억의 장소다.
이 셋 중 한둘은 우리 모두가 겪어 온 도시 삶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요즘 옥상 풍경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다. 옥상이 우리 사회와, 동시대 문화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정말 다채로워지고 있다. 옥상에서 화분을 가꾸거나 상추를 기르며 짧게나마 노동의 희열을 맛보는 건 이미 고전이다. 더 진취적인 사람들은 블루베리 농사도 짓는다. 옥상을 이용해 빗물을 모으거나 옥상을 녹화해 기후 변화에 대처한다는 거룩한 명분의 사업도 활발하다. 옥상에서 하늘과 별과 바람이 주는 해방감을 느끼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건 이미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쿨한 곳, 핫한 곳 가리지 않고 도처의 옥상을 카페와 바가 접수하고 있다. 나의 한 페이스북 친구는 주중의 격무를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주말용 옥탑방을 얻은 후 혼자 밥 먹고 술 마시며 빔 프로젝터로 영화 본다는 자랑질 포스팅을 매주 한다.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랄까, 여럿이 옥상을 함께 쓰는 움직임도 고개를 들고 있다. 어정쩡하게 버려져 있던 옥상이 도시의 그 어느 공간보다도 다양한 멀티 플레이어 역할을 하며 우리의 라이프스타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옥상을 마음껏 즐기고 살면서 동시에 옥상에서 작품까지 생산하는, 부러운 도시인이 있다. 기자 출신의 화가 김미경은 서촌에 거주하면서 인왕산이 보이는 동네 풍경과 골목길, 서촌의 꽃과 사람들을 화폭에 옮긴다. 동네 친구들 옥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서 “서촌 옥상 화가”라 불린다. 그는 옥상의 매력을 이렇게 전한다. “옥상에서 보는 서촌은 어마어마한 바닷속 풍경인 듯도, 축소된 세계 지도인 듯도 하다. … 옥상에서는 전체 구도가 확연하게 보여 좋다. 동네가 산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어디서부터 길이 시작되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동서남북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내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내가 자리한 곳이 어디인지를 객관화해 볼 수 있어 좋다. 그 새로운 면들이 겹치고 풀리고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할 수 없는 선과 면, 그리고 새로운 구도를 찾아낼 때마다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기분이다.” 펜 터치가 정다운 그의 ‘옥상화’ 엽서를 보노라면 서울의 또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는 옥상이 있다. 연구실에서 다섯 걸음만 내디디면 검박하면서도 화려한 옥상 테라스다. 여느 옥상처럼 어수선하게 방치되던 곳을 동료 정욱주 교수가 정갈하게 디자인해 고쳤다. 꼼꼼한 디테일의 데크, 장방형의 내후성 강판 플랜터, 그 속에 날아와 스스로 자란 이름 모를 야생의 꽃과 풀, 단정한 철제 의자와 여유로운 목제 평상이 전부지만 그 조합의 시너지가 만만치 않다. 압권은 옥상을 향해 달려오는 관악산 풍광과 기운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산 풍경도 아니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아니다. 산허리를 바로 눈앞에서 뚫고 대면할 수 있는 도시의 이 비경을 김미경 작가라면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하다. 그이처럼 재주가 없고 성실하지도 못한 나는 내가 정해 놓은 한 지점에서 같은 장면의 사진을 이따금 찍을 뿐이다.
옥상에 가만히 앉으면 날이 밝아 오고 해가 저물 때의 기온 변화를 스마트폰이 아닌 피부로 알 수 있다. 땅거미, 오래 잊고 지낸 이런 단어가 다시 생각난다. 도시의 초록이 봄과 여름과 가을에 어떻게 다른지 실물로 배운다. 감각의 연합, 즉 공감각synaesthesia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님을 온몸의 감각으로 직접 느낀다. 어느 가을밤, 나를 삼킬 듯한 달빛을 옥상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옥상의 여러 얼굴을 포착하고자 기획한 특집 ‘옥상다반사茶飯事’를 싣는 이번 호 에디토리얼에는 그 달빛의 감동을 전해야겠다 싶어 제목을 ‘옥상달빛’으로 일찌감치 고정했다. 도무지 전할 방도가 없는 글쓰기 재주, 지면이 춤을 춘다.
애꿎은 네이버에 옥상과 달빛을 쳐 넣으니 가수 ‘옥상달빛’이 제일 먼저 뜬다. 아, 이런 듀엣이 있구나! 뭔가 글감을 포착한 직감이 들어 그들의 음악을 재생한다.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를 듣다가 방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불러내 “너, 옥상달빛 아니? 이 노래 완전 좋은데?” 물으니,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서 이런 답이 돌아온다. “아빠, 아니 교수님, 공부 좀 하셔야겠어요. 벌써 7, 8년 된 노랜데요? 드라마 ‘미생’에도 OST로 나오잖아요.” (얼마 안 됐네. 다 지우고 다시 써볼까? ‘미생’의 명장면들에도 옥상이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든 엮어볼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연재물을 점차 줄여나가면서 특집 중심의 구성, 즉 독립된주제의 단행본 성격을 띤 구성을 실험해 볼 계획이다. 가까운 예로는 자전거를 주제로 특집 원고와 작품을 엮었던 2015년 4월호를 들 수 있겠다. 실험의 첫 걸음으로 이번 호에서는 옥상을 주인공으로 발탁해 보았다. 많은 관심과 피드백 부탁드린다. 참, 이달에는본문 편집 디자인에도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알아차리신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린다.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을 연재하고 있는 최이규 교수(계명대학교도시학부)가 『와이드 AR』과 『건축평단』이 공동 주최한 ‘2017 올해의 발견, 매체기고부문’에서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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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옥상, 공간이 되다
현대 도시는 ‘옥상의 숲’이자 ‘옥상의 바다’라 할 만하다. 높은 곳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옥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 옥상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지표 혹은 지상의 눈높이에서는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동선 상에서도 대면할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네 눈에서 가깝지 않아 마음에서도 멀어진 것일까. 세상 만물의 의미와 용도를 해석하는 사전에서는 옥상屋上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사전은 옥상을 “지붕의 위, 특히 현대식 양옥 건물로서 마당처럼 편평하게 만든 지붕 위”(표준국어대사전)로 정의한다. 영어로는 루프탑rooftop인데, 이는 “the outer surface of a building’s roof”(Oxford English Dictionary)이다. 결국 옥상은 “건물 지붕의 외부 표면” 정도로서 태생부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운명 지어진 곳일지도 모른다.
지붕에 종속되어 덤으로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담아내는 혹은 담아내야 할 기능에 애초부터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대부분 옥상은 건축물 혹은 건물주主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유동적이고 가변적으로 이용되는 편이다. 건물의 주 기능을 보조하거나 건물을 이용하는 인간의 활동을 거드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가끔은 실내 금연 구역을 피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야외 흡연 구역이 되고, 때로는 가스통, 에어컨 실외기, 물탱크 등 실내에 두면 너무 크거나 위험한 것들을 올려두는 지상의 지하실이 되며, 이따금 꽃과 화단, 평상이나 장독대를 놓아두는 공중의 마당이 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오늘날 옥상은 더 이상 도시의 주변적 존재가 아니다. 이제 옥상은 건물의 일부로서 버려지고 방치되는 공간이 아니라 웰빙, 힐링, 생태 등 사회 문화적 코드와 맞물려 그 자체가 독자적 기능을 지닌 하나의 건축 요소이자 실재하는 공간으로 무한 변신 중이다. 일부러 찾아가는 일이 드물었던 옥상을 언제부턴가 기꺼이 제 발로 찾아 오르고 있다. 지금 옥상은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탄생 중이다.
엄격히 옥상은 ‘허공虛空’이나 다를 바 없다. 적극적인 건축 행위를 통해 구축된 공간이 아니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의도하고 건축된 것이 아닌 까닭에 통상 공간이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옥상에는 벽도, 천장도 없이 오직 바닥만 주어진다. 말하자면 옥상은 공간이 아니라 ‘텅 빈 공중’으로, 건축물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허공이기 때문에 옥상은 어떠한 변신도 포용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옥상은 공중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 기온, 바람, 습도 등 외부 환경에 상대적으로 민감하고 방수, 환기, 채광 등에서도 치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부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옥상은 빛이나 공기, 온도 등과 원초적으로 교감을 이루는 장소로 거듭날 여지가 있다. 옥상의 비존재성 혹은 비물질성은 역설적으로 가꿔지고 채워질 수 있는 옥상의 잠재력을 웅변한다.
‘자연과의 열린 만남’이라는 내재적 유용성이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강화된 형태는 정원庭園이 된 옥상이다. 도시의 일반 옥상이 ‘녹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모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공중의 녹지’로 변모하고 있다. 옥상을 정원으로 가꾸고 꾸미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기쁨과 희열 이상이다. 옥상 정원은 도시의 미기후를 조절하거나 녹색의 집합 경관을 창출하는 생태적·환경적 가치뿐만 아니라 도시민에게 새롭고 즐거운 시각적 자극과 생태적 삶의 회복을 주는 사회적 가치도 창출한다. 이러한 이유로 옥상 정원을 통한 도시 녹화가 공공 사업의 대상으로 부상 중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옥상은 ‘농사’라는 전통적 행위가 발생하는 농지農地가 되기도 한다. 버려졌던 옥상이 인간의 원초적 노동이 행해지는 ‘생산의 공간’이 된다는 것은 비단 농촌 문화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옥상의 도농 결합은 도시민이 수확의 즐거움을 맛보고 화학 비료와 농약으로부터 안전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이다. 이웃과 함께 농촌의 삶을 체험하고 수확의 기쁨을 나누면서 도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작지로서 옥상은 자연스럽게 애그리테인먼트agritainment가 실천되는 지역 사회의 공공 자산이 된다.
자연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는 것을 넘어 옥상은 근래 여가, 오락, 소비 등의 가치가 더해진 새로운 도시 문화 인프라로 급부상하는 중이기도 하다. 옥상에 들어선 극장,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를 찾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공과 자연, 내부와 외부가 혼재되는 옥상은 그것이 담아내는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게다가 옥상은 콘크리트 벽에서 벗어난 탈일상적 해방감,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적 쾌락, 날씨나 시간에 따라 새롭게 창출되는 심미적 분위기 등을 제공하면서 현대인의 감성적 소비 욕구를 충족시킨다.
분명 옥상은 처음부터 자신의 고유한 가치나 용도를 가진 채 태어나지 않았다. 옥상의 기능이나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거나 확실하게 제기된 적도 없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옥상은 단순한 ‘지붕 표면’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간’으로서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공간으로서 옥상은 공공성을 담지한다. 새롭게 발견된 도시 면적이면서 도시 형태나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다양한 도시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하는 기폭제다. 이는 우리가 이제야 갖게 된 옥상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유이기도 하다.
김미영은 현재 서울연구원 초빙부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홍익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관심 분야는 도시의 문화 예술 공간, 공간의 문화사, 공간의 사회학 등이며, 공간의 문화 사회적 기능과 의미를 발견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논문과 저서로는 『서울 사회학』(공저, 2017), 『옥상의 공간사회학』(공저, 2012), “현대 공공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 고찰”, “호텔과 ‘강남의 탄생’”, “‘오감(五感) 도시’를 위한 연구 방법론으로서 걷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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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스케이프] 세븐 마일 브리지
호수 같은 바다, 끝없이 이어지는 다리들. 플로리다의 키웨스트Key West로 인도하는 교량이 이번 사진의 주인공입니다. 저는 지금 미국 남부를 여행하는 중입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 날씨를 기대하고 왔는데, 이상 한파의 여파로 미국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네요. 30년만에 내렸다는 플로리다의 눈을 직접 목격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미국의 최남단 키웨스트입니다. 미국 본토에서 무려 170km나 떨어져 있는 곳이지요. 흔히 키웨스트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플로리다 남단부터 쿠바 방향으로 연결된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곳입니다. 지도에서 보면 섬들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특이한 형태입니다.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기 전에는 쿠바와 교역하기 위한 철도를 연결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모양입니다. 거의 300km의 바다를 연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 ...(중략)...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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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축조경관
엽서자연1
언제부턴가 지하철 역사에는 지방 자치 단체 홍보 포스터가 여기저기 걸려 있다. 저마다 지역색을 진하게 드러내는 관광 아이템을 앞세우고, 정감 있는 캘리그래피로 쓴 흥겨운 문구도 빠지지 않는다. 거의 모든 포스터의 배경은 그 지역에서 연중 가장 멋진 날에 극적인 조망점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채도를 한껏 높여 촌스러워 보이는 사진도 있지만, 몇몇 사진은 우리나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지명이 생소하더라도 당장 열차표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그곳에 가면 과연 사진 속 그 경관을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선명한 사진 속 아름다움은 머릿속에 분명한 하나의 자연 경관으로 각인된다. ...(중략)...
1.영국의 비평가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Problems in Materialism and Culture』(Verso, London, 1980)에서 “자연이란 언어 중 가장 복잡한 단어다(Nature is one of the most complex words in language)”라고 했듯이 자연을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humanity, culture) 이외의 것(otherness)”을 공간 환경을 다루는 이 글에서의 의미로 줄여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 환경의 반대 성격의 대상’이 될 것이다. 도시와 이격되어 물리적,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자연환경이 주가 되는 장소 또한 이 글에서 의도한 자연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그룹(SWA Group)에서 다양한 성격의 설계 및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미국조경가협회상(ALSA Honer Award), 아키프리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공모 대상,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에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공동 설립하고 L.A., 센젠, 상하이에 이어 서울 오피스를 꾸려 나가는 중이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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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콘크리트의 가능성 4 - 인프라스트럭처
사진의 공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콘크리트를 마감 재료로 사용했다. 뒤쪽 고가 도로 구조물과 왼편의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계단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행로에 초점을 맞춰보자. 차도와 인접한 약 3m 남짓한 폭의 보도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인도에 사용하는 현장 타설 콘크리트cast-in-place concrete로 마감했다. 현장 타설 콘크리트 보도는 약 2.4m마다 균열 조절 줄눈을 배치해 온도 변화에 따른 재료의 갈라짐을 예방했다. 보도와 인접해 약 4m 폭의 산책로가 있는데, 인도의 균열 줄눈과 동일한 이음매를 가지고 있어 언뜻 보면 같은 현장 타설 콘크리트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산책로는 일정한 크기의 모듈로 제작된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판이다. 이 판은 캔틸레버 구조로 바다 위에 떠 있으며, 오른편의 도시와 왼편의 부두pier 시설을 연결한다. 각각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모듈에는 일반 벽돌보다 조금 큰 크기의 유리블록이 끼워져 있다. 유리블록은 모듈의 수평 방향과 32도 기울어진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기울어진 레이아웃에 따라 이음매와 만나는 부분의 유리블록들은 크기를 짧게 변형하거나 생략했다. 유리블록의 모서리가 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스테인리스 스틸로 프레임을 짜 맞추었고, 유리블록의 아래를 뚫어 콘크리트 판 밑으로 빛이 투과되도록 설계했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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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엄석만 전 비산 2, 3동장
백만 원의 도시재생
지난해 대구 비산동 골목 정원을 자주 찾았다. 학생들과 답사를 갔고, 몇몇 지인과 시간을 내 구경을 가기도 했다. 타지에서 도시와 조경에 관심 있는 분이 오시면 꼭 보여드리는 장소다. 전주나 부산으로 치자면 한옥마을이나 감천마을 같은 단골 메뉴인 셈이다.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의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에 한 번쯤 공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오래된 콘크리트 골목의 지역성과 서민적인 재료, 때로는 펑키하고 키치한 미적 감각, 하지만 매우 기능적이고 문화적으로 풍부한 뉘앙스를 가진 곳. 감천마을만큼 크지 않고, 그만큼의 관광객도 없지만 이곳의 골목 정원은 훨씬 더 훌륭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혹은 주입된 사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일상적 감각이 외부로 표현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와서 후다닥 벽화를 그려 놓고 사라져버리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같은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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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정원 생활] 헤르만 헤세의 정원, 방랑과 안주를 되풀이하는 자를 위한 영혼의 안식처
헤세, 독일 지성인의 양심이자 정신적 스승
독일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는 흔히 구도자, 양심의 수호자로 불린다. 자전적 소설이라 평가되는 그의 작품들에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함께 청춘에 대한 그리움, 사랑·평화·자유와 같은 인간적 가치의 회복이 기저에 깔려 있다. 히틀러와 나치주의자의 편협한 민족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광풍 속에서도 헤세는 인간성의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자연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스스로 “내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이며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평한 역작 『유리알 유희』에서, 그는 이성과 양식이 고갈된 시대에 지식인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문명사적 해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경제적·기술적 진보의 시대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인간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에 관심 가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나치주의가 붕괴된 이후 독일은 물론 전 세계에 그가 인간 정신과 문화의 상징 인물로, 혹은 정신적 스승으로까지 부각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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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패터슨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일상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패터슨(애덤 드라이버 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산다. 인천에 사는 백인천 씨, 수원에 사는 김수원 씨와 마찬가지다(전자는 그 유명한 야구인, 후자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영화는 어느 월요일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 펼쳐지는 그의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매일 거의 같은 일상이지만 조금씩 다르다. 몇 가지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나긴 하지만 인생의 궤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패터슨은 매일 새벽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일어난다.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준비해 놓은 옷을 챙긴다. 시리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도시락을 들고 걸어서 일터로 간다. 같은 길을 다시 걸어서 퇴근한 후에는 저녁을 먹고 반려견 마틴을 산책시킨다. 마틴을 묶어두고 바에 들러 맥주 한잔을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된다. 그의 일주일을 졸졸 따라다니다 보면 패터슨이라는 도시가 오래 전부터 알던 곳 같고,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연작시 ‘패터슨’에 대해서도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어제, 한 은사님으로부터 하루 두 줄씩 일기를 쓰려고 노력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일주일에 두 줄씩이라도 일기를 써야지 마음먹었다. 새해 다짐이란 걸 올해는 한번 해보기로 했다.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력은 하게 되겠지.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