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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서울역 고가, 다시 토론할 때다
    빛의 속도로 완공된 ‘서울로 7017’, 서울시 보도 자료에 따르면 개장 한 달 만에 203만 명이 방문했고 연말까지 1,00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박원순 시장이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를 서울판 하이라인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2014년 9월 이후, 『환경과조경』은 여러 호에 걸쳐 이 사업의 중간 지점을 포착해 왔다. 특히 2015년 7월호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당선작은 물론 출품작 전체에 대한 리뷰와 비평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토론의 장을 열기도 했다. 이번 호에서는 당선작 선정 2년 만에 개장한 ‘서울로 7017’을 다시 특집으로 올린다. 지난 겨울부터 기획을 시작한 편집부는 서울시 담당자, 설계사의 핵심 관계자, 시민 단체 리더, 자문위원, 관련 전문가들을 여러 차례 취재했지만, 아직 물음표를 거두기 쉽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특집에 담은 MVRDV의 글과 인터뷰, 이경훈 교수와 서예례 교수의 비평, 김정은 편집팀장의 취재기와 인터뷰는 어딘가 서로 어긋나 있다. 당위성, 지향점, 과정, 효과 등 여러 지점에서 갈팡질팡해 온 이 프로젝트의 민낯일 수도 있겠다. 편집부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서울역 고가가 그야말로 ‘열린 결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서울역 고가의 미래를 긴 호흡으로 토론할 필요가 있다. 몇 달간 편집부에서 오고간 많은 대화 뭉치 중 한 토막을 옮긴다. E. 중간에 자문회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만나보면 MVRDV가 지나치게 고집을 피웠다, 불합리한 부분까지 너무 지켰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H. 주로 당선작의 가나다 식재와 콘크리트 화분 길이 실제로 구현됐다는 점에 대한 비판인거죠? 그런데 ‘고집을 피웠다’고 보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아요. 설계대로 시공하는 건 원칙 중의 원칙입니다. 자문이 그 역할을 넘어서 설계안을 좌지우지하는 건 오히려 고쳐야 할 고질병 중 하나죠. 이번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돋보이는 건 공모 당선작이 거의 원래대로 실현됐다는 점이에요. E. 문제는 ‘설계대로’에서 그 ‘설계’가 과연 무엇인가에요. 설계공모 당선작이 바로 그 ‘설계’로 확정돼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H. 맞아요. 설계공모란 건 적합한 설계자와 설계안의 밑그림을 공정하게 선정하는 절차죠. 따라서 당선작을 그 ‘설계’로 발전시키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합리적 과정이 뒤따라야 해요. E. 하지만 서울역 고가는 누구나 알듯이 대선용 프로젝트였어요. 과 정에 충실할 시간? 꿈같은 얘기죠. H. 소통과 과정과 참여의 대명사인 박원순 시장답지 않은, 전형적인 ‘시장표’ 전시 사업이죠. 초기 구상 때부터 이미 불변의 목표 완공 시점이 정해져 있으니 무리한 속도전을 벌일 수밖에 없고 당선작을 그 ‘설계’로 확정하는 과정이 실종되거나 소홀할 수밖에 없었어요. E. 서울로 7017 덕분에 모처럼 일간지와 방송에서도 조경·도시설계 프로젝트를 다루는 기사와 칼럼이 넘쳐나고 있어요. 내로라하는 논객과 SNS 스타들도 한마디씩은 거들고 있고요. H. 공론의 장에서 조경과 도시설계가 이렇게 토론된다는 것, 당연히 환영이죠. 그런데 메뉴로 올라오는 걸 보면 못생긴 콘크리트 화분 길, 난데없는 가나다 식재, 삭막한 콘크리트 포장, 옹색한 육교, 그늘이 없다, 걷기에 좁고 복잡하다 등 디자인에 관한 것들인데, 이제야 디자인으로 토론한다는 게 참 아쉬워요. 2년 전 당선작이 발표됐을 때 더 활발하게 갑론을박했어야 할 주제. E. 2년 전에 충분히 공론화됐어야 할 문제가 뒤늦게 다뤄지고 있다는 말인 거죠? H. 사실 그때도 조경, 건축, 도시설계 전문가 사회에서는 핫 이슈였죠. 우리 잡지도 기여를 했고. 그러나 시민들은 몰랐던 겁니다. 당선작의 조감도와 이미지 컷들을 아무리 지하철역마다 걸어놓았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한 거예요. 그때 그림 그대로인데도 막상 완공된 공간이 생경한 거죠. 공공 프로젝트는 내 집 앞마당을 내 맘대로 꾸미는 거랑 전혀 달라요. 시민 모두가 클라이언트인 셈이죠. 시민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다수의 시민이 MVRDV의 당선작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만큼은 가지고 대화의 소재가 될 수 있어야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인 거죠.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 우리 앞에 등장한다는 걸 시민의 다수가 알고 관심을 가지고 상의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해요. 몰랐고 또 기회가 없었으니 시민들은 이제야 뒷북을 두드릴 수밖에. E. 클라이언트이자 사용자인 시민에게도 설계안에 대한 의견을 낼 권리가 있죠.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 보고 알고 이야기할 과정이 있어야 했다, 동감입니다. H. 개장 후 한 달간 가장 놀라웠던 건 한 일간지에 실린, 전 서울시 총괄건축가의 칼럼이었어요. 런던의 “‘가든 브리지’가 수년 동안 논란만 무성한 채 착공조차 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며 불과 2년 만에 완성한 서울의 실천을 부러워하며 조명한다”고 영국 「가디언」의 보도를 인용한 부분 있잖아요. 사회적 합의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가든 브리지’가 정상 아닐까요? 토건 시대도 아니고, 속전속결이 자랑거리는 아니죠. E. 며칠 전 시의회에서 시장은 다른 나라에서 10년이 걸린다고 우리도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비록 2년이지만 강력한 추진력으로 런던이 해내지 못한 걸 이뤘고 충분한 소통의 과정을 거쳤다고 자평하던데, 솔직히 ‘내로남불’처럼 들렸어요. H. 서울역 고가에 대한 비평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어요. 사업의 구상과 목표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 콘텍스트를 괄호 안에 묶어둔 채 순수하게 디자인 자체만을 비평하는 건 핵심을 벗어나거나 의미 없는 푸념에 그칠 가능성이 커요. 무슨 공원 바닥이 콘크리트냐, 화분 속 식물이 불쌍하다, 가나다가 웬 말이냐 같은 이슈는 다른 공원이나 가로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서울역 고가의 핵심은 아니죠. E. 결국 다수의 공간이므로 어떤 설계안이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충분히 토론하면서 다수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중요한 거죠. H. 실은 초기의 공론화 과정이 더 중요하죠. 왜 하는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공론화, 지금 다시 그 이야기를 들춰서 특집에 담는 건 정말 뒷북이겠죠? E. 이번 기획에선 다루지 않더라도 여전히 생명력 있는 쟁점인 건 분명해요. 광화문광장 개선과 같은 또 다른 도시 정치 프로젝트가 대기 중이니까요. 무엇을 만드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점, 서울역 고가의 교훈. 오늘은 이 정도로 맺을게요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7년07월 / 351
  • [칼럼] 낡은 다리 위에서, 전복의 풍경
    ‘파레르곤parergon’은 작품, 주제, 기능, 일, 행위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르곤ergon’에 주변, 보조, 부차적이라는 의미의 접두사 ‘파라para’를 붙여서 만든 단어다. 아들을 위한 품행 지침서 제목으로 처음 사용한 18세기 초에는 텍스트에 덧붙인 보조적, 교육적 문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칸트, 쇼펜하우어, 자크 데리다 등 여러 철학자를 거치면서 복잡 미묘한 의미를 갖추게 되었다. 좁게 보면 주 텍스트에 달아놓은 주석으로 볼 수도 있고, 넓게 보면 작가의 전체 저서 중 중요치 않은 저작이나 작가의 주요 저서를 만들기 전에 제작한 소품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함부로 분리할 수 없는 주석으로서 파레르곤이 주 텍스트를 보충해서 설명을 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가 지닌 근원적 복잡성이 드러난다. 역설적이게도 주요한 내러티브를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텍스트의 역사에서 고정 불변성이 사라진다. 공사 당시 상황판 사진의 문구처럼 “서울역전의 평면교차로 인한 교통 혼잡”을 “완전 해결”하고자 근대적 교통 체계에 입체로 덧붙인 이전의 ‘서울역 고가도로’ 또는 오늘날의 ‘서울로 7017’은 태생적으로 파레르곤이다. 차량이 우선이었던 속도의 시대에 도도한 차량 흐름을 끊는 보행 동선과의 교차점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식의 보완 역할로 교통 체계의 효율을 높였으며(실상은 효율적이라고 믿었을 뿐이지만), 때로는 거대 도시 서울의 중심에서 1970년대 조국의 근대화를 웅변하는 상징물 노릇도 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가도로들은 이미 1980년대에 정체를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교통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1990년대에는 흉물이자 골칫거리가 되었다. 건설 의도와는 정반대로 고가도로라는 파레르곤이 일견 완벽해 보였던 근대 교통 체계의 계산법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게다가 2017년 이 고가도로를 녹지가 있는 선형의 보행로로 재조성하면서, 급기야 우리는 오래된 콘크리트 덩어리의 ‘파레르곤’이 주변 도심 공간을 엮는 중심이자 주제인 ‘에르곤’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목도한다. 눈여겨 볼 것은 다중적 해석 속에서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자리가 뒤바뀌는 ‘파레르곤’과 ‘에르곤’의 전복적 양상이다. 숱하게 부수고 새로 지어서 한눈팔다 돌아보면 으레 강산이 바뀌어 있는 토건 국가에서 살아왔으니 구조물의 변신 자체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강을 건너는 노후한 다리를 폐쇄한 후 보행교로 용도를 바꾸거나 고가의 육교를 철거하는 작업은 이미 흔하게 봤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재미가 없다. 세상이 반드시 흥미로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의 경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대중에게 정보를 열어놓고 치열하게 논란을 거치면서 다시 구축했다는 점에서 ‘서울로 7017’은 분명히 진일보했다. 전복적 사고는 전면적 파괴나 철거나 멸실이 아니라 계보학적 접근을 통한 해체와 재구축 작업을 통해서 제대로 실현된다. 뉴욕의 하이라인을 거울삼았지만 애초에 한계는 명확했다. 다리 높이가 17m로 지상과는 너무 동떨어졌다는 점, 그에 비해 10m 폭은 비교적 좁다는 점, 주변 건축물 입면과 자연스레 접하는 지점이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다리 전체가 분주한 대로와 철로 위에 올라앉은 긴 섬이라는 형국. 이런 상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도 가장 압도적인 것은 다양한 크기와 높이로 만든 원형의 콘크리트 화분들이다. 하늘 위를 걷는 사람들이 냇물에 잠긴 작은 바위와 돌을 스쳐가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대개는 가운데를 통해서 가지만, 화분과 유리 난간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도 택한다. 화분이 원형이라서 이 독특한 골목은 구불구불한 형상으로 주변 경관을 부감하면서 아주 길게 이어진다. 흔치 않아서 재미있다. 다만 해체해서 재구축한 다리 위에 놓인 식물도감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건물 파사드와 연결하기 힘드니 행태 유발의 임무를 이름순으로 나열한 나무들에게 떠맡긴 것일까. 그러나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고 호명하는 근대를 탈근대 위에 올려놓은 이 질감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설계공모에서도 제시한 수목원식 나무 배열은 그 목적이 관람이건 학습이건 누구나 익숙해서 무난할 테지만 그저 그뿐이다. 게다가 230여 종에 달하는 다종다양한 나무 모두에게 콘크리트 다리 위는 과연 살만한 환경인가. 식재의 내용보다는 고가도로라는 형식, 나무보다는 화분이라는 틀에 집중하면, 지상과 분리된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력을 생생하게 드러냈을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늦지 않았다. 탈근대적 작품의 끝은 열려 있고 누구나 의견 개진이 가능하니 앞으로의 모습 또한 끊임없이 변모해갈 것이다. 모든 경관은 이미 정치적이다. 경관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쩐지 의도가 불순하다. 다수를 차지하는 유권자 층이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언제 어디서고 경관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실상은 가장 정치적이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해서 전망을 제시하는 진보적, 도전적인 작품들이 놓일 자리는 어디인가. 불행하게도 서둘러 정리되는 결말을 맞이했지만, ‘슈즈 트리’처럼 때로는 논란만으로도 충분하다. 논란거리를 아예 없애겠다는 태도가 오히려 심각한 문제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주석이 달리고 전복적인 논의가 따라 붙는 풍경이 필요하다. 낡았지만 새로 태어난 다리, ‘서울로 7017’이 그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9년째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조경설계 힘(studio HYMH)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그곳에 머무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경관에 대한 해석과 발언이 자유롭고 ‘시급 1만 원 시대’에 경제적으로 튼튼한 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인내심 많은 친구들인 안형주, 박준영과 함께 열심히 살고 있다.
  • [이미지 스케이프] 불완전이 만든 완성품
    지난 5월, 드디어 서울로가 열렸습니다. 개장 2주 만에 방문객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들리고,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아쉬움을 지적하는 기사들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슈즈 트리’ 논란까지 가세하면서 조경 프로젝트(‘건축’이라고 규정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만)로는 이례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조금 더 사람들이 이용한 후로 판단을 미룹니다. 공간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익어가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오늘 사진의 주인공은 서울로 7017의 한쪽 끝에 위치한 ‘윤슬’이라는 공공 미술 작품입니다.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라는 부제도 달려 있네요.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는 반짝이는 잔물결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합니다. 어감도, 뜻도 참 예쁜 말입니다. ‘윤슬’은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울은 미술관’의 일환으로 진행된 공공 미술 프로젝트입니다. 건축사사무소 SoA(강예린, 이재원, 이치훈)의 작품인데, 이들은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지붕감각’을 설치하는 등 공공 공간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 한강예술공원 프로젝트에 몇몇 조경가가 참여해 멋진 결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더 많은 조경가가 공공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주신하[email protected] /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 / 2017년07월 / 351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이중성
    나는 아직 남들과 공유할 수 있을 만큼의 원숙한 설계 노하우를 체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설계하는 법은 꽤 오랜 기간 몸담았던 순수 예술이라는 영역, 함께 일하는 다양한 분야의 동료들, 스튜디오 MRDOStudio MRDO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의 확연한 작업 방식 차이 등에서 비롯한 다중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번 호에서는 그동안의 작업에서 예술과 설계라는 다른 두 분야가 서로 간섭했던 흔적들을 소개하고, 두 영역의 교집합과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조소과 재학 시절 인접 분야의 수업을 두루 들어보던 중 조경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 조경은 핸드 드로잉보다 훨씬 세련된 컴퓨터 드로잉으로, 외국에서 실무를 마치고 귀국해 설계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의 화려함으로 인식되었다. 조경의 일부만을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자연과 시스템 그리고 예술의 조합이라던 이 분야는 쿨한 창작을 하면서 동시에 규칙적인 보수도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자, 순수 예술이나 건축과 비교할 수 없는 블루오션으로 비춰졌다. 막연한 예상과 현실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물론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0년간 조경, 특히 조경 설계를 알아가면서 노력만큼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고 느낀 적은 있었을지언정 그때의 착각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만일 내가 미술에 조경을 더함으로써 하나 이상의 프레임으로 디자인적 사고를 하는 디자이너라면, 미술만 할 때보다 창작에 있어서 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때의 성급했던 결정은 역설적이게도 보다 넓은 풀pool을 만나게 해 준 고마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중략)... 전진현은 스튜디오 MRDO(Studio MRDO)를 공동 설립해 조경뿐 아니라 더욱 확장된 영역에서 디자인을 실험·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GSD 입학 전 신화컨설팅에서 근무했고, 현재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조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보더스: DMZ 지하 대중목욕탕(Borders; Korean DMZ Underground bath house Competition), 세종대로 역사문화공간 설계 공모, 서울 도시 디자인 공모전 등 다수의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www.studiomrdo.com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위하여
    수목이 계단식 앉음벽의 층계를 뚫고 나온 듯한 모습이다. 계단식 앉음벽의 형태를 최대한 연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수목 보호대를 계단의 형태 그대로 만들어 덮었다. 즉, 계단식 앉음면의 세 면을 파내고 그 공간에 수목을 식재한 후, 계단 모양의 뚜껑을 덮은 디테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나무가 식재된 주변의 단을 들어올려 플랜터 벽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진의 장소에서는 계단의 조형적 형태를 부각하기 위해 독특한 플랜터 디테일을 만들었다. 계단과 같은 재질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수목 보호대에는 통기구들이 가늘게 뚫려 있고, 업라이트 효과를 위한 조명 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의 형태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목이 위치한 구멍을 작게 만들었지만, 그 구멍의 중심은 계단 디딤면이 아닌 수직면에 정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수직면과 이에 인접한 위아래 디딤면을 관통한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재미있는 제안이지만, 한편으로는 계단 수직면의 구멍으로 전기 배선이나 콘센트 등 숨겨 놓은 설비와 구조 내부의 모습이 눈높이에서 보여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로 보이기도 한다. 장소를 조금 이동하자 약간 다른 모습의 계단식 수목 보호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하지만 수목 보호대가 놓인 위치가 계단식 앉음벽이 아닌 일반 계단이기 때문에 보호대의 형태도 이에 동화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디딤면과 수직면의 크기가 앞의 사례보다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계단 수직면에 위치한 구멍 또한 작아져, 계단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본래의 디자인 의도를 보다 잘 전달하고 있다.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안동혁[email protected] /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 / 2017년07월 / 351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 공유 공간의 마법
    최근 가장 ‘핫’하다는 연희동과 연남동. 그 변화를 주도한 것은 그다지 잘 알려지 지 않은 한 사람이다. 이 일대에서 5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 불과 5~6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창조한 중심에는 수십, 수백억 원의 공적 자금이 아니라 지역에서 건축업을 하는 김종석 대표가 있다. 그렇다, 그는 소위 말하는 ‘업자’다. 학자도 아니고, 건축가도 아니고, 흔히 듣는 ‘공공◯◯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대화에 사용하는 언어는 어바니즘의 고전에 등장하는 설계 기법들이다. 노출 계단, 오픈스페이스, 선큰sunken, 발코니, 시선의 높낮이, 빛과 밝기, 공간 심리학 등. 어쭙잖은 건축가가 종종 내뱉는 말뿐인 소통이 아니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통, 대화, 연계와 맥락의 디자인’을 그의 건축을 통해 너무도 쉽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거리와 건물의 소통, 사유 재산과 도시의 대화, 손님과 주민,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는 현실의 교과서다. 그는 언제나 현장을 두고 말한다. 그가 쌓아온 방식이다. 경남 함양 출신으로 스무 살에 상경해 연희동의 전파상인 정음전자에서 일하다 제대 후에 사장님이 돌아가신 가게를 인수했다. 그 후 연희동에서 30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온갖 인생 스토리가 녹아 있다. 책상머리에서 구상한 거창한 마스터플랜 없이, 정부도 손 놓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혼자서 해결하고 있는 이 독특한 남자의 경험 보따리는 도시재생이 가야 할 방향을 일러준다. 그의 도시재생은 어찌 보면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재생이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지원 자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욕망, 서로의 행복에 충실한 도시재생이기에 현실적이다. 우리 도시재생에 필요한 것은 눈먼 자금이 아니라 불합리한 절차와 제도의 개선을 통해 창의적인 개인이 뜻을 펴고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사업 성과를 위한 재생, 도시재생의 이름을 빌린 지자체의 치적 쌓기가 아니라, 삶을 위한 재생, 강소 경제 서민 상권을 부활시키기 위해 철저히 시장성을 바탕으로 한 살아남을 수 있는 재생이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최이규[email protected] / 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 2017년07월 / 351
  • [정원 탐독] 문화로 식물을 읽을 때
    식물을 그리지 않은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의 선조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있다. 벽화 속에는 소와 산양 등 주로 사냥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실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간결한 선과 색으로 표현된 일종의 상징 예술이다.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구석기 시대부터 동굴의 벽이나 동물의 뿔과 뼈에 이렇게 전문적으로 그림을 새겨 넣는 작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이상할 정도로 식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2013년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된 질 쿡Jill Cook의 ‘빙하시대의 예술: 현대적 감성의 출발Ice Age Art: Arrival of the Modern Mind’에서도 증명됐다.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을 비롯한 수많은 조각물에서도 식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 대해 전문가마다 주장이 다르다. 하지만 구석기인에게 식물은 지금과 다른 의미였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동물이 식량이며 잡아야 할 어려운 대상이었다면, 식물은 이런 목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산, 돌, 구름과 같은 자연의 현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들이 하늘, 태양, 구름, 산을 그리지 않았던 것처럼 식물도 환경이었을 뿐, 먹고 살아감의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관점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 건 그로부터 5천 년이 지나서다. 이 시기는 인류가 수렵에서 농경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었던 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원전 2,500년 경, 이때부터 식물은 인류에게 풍요와 부활의 상징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림과 조각은 물론 신화의 세계로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기원전 1,300년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집트 테베 지역 센네젬Sennedjem 가문의 묘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밀과 아마를 키우고 수확하는 장면이 나온다. 벽화는 씨를 뿌리고 잎과 꽃을 틔우는 식물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만큼 식물을 키우는 일이 중요했다는 증거다. ...(중략)...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오경아 [email protected] / 오경아가든디자인연구소 대표 / 2017년07월 / 351
  • [시네마 스케이프] 죽여주는 여자 노인을 위한 경관은 없다
    성매매를 하는 소영(윤여정 분)의 주 활동 무대는 탑골공원이다. 일명 바카스 아줌마인 그녀는 5년이나 이곳에서 활동했기에 단골도 제법 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죽여준다’는 소문을 듣고 고객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병에 걸린 사실이 소문나는 바람에 활동 무대를 남산공원으로 옮긴다. 수포교와 남산 순환로를 배회해 보지만 탑골공원에 비해 영업이 시원치 않다. 먼저 다가가 “바카스 한 병 딸까요?” 했다가 모욕만 당하기 일쑤다. 딱한 처지에 놓인 코피노 꼬마와 이태원 산동네를 오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오늘도 무겁다. 소영이 세 들어 사는 허름한 집에는 주인인 트랜스젠더와 장애자와 동남아시아 이주민이 모여 산다. 영화는 서울의 오래된 공간을 배경으로,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소외 계층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소영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이북에서 태어났다. 식모와 공장 직공을 거친 후, 동두천에서 만난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돌도 안 된 채 입양 보내야 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사는 그녀는 길 고양이뿐 아니라 곤란에 처한 꼬마나 노인들을 살뜰히 챙긴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 “그럼 미군 상대하는 양공주였던 거예요?”라고 묻자, “그럼 일본군 상대했겠니? 그 정도 나이는 아니야”라며, “나같이 못 배우고 늙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라고 씁쓸히 미소 짓는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동네에 생기는 카페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는 어디서 쉬었을까. 청계천과 서울역 고가를 공원으로 만들자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는 어디서 놀았을까. *환경과조경351호(2017년 7월호)수록본 일부
  •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영역
    고즈넉한 호수를 찾아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장엄한 폭포를 만나 들뜬 마음에 차를 세웠다. 앞에 ‘◯◯갈비’란 이름의 식당이 자리한 걸 보니 이게 그 유명한 ◯◯폭포구나 싶어 그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동료 작가가 장난삼아 한 마디 던진다. “모르지, 위에 밸브가 있을지도.” 우리는 돌아서며 그럴 법하다고 키득거렸지만(물론 이 말은 장난이고, 그럴 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폭포를 찬찬히 살펴보다 절벽의 맨 위, 밸브를 발견했다. 크리스마스 밤이면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주던 산타가 실은 부모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런 허탈한 기분으로 차를 몰아 호수 인근에 당도하니, 어딘가에서 강한 기운의 일렉트로-토속-뽕짝이 귀에 흘러들어온다. ‘설마 호수 쪽에서 나는 소리는 아닐 거야’ 하는 기대와는 반대로 호수 입구에 다다를수록 소리는 커지고, 디즈니랜드와 디즈멀랜드Dismaland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맨홀 속으로 떨어지면 있을 법한 미니-놀이동산에 입이 벌어지는 것도 잠시. 블랙홀 같이 벌어진 입과 눈꺼풀 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거대한 아기 머리-조각 작품 앞에서는 심지어 공포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저 강력한 사운드의 원천, 사방팔방이 오방색으로 뒤덮인 ‘제의’가 열리고 있었으니, 호수의 기운이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요동쳐 금방이라도 거대한 파도가 올라와 덮칠 것만 같았다. “오늘, 도, 추움~을 춘다, 두웅-기 둥기 두둥-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흰 타이츠에 빨강, 파랑 치파오를 입은 파마머리 아주머니 셋이 제단 위에서 힘차게 다리를 벌려 선 채로 음악에 맞춰 커다란 장구를 때리는 동안, 그 앞에서 총천연색 아웃도어 복장의 중장년 남녀 한 무리가 이 각설이-테크노 뽕짝의 리듬에 맞춰 짝을 지어 흐드러지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얼~쑤! 아~하! 허잇!!! 헛! 헛! 두구두구두구두구 띠로리~~~~” 그런 ‘도란스’ 현장 뒤편으로 보이는 RGB 현수막에 붓글씨체로 쓰인 문구는, 다름 아닌 ‘제◯회 ◯◯시 산악협회 등산대회’. 글씨에 ‘볼드’와 ‘아웃라인’ 처리가 되어있음에도 워낙 현수막이 매직아이 같아서, 문구를 단번에 읽을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환경과조경351호(2017년 7월호)수록본 일부
    • 진나래[email protected] / ‘일시합의기업 ETC’, ‘잠복자들’ 공동대표 / 2017년07월 / 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