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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DA] 다르게 생산하고 공유하기
    잡지사의 편집부에는 매달 새 책이 쌓인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전문지이니 대개 조경, 원예, 건축, 도시 관련 신간이 보도자료와 함께 도착한다. 그 가운데 새 책 담당기자의 안목 그리고 선배 기자들의 간섭(!)과 추천으로 서너 권의 책이 선정되어 이 달의 ‘새 책’ 꼭지가 꾸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루는 색다르게도 인터넷 관련 신간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텔레코뮤니스트 선언The Telekommunist Manifesto』.1 사실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의 오마주인 듯한 제목보다는 그 밑의 부제목에 눈이 갔다. “정보시대 공유지 구축을 위한 제안, 카피파레프트와 벤처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공유지’ 그리고 ‘카피파레프트’란 단어에 눈길이 닿은 것이다. 사실 요즘 ‘공유’란 용어가 흔하게 쓰이는 만큼(비슷하게는 ‘공동성’, ‘공유 도시’, ‘공유 경제’ 그리고 ‘공공 공간’에서 ‘셰어하우스’까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카피파레프트’는 낯선 단어이기는 해도 카피라이트 혹은 카피레프트와 같이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이야기이리라 짐작되었다. 이 문제 역시 설계 분야와 무관하지 않다. 일례로 설계공모에서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상금을 걸고 안을 공모한 발주처에 저작권이 돌아가야 하는 가, 아니면 창작자인 설계자에게 있는가 등은 가늠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이렇게 둘다 ‘올바르게’ 보이기는 하지만 함께 놓기 어려운 두 개념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는 지 궁금했다. 그런 연유로 새 책 담당 기자에게 압력을 넣어 책을 먼저 손에 들었다. 『텔레코뮤니스트 선언』은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공유’에 관한 통상적 이해를 뒤집는다. 흔히 웹2.0으로 통칭되는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 유튜브 같은 커뮤니티 공유 사이트의 등장은 과거 콘텐츠의 일방적 수용자를 직접적인 생산자이자 유통자로 참여하게 하면서 수평적 소통과 자유로운 협력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클라이너Dmytri Kleiner는 과연 웹2.0이 새로운 소통과 협력의 모델을 제시하는 혁명적인 모델인가 질문한다. “웹2.0은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적으로 포획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례로 “유튜브의 진정한 가치는 사이트 개발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리는 사람들이 만든다. 그러나 유튜브가 10억 달러가 넘는 주식으로 구글에 매각될 때 이 비디오를 만든 사람들이 받은 주식은 얼마나 되는가? 아무것도. 전혀. 없다.” 웹2.0 기업들은 자신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발행하기 위한 수단이 없는 사용자들의 ‘집단 지성’을 중앙 집중화시켜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유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실제 물리적 세계인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지리학자인 하비David Harvey는 『반란의 도시Rebel Cities』2에서 도시를 “온갖 유형,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싫어하고 적대하면서도, 하나로 뒤섞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공유재common를 생산하는 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가 활기찬 거리, 다채로운 다문화 생활양식 등 그 지역의 ‘개성’을 부유층에 매각”하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를 거론한다. “지역 원주민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유재를 약탈당할 뿐만 아니라 종종 지대와 부동산세가 치솟는 바람에 쫓겨나기까지 한다.” 때로는 재활성화 정책으로 지역에 근근이 남아 있던 활력이 사라져 공유재 자체가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만들어낸 뉴욕 소호 지구의 활력은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가 올라가면서 망가져갔다. 그리고 이 활력을 만들어냈던 예술가들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빠져나가게 된다. 우리 도시에서도 가회동이나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공유지·공유재를 생산자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 가? 클라이너는 ‘또래생산peer production’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용어는 하버드 대학교 법대 교수인 요카이 벤클러가 자유소프트웨어와 위키피디아 그리고 유사 작업들이 생산되는 방식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래생산은 다른 사람들의 소비를 방해하지 않는 ‘비경쟁적인 자산’으로서 공유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재생산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산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바꿀 수 있을 까? 바꾸어 말하면 또래생산자들이 자신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질적 필요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클라이너는 독립적인 또래peer들 간에 필요한 물질 자산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벤처 코뮤니즘’을 제시한다. 벤처 코뮤니즘이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라면, 카피파레프트 copyfarleft는 비물질 재화를 공유지로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다. 아이디어에 대한 배타적 권리인 카피라이트는 ‘창작하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데, 클라이너는 사실 이것이 보호하는 것은 창작자가 아니라 창작물을 판매하고 유통하는 기업의 수익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카피라이트를 비판하며 나온 것이 안티카피라이트anti-copyright나 카피레프트copyleft다. 둘 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비-소유의 공유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들은 해당 라이선스를 어기지 않으면서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클라이너는 카피라이트의 대안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 크리에 이티브 커먼즈(CC)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CC에서 저자는 다른 이용자들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저자 자신이 상업적 이용의 권리를 보유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저작물은 전혀 공유지에 속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카피파레프트를 주장하며 상업적 이용에 대한 계급적 제한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한다. 노동자 소유 기업은 카피파레프트 저작물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사적 소유 기업의 사용은 제한된다. 카피파레프트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상업적 이용이 아니라, 공유지에 기반하지 않은 사용을 제한하고자 한다. 클라이너가 주장하는 공유의 방식을 실제 물리적 공간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과 가치를 공유하려는 창작자들에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이번 호에 실린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에서 그런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필자인 유영수 소장의 말을 다시 옮겨본다. “이 같은 공모과정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보다 각 팀들이 단순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각자가 수행한 지역에 대한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다른 모든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지역 전체를 위한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려는 공통의 목적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즉 공모 과정에서 생산된 모든 지적 결과물은 어느 팀에 제한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된다는 의미다.”
  • [시네마 스케이프] 경주 도시의 시간, 기억의 대상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40대 이상이라면 경주에 대한 첫 기억이 수학여행일 확률이 높다. 동트기 전부터 산에 올라가 졸린 눈을 부비며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가서 본 석굴암은 충격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첨성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작았고 포석정은 미니어처 같이 느껴졌다. 사진 속에서 본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통 양식을 어설프게 모방한 기와 장식의 4층 민박집과 넓은 잔디밭 위의 벚꽃이 석가탑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바람에 흩날리던 벚꽃 아래에서의 수다는 눈부셨고, 민박집에서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여전히 단골 안줏거리다. 경주의 첫인상은 불국사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내 얼굴 찾기도 힘들다)처럼 박제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첨성대 뒷모습의 표정이 앞모습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황룡사의 빈터가 어떤 울림을 주는지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영화 ‘경주’(감독 장률)에는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경주의대표 선수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래된 골목, 찻집의 정원, 노래방 앞, 아파트 주변, 자전거 길 등 일상의 공간이 주요 무대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공간은 고분과 찻집 정원이다. 장률 감독은 재중 동포 3세로 특정한 장소가 가진 정서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감성을 주로 그려 왔다. 장률은 경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백 개가 넘는 고분이 일상과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모습이 특이해 보였다고 한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베이징 대학 교수로, 선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남은 시간을 경주에서 보낸다. 남자는 고분 앞에서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입을 맞추거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재잘대며 지나가는 장면을 본다. 장률이 실제 느꼈을 경주의 첫인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남자는 미모의 찻집 여주인과 얽히면서 그녀의 일상에 하루 동안 동행하게 된다. 여자는 아파트 창문을 열면 보이는 고분을 바라보며 “경주에서는 단 하루라도 능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여자의 모임에 따라가 술을 마신 남자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술에 취한 채 걷다가 고분 위로 올라간다. 그녀는 고분에 엎드려 고분을 향해 소리치기도 하고, 건너편 고분에 올라가 자신과 똑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기도 한다. 옆으로 누운 여자의 허리선과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이 닮아 보인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고분 위에서 술을 마신 후 깔고 앉았던 돗자리를 타고 내려오곤 했다는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분에서 술 취한 채 썰매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알 만한 사람들이 문화재 위에서 뭐하는 짓들이냐. 문화재는 너희가 올라가 노는 데가 아니야”라고 호통치는 경비원에게 그들은 결국 쫓겨난다. 엄숙한 죽음의 공간과 자잘한 일상이 얽히는 상황은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고분들과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영화의 공간과 주제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마법 같은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고분이 경주의 실제 모습이라면, 찻집은 경주를 은유한다. 찻집은 오래전 모습을 간직한 채 현재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는 공간이다.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주인이 있고 전통차라는 콘텐츠가 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작은 정원이지만 깊이와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내부 공간과 정원은 주인공들의 시선, 움직임, 감정의 변화로 점점 그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정원의 빛은 방으로 들어와 인물을 비추고, 방안의 인물은 정원에 있는 인물을 훔쳐본다. 소나기가 잠시 왔다가 그치면서 정원의 빛이 석양으로 노랗게 물들면 방안의 빛도 변하면서 인물의 마음도 움직인다. 여주인공으로 분한 신민아는 키가 커서 집과 정원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든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찰스 랜드리와의 아주 ‘평범한’ 인터뷰 진격의 ‘창조 도시’, 그 다음은 무엇인가?
    창조 도시의 주창자로 알려진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Comedia 대표)와 메타기획컨설팅(이하 메타)의 인연은 약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메타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이 개최한 국제 콘퍼런스에 『The Creative City: A Toolkit for Urban Innovator』라는 저서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랜드리를 초청하는 작업을 도 왔다. 이후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The Art of City-Making』의 한국어판인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출간을 기획했고, 대구, 부산, 서울, 광주 등에서 랜드리를 초청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이번 전라북도에서 개최한 콘퍼런스를 앞두고도 랜드리는 자신의 일정을 미리 공유하면서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메타 식구들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2014년 6월 9일 오후 4시 반 용산역에서 시작되어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진행된 이 밀착 인터뷰는 기존의 포럼·콘퍼런스·세미나 등에서 이루어졌던 공식적인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고 산책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궁금한 내용을 서로 묻고 답하는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욱 특별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용산역에서 서머셋 호텔로: 랜드리의 전북 방문기 몸집이 큰 백인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약속 장소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랜드리 대표님이시죠.” “오, 반갑습니다. 전화했던 정 부소장이신가요” “네, 이쪽으로 가시죠.” KTX를 타고 용산역에 막 도착한 랜드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역 앞 광장으로 내려갔다. 길을 건너 신속하게 광화문 방향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랜드리가 발걸음을 멈춘다. “와우, 저기를 좀 찍어야겠어요!” 용산역을 올려다보면서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자신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담는다. 택시에 올라서도 랜드리의 사진 찍기는 멈추지 않았다. 간판, 길거리, 나무, 독특한 건물들… “저게 국보남대문이죠? 저쪽으로 가면 서울시청이 있고요.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오세훈 시장 시절, 디자인서울 정책 자문을 위해 시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랜드리는 그 뒤를 이은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못하고 있었다. “새 시장님 이름이 뭐라고요” “메이어 박이에요. 박.원.순.” 그는 끝끝내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정종은(이하 정): “그건 그렇고, 이번이 한국에 일곱 번째 방문이신데, 전북 방문은 어떠셨나요?” 찰스 랜드리(이하 랜): “매우 흥미로웠어요. 흥미로운 콘퍼런스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도 있었어요. 콘퍼런스 전날 밤에 호텔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날 아침에 바로 기조 강연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 있었죠. 저녁까지 콘퍼런스를 진행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내가 있는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일단 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야 했는데, 기조 발표를 마친 다음에야 도시를 볼 수 있었죠. 저로서는 그 반대로 일정이 짜여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 외에는 만족스러웠어요. 시골에서 전통 장인이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본 일도 기억에 남구요, 한옥 마을에서 도시 속의 오아시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공간들을 여럿 만난 것도 좋았습니다. 오늘 기차를 타기 전에 익산에서 한 예술 큐레이터가 오래된 거리를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을 방문했는데, 너무 멋졌어요. 그런 시도들 이야말로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영국 최초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글래스고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서 ‘창조 도시creative city’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으니, 랜드리가 이 개념을 파고든 지도 벌써 25년이 가까워진다. 그 세월 동안 그가 직접 방문해서 들여다보고 컨설팅을 진행한 도시의 숫자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전역에 걸쳐 수백 개를 헤아린다. 따라서 ‘그 경험에서 나온 알짜배기 교훈을 정제해서 들려주십사’하는 요청이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이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처럼,난생 처음 한 도시를 방문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내용’을 스스로 채우기 위한 시간을 미리 확보해주었다면 더욱 유익했으리라. 정: “예전에 방문했던 한국의 도시들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전주에 머무셨죠. 어떤가요? 전하고는 좀 느낌이 달랐나요?” 랜: “네, 전주는 인간적인 규모human scale를 갖고 있더군요. 게다가 콘퍼런스 장소가 한옥 마을 주변이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힘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제가 더 궁금했던 것은 일상 문화였어요. 그 도시에 관한 생생한 느낌real feeling은 특별한 것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포착되는 법이거든요. 제가 자꾸 다른 곳, 더 평범한 곳을 가자고 하니까 사람들이 좀 이상해 하더라구요. 한옥 마을 바깥을 충분히 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타산지석: 한옥 마을과 이태원의 미래를 위한 레시피 잠깐 서머셋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서울의 ‘평범한’ 것들을 들여다본 후, 저녁 약속 장소인 이태원의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소맥으로 시작하겠다고 우겨서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한 랜드리. 쌈장을 잔뜩 묻혀 차돌박이와 꽃등심을 흡입하시더니 급기야는 옆 테이블의 쌈장까지 자기 앞으로 가져간다. 한국식 음주 문화에 대한 싸이의 새 뮤직비디오,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의 기원, 최근 K-Pop의 기세 등에 대해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다가 상하이, 베이징, 칭다오 등 재빠르게 ‘창조 도시’ 트렌드에 올라탄 중국의 도시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랜: “언급한 도시들 외에도 여러 도시들에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나는 매우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도시들이 ‘미쳐가고 있다obviously going crazy’ 또는 ‘폭발할 것 같다explode’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최근 방문한 베이징에서 갖게된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여러 도시들이 창조 도시를 언급하지만,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중국 정부의 문화 부처차관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창조도시에 관한 얘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창조 경제’에관한 논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각 도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논의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물론 나의 주관적 인상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들의 운명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나와 교류한 일군의 중국인 전문가들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문제의 근원은 ‘자유의 결핍’입니다. 자유를 동반하지 않은 창조성을 진정한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서로 다른 문명에서 서로 다른 창조성 개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슬람권의 ‘창조성’과 기독교권의 ‘창조성’, 그리고 유교권의 ‘창조성’ 개념은 같을 수가 없을 테지요. 또한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일본의 ‘창조성’과 한국의 ‘창조성’과 중국의 ‘창조성’ 역시 상당히 다를 겁니다. 다시 베이징과 상하이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무언가 일이 되게 하는 것, 과감한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죠? 점점 더 그 도시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오염과 같은 건강 이슈, 사회적 불신과 양극화 등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아까 내가 언급한 전문가들은 꽤나 부유한 사람들이었는데요, 거의 모두가 유럽이나 북미에 따로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중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랜드리는 유럽의 창조 도시가 표방하는 ‘창조성’은 구성원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을 전제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 결핍’이야말로 중국의 ‘창조 도시’를 진정한 창조 도시로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중국의 도시들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도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다소 주제가 무거워지기도 하였으나, 저녁 식사 이후 이태원 구석구석을 산책하게 되자랜드리는 금세 이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로 되돌아갔다. 이견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지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한국에서 이태원梨泰院/異胎院보다 더 국제적인 공간, 더 이문화적인 공간이 있을까? 이태원 뒷골목의 매우 모던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치자마자 랜드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통문화의 본산인 전주 한옥 마을과 이문화의 집합소인 이태원 중에서 어디가 더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느냐고…. 정종은은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문화 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메타기획컨설팅에서Knowledge본부의 부소장으로 ‘세계문화정상회의 의제 설정 연구’,‘이야기산업 산업범위 확정 연구’, ‘꿈의 오케스트라 합동공연 효과성연구’, ‘콘텐츠코리아랩 아이디어융합공방’의 프로그램 개발 등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예술과 사회’를 가르치고 있으며,한국문화정책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 정종은 / 메타기획컨설팅 Knowledge본부 부소장 / 2014년08월 / 316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경관의 발견
    #21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꿈 구겐하임 미술관을 위시하여 불후의 명작을 무수히 남긴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에게 “당신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입니다”라고 누군가 칭송하자 “당대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지”라고 응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폭포 위에 지은 집’(낙수장(落水莊) 혹은 Fallingwater)인데 건축주 에드거 카우프만이 애초에 원했던 것은 폭포 맞은편에 집을 지어 창밖으로 폭포를 바라보며 즐기는 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를 무시하고 폭포 위에다 집을 지어버렸다. 그리고 폭포 소리, 즉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카우프만을 설득했다. 그때 집을 폭포 위에 짓지 않고 맞은편에 지었다면 과연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까. 라이트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인구 밀집형 도시를 못마땅하게 여겨 평생 그에 대한 대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 1932년, ‘리빙 시티Living City’의 비전을 펼쳐보였다. 한 가족당 1에이커, 즉 4,000m2 정도의 땅을 고루 분배받기 때문에 브로드에이커 시티Broadeacre City라고도 불렀다.2 미국 영토를 4,000m2 단위로 나누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대륙에 고루 퍼져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정한 장소에 집중적으로 모여 도시를 형성하지 않게 되므로 도시로부터 자유로운 대륙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미 대륙 전체가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가 될 것이므로 도시는 결국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게’ 된다. 4,000m2의 땅에서 농사도 짓고 살고 싶은 대로 산다면 새로운 사회가 형성될 것이라 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며 건축가적 시선에서 도시설계를 통해 이를 이룩해 보려 했다. 만약 그의 비전대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졌다면 미국인들은 현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프레리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며 모기지론이니 금융사고니 하는 것도 모른 채 평화로울지도 모를 일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위시한 소위 ‘시카고 학파’의 건축가가 중심이 되어 19세기 말에 짓기 시작한 프레리 스타일 혹은 프레리 하우스의 건축적 특징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강한 수평성이며, 황토색, 적토색 등 자연적인 색과 소재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자연순응적인 건축 양식이라고도 한다. 프레리 스타일의 건축가들은 그들이 지은 집이 주변 경관에 스며들기를 원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프레리였을까. 프레리는 대초원이라고도 하여 북미 중서부 평원 지대를 이루는 독특한 경관을 말하기도 하고 그 경관을 이루는 식물 군락을 일컫기도 한다. 서부 활극에서 인디언이나 카우보이들이 프레리에서 시원하게 말을 달리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프레리 위의 작은 집Little House on the Prairie’이라는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는데,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서도 ‘초원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적이 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대초원을 ‘개간’하여 마을을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후세의 우리들에게는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지만 당시의 개척민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갈아엎어야 했으므로 힘겨운 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풀이 너무 커서 말 탄 사람들이 완전히 그 속으로 사라질 정도라고 했다. 건조기에도 지하수를 빨아들일 수 있도록 뿌리를 깊이 내리는 프레리의 ‘큰 풀’ 중에는 1.5m에서 7m 깊이까지 뻗는 것도 있었다. 농사 지을 땅을 마련하기 위해 억센 풀과 싸움을 하는 동안에는 프레리가 가진 생태적 가치라거나 경관의 아름다움 등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1840년경 강철 쟁기가 도입된 후 1900년경까지 프레리는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갔다. 애초에 70만km2, 즉 한국 국토 면적의 일곱 배가 넘던 프레리 면적 중 현재 0.01퍼센트 정도만 남아 있다.3 19세기 말, 사람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프레리 경관의 유일성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일리노이 주가 바로 한 때 큰 풀 프레리가 지배했던 곳이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프레리 보존 및 복원 운동이 일어났다. 1901년 헨리 챈들러 카울즈Henry C. Cowles(1869~1939)라는 생태학자가 시카고 주변의 프레리의 형성 과정,변천사와 유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4 물론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수많은 식물학자가 대륙을 종횡으로 다니며 식물을 수집하고 기록하긴 했지만 하나하나의 개체에 대한 관심에 그쳤다. 이제 처음으로 생물지리학적 관점 하에 기후, 토양, 식물, 인위적 영향 등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경관’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레리는 백퍼센트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서부 건조지대의 ‘짧은 풀 초원Shortgrass Prairie’을 제외한다면 이미 인디언들의 손때가 묻은 경관이었다. 초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숲으로 천이하게 되어 있다. 들소를 사냥해서 먹고살았던 북미 중서부의 인디언은 정기적으로 불을 질러 초원 상태를 유지하는 ‘들불 관리’ 기법을 일찌감치적용했다. 초기 생태학자들은 그 사실을 미처 몰랐으므로 프레리를 복원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진땀을 흘렸다. 수시로 비집고 올라오는 그악스런 목본식물을 근절하기 위해 농약을 엄청 뿌리기도 했다. 프레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만큼 절실했다. 사람들은 곧 프레리를 ‘미국적 경관의 이상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경관에 인간적 이념을 이입시킨 것이다. 이에 가장 앞장 선 인물이 빌헬름 밀러Wilhelm Miller(1869~1938)였는데, 그는 1915년, 조경에 프레리의 ‘영혼’을 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32쪽짜리 책자를 발간했다.5 프레리를 거의 종교적으로 찬양했던 밀러는 다음과 같은 ‘프레리 헌장’으로 글을 맺는다. “나는 프레리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들이 탄생할 것을 믿는다. 프레리에 세워진 국가와 지역사회의 아름다움을 옹호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 아름다움을 훼손하고자 하는 탐욕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빌헬름 밀러는 독일계 학자이며 조경가이며 지식인이었다. 위의 첫 문장과 독일이라는 국가를 합쳐보면 좀 듣기 거북한 대답이 나온다. 조경계의 나치 사냥꾼들 귀에 경종이 울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email protected]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2014년08월 / 316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베끼기
    양심의 가책 중간 발표는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나의 설계를 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던 교수님도 지적보다는 긍정적인 조언을 많이 주셨고, 어떤 교수님은 최종 발표가 기대된다는 격려까지 해주셨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저 설계는 며칠 전 잡지에서 본 그럴듯한 작품들을 짜깁기하여 베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베낄 의도는 없었다. 참조만 한다는 것이 결국 베끼기가 되어버렸다. 다른 안을 다시 그려보아도 내 눈앞에 있는 모작만 못한 느낌이다. 그냥 이 안으로 끝까지 가볼까? 그러다 원작을 알고 있는 교수님이 지적을 하시거나 친구들이 알아채고 비아냥거릴까봐 걱정이다. 지적과 비웃음을 제쳐두고, 좋은 조경가가 되고 싶다는 내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자신만의 생각과 개성을 작품에 담아야 한다고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긴다. 생각을 해보면 어디까지가 참조이고 표절인지 헷갈린다. 좋은 사례를 찾아보라는 교수님들의 조언이 베끼기를 어느 정도 용인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배우는 과정이라면 어느 정도의 베끼기는 공부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실무에서는 베끼기가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일까? 베끼기는 과연 나쁜 짓인가? 베끼기의 역사 믿기지 않겠지만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베끼기였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 예술을 논할 때 대개는 르네상스, 바로크처럼 시대를 기준으로 삼거나 낭만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와 같이 생각과 작업 방식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의 그룹을 묶어서 이야기한다. 처음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 이가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다. 빙켈만은 한 편의 논문을 통해 작가 개개인의 분석 수준에 머물던 미술사의 담론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빙켈만이 1755년 출판한 논문, ‘회화와 조각 예술에서 고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관한 생각’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던 빙켈만을 단번에 저명 인사로 만들 정도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1 빙켈만은 이 책에서 고대그리스 예술을 서양 문명이 도달한 최고의 예술적 경지로 극찬한다. 그리고 예술이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로 돌아가 철저히 당시의 예술을 베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들으면 궤변 같아도 당시 이러한 생각은 나름 오랜 문화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예술은 대부분 그리스 예술의 모작이다. 예외가 있다면 정치인들의 동상이나 전승 장면을 묘사한 부조 정도밖에는 없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능력이 떨어졌던 것은 아니다. 로마 예술의 독창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예술가의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미의 기준이 고대 그리스 예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 예술의 가치는 창의성보다는 얼마나 그리스의 작품을 잘 모방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2 예술가를 높이 평가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모방은 여전히 예술의 중요한 가치였다. 빙켈만은, 라파엘로도 제자들에게 그리스의 조각 작품들을 소묘하라고 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라파엘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르네상스의 대가들 역시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훌륭한 예술의 전형으로 여기고 작품에 반영하려 했다. 또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알베르티 역시 『회화론』에서 자연 풍경을 대상으로 습작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 작품의 모사도 훌륭한 예술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훈련 방법이라고 기술할 정도로 모방을 중요시했다.3 놀랍게도 예술가는 철저하게 고대 그리스를 베껴야 한다는 빙켈만의 주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 실제로 빙켈만 이후 18세기 후반 예술계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의 모방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조를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라고 부른다. 신고전주의는 단순히 회화나 조각에 국한된 움직임이 아니었다. 미술은 물론 문학, 연극, 음악 역시 고대 그리스 비극의 구성을 따르려 했으며 건축에서 역시 그리스 신전의 양식을 재해석한 건물들이 도시의 주요 공간을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베끼기의 전통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지속되고 있다. 빙켈만의 시대처럼 오늘날 예술의 목표가 모방에 있지는 않지만, 사실 모방만큼 설계의 질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모방이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될 죄악은 아니다. 모방을 통해서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의 설계를 체득하게 되고 그들의 문제점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베끼기에 너무 익숙해지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잡지나 작품집을 통해서 설계를 하다 보면 누군가의 아류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모방은 분명 양날의 칼이다. 문제는 모방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모방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첫째, 다른 분야에서 베껴라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모방을 해야 좋은 베끼기가 될 수 있을까?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분야에서 베끼는 것이다. 분야가 다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체나 사고의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분야의 작품을 베낄 때는 체계를 변환하는 고도의 해석이 필요하다. 이 경우 해석 자체가 결국 창조의 과정이 되기 때문에, 마음먹고 베끼려 해도 표절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작곡가가 외국 곡을 표절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건축 작품을 표절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 베끼려면 유사한 인접 분야인 것이 좋다. 접근 방식에서 너무 차이가 생기면 베끼는 과정에서의 해석이 하나마나한 비유의 차원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화감독들은 유사한 영상 예술 분야인 사진 예술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며, 건축가나 조경가의 작업은 회화나조각과 같은 미술 분야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운동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였던 데 스틸De Stijl이 이러한 베끼기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네덜란드어로 데 스틸은 ‘양식the style’을 뜻한다. 데 스틸은 그 의미처럼 예술의 다양한 매체를 넘어서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각 예술의 양식을 제시하고자 했다.4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회화는 데 스틸이 생각한 예술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에 가장 가까웠다(그림1).5 주로 화가들이 주축을 이룬 데 스틸은 건축가인 리트벨트Gerrit Rietveld가 참여하면서 더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추상적 양식을 구현해나간다. 리트벨트가 디자인한 가구를 보면 기하학적 구성과 삼원색과 같은 몬드리안 회화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림2).6 다음은 데 스틸의 수장이었던 반 두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의 공간 구상도이다. 리트벨트의 가구와 마찬지로 이 다이어그램 역시 이차원적인 몬드리안의 평면 구성을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입체적인 구성으로 만든 시도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림3). 건축도 예외는 아니다. 데 스틸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인 슈뢰더 하우스Schröder House는 외관상의 형태뿐만 아니라 내부의 인테리어까지도 추상 회화를 연상시키는 구성과 배치로 이루어져있다. 데 스틸의 경우 회화의 형태적 언어를 산업 디자인에서, 그리고 건축에서 베끼면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간 셈이다(그림4).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김영민[email protected]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 2014년08월 / 316
  • [조경가의 서재] 그 새로움에 대하여
    새로움의 시대 ‘새로움’의 시대다. 새롭지 않으면 눈도 돌리지 않는다. 주변에선 모두 새로움을 추구하느라 난리다. 새로운 버전의 아이폰이 나오는 날에는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샘한 이들이 장사진을 친다. 낡은 것, 익숙한 것은 이제 죄악시된다.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왜 이리 새로움에 열광하는 것일까 사실 진중권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우연히 그의 서양 미술사 강의 동영상에서 대중 매체에 노출되는 모습과 다른 진지함을 보았다. 그 전에 읽은 몇 편의 글에서 ‘재기’는 충분히 보았지만 ‘지적 진지함’은 보지 못했기에 진지함이 묻어나는 그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학교 다닐 때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나 루카치György Lukács, 하우저Arnold Hauser 등의 미술사를 끝까지 읽지 못한 숙제를 해결해 보고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과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을 택했다. 고전예술 편은 건너뛰었다. 강의만큼 책이 쉽진 않았지만 미술사 전체를 서술하는 틀과 도판 자료는 어렵고 지루하기만 한 서양 미술사를 한 눈에 보게 해 주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세상과 서양 미술사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으랴마는 예술가들의 앞선 사유의 흐름이 어떤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다행히 첫 도판1부터 기대를 한껏 부풀려준다. 수 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고전 예술의 전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에 주류 자리를 내준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미술사의 흐름은 한마디로 ‘숨막히게 새로움을 추구해 온 시대’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자칭한 ‘아방가르드avant-garde’2라는 단어에는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그의 언어로 서양 미술사를 요약해 본다. 안과 밖 자연이라는 ‘주어진 세계’ 속에 ‘머무는being’ 존재가 아닌, 자연 ‘밖에 서 있는ex-being, existence’ 인간은 자연을 원본 삼아 이를 모상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어진세계’를 구축한다. 차츰 계몽을 통해 자연이 만만해지고 자신의 ‘만들어진 세계’가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 이르자 인간에게 자연은 더 이상 이상적인 모범이 아니다. 미술도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먼저 화폭에서 색채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야수주의). 그리곤 남아있는 형태와 공간을 실제로 지각되는 방식으로 그리자 화면 속 형태는 점점 지표성index을 잃어간다(입체주의). 이쯤 되니 내 바깥에 반드시 대상이 없어도 형태와 색채만으로도 회화를 완성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순수 추상). 이 자신감은 거칠 것 없이 더 끝으로, 회화일 수 없는 경계, 환원할 수 없는 근원까지 나아간다(절대주의). 망막에 맺힌 것만 드러내는 일이 지루해지자 이젠 좀 더 내 안의 정신적, 심리적인 것까지 밖으로 드러낸다(표현주의). 정치적으로 좌와 우, 계급 간의 대립이 격심해지자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급진적 미학을 앞세워 오감과 움직임을 포착한 회화와 사진이 등장하며, 기술과 예술의 통합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기계적 건축과 도시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미래주의).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좌절된다. 김용규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생태 기술 개발과 관련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로참여했으며, 현재는 생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하는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일송환경복원과 Ecoid Corporation, USA 대표이사를맡고 있다.
    • 김용규[email protected] / 일송환경복원, 에코이드 대표 / 2014년08월 / 316
  • [그들이 설계하는 법] 두 번째 이야기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 모든 설계 프로젝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 과정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꼭 그만큼 세상을 더 잘 보게 된다. 서울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경험의 폭이 넓을 리 만무하다. 모든 설계 과정은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두려움과 공존할 수밖에 없나 보다. 설계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설계 작품 하나가 끝나면 그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상의 복구 청년 시절 난 그다지 어린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어린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학위 과정이 끝나자 그들에 대한 학구적 애정도 희석되었다. 지금도 종종 뜨끔한 점 중의하나는, 만약 나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나의 부모가 늙고 병들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세상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설계했을 것이란 점이다. 내 주변에 사회적 약자가 늘어가면서 세상의 불친절함에, 세상의 물리적 환경을 디자인하는 설계가들의 무심함에 느닷없이 화가 날 때가 많아졌다. 지금이야 훨씬 좋아졌지만 아이의 유모차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다녀야 했던 수년 전의 도시 거리는 100m를 전진하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노면은 울퉁불퉁했고, 각종 시설들이 툭하면 앞길을 가로막았고, 단차와 턱도 즐비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설계의 디테일은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와 더 관계 깊다고 생각했다. 디테일이 사회적 배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서울시의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디자인 새마을운동’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질적기준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취지로만 보자면 설계가의 자율성을 훼손한다기보다 설계가의 손을 벗어나있는 도시의 구석구석에 대한 촘촘한 점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젊고 신체 건강한 자는 세상의 크고 작은 돌부리들을 그저 뛰어넘어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도 누군가는 걸려 넘어지고, 작은 장애물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걸음을 가로막는다.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몸이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세상의 지배적인 질서가 소외시킨 약한 자에게 세상은 여러모로 친절하지 않다. 평화로운 나라의 백성은 군주가 누군지 관심이 없고,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에 사는 자는 법과 규제에 무심해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이니, 가이드라인과 규제가 강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회가 규제없이 굴러가기에는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어린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논문을 쓴 것이 밑천이 되고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위험한 세상에 대한 엄마의 본능적인 의구심이 더해진 탓에, 어린이 놀이 환경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축적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학생 시절의 관심이 개념적이고 학술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구체적인 아줌마의 관심일 터이다. 그래도 유아교육 전문가가 아닌지라 어린이 공간은 어린이 전문가와 함께 설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놀이 환경 설계에 있어서 어린이들을 직접 만나고 선생님들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한때 어린이였으니 어찌 보면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설계할 때는 그만큼 더 눈높이를 낮춰야 하고, 그만큼 더 유치해져야 하며, 그만큼 더 쪼잔해져야 하고, 그만큼 더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해 공원 설계 수업에서 서로 다른 열 명의 역할을 주고 그의 관점으로 공원을 분석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청소년 한 명, 중년 남자 한 명, 애기 키우는 엄마 한 명, 할머니 한 명 등등. 그중 한 명은 어린이의 눈높이인 지상 90~100cm 정도에서 공원 전체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관목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아이의 눈앞에 거대한 수벽으로 펼쳐졌다. 반면 어른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구멍으로 어린이들은 런닝맨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배치도를 전제로 하는 고정된 성인의 시각을 벗어나서 본 세상은 정말 위험한 전투장일 수도, 혹은 무엇이든 가능한 신세계일지도 모른다. 설계가 일단 시작되면 가급적 검증된 관점과 검증된 레퍼토리와 검증된 도형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다. 노인이 고집스러워지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때까지 쌓아온 삶이 전부 무너지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계가에게 자기부정은 생각만큼 멋진 피드백 프로세스가 아니다. 하지만 반성과 성찰이 삭제된 작업은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굳혀버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버린 레고 블록처럼!1 나를 돌이켜보는 성찰 과정은 나의 잘못만을 반성하는 일은 아니다. 내 작업 과정에 접착제로 붙어있는 부분들을 찾아 필요한 만큼 해체하고, 검증된 조립 설명서 외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도록 레고 블록을 스스로 해체하는 일, 즉 창조를 위한 파괴 작업이 설계적 반성 혹은 설계가의 성찰의 목표이자 방법일지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당연하게 여기던 질서를 새삼스럽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 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 김아연[email protected]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스튜디오 테라 대표 / 2014년08월 / 316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귄터 보크트 보크트 조경설계사무소 설립자 겸 소장, 스위스취리히연방공과대학 석좌교수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는 아티스트 댄 그레이엄Dan Graham과 조경가 귄터 보크트의 협력 프로젝트인 옥상 정원, ‘생울타리와 반사 유리 체험Hedge Two-Way Mirror Walkabout’을 선보이고 있다. 그레이엄은 반사 유리를 이용한 파빌리온pavilion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현대 도시의 대표적 소재인 철과 유리를 사용한 미니멀리스트minimalist 스타일의 추상적인 구성을 통해 서구 정원의 통인 파빌리온을 재해석한다. 그의 작품은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 미술과 건축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전통적인 파빌리온이 정원의 초점focal point으로 작동하는 반면, 그레이엄의 작품은 주변의 환경을 반사하며, 공간을 나누고, 틀을 짓는 역할을 한다. 귄터 보크트는 스위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경가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다. 알리안츠 아레나Allianz Arena, 노바티스 캠퍼스Novartis Campus Park, 국제축구연맹 본부Home of FIFA, 런던 이스트빌리지East Village와 테이트모던 미술관TateModern Collection 등의 프로젝트는 조경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디자인 프로세스나 기저에 깔린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난 5월 16일, 뉴욕건축센터Center for Architecture에서 열린 ‘도시의 자연Urban Nature: Between Human and Non-Human’ 콘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귄터 보크트를 만났다. 그에게서 이론이 단단하게 뭉쳐진 실무 조경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귄터 보크트는 최근 여러 강연을 통해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소개보다는 주로 현재 조경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조경 설계의 환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005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Zürich(ETH Zürich)건축학과 교수직을 맡은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힘든 이유로 이미지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을 꼽았다. 즉 공공 공간이나 도시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경관의 각 요소에 대한 역사나, 그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유, 각 요소의 구체적 작동 방법 등 전반적인 도시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매우 제어된 상황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맥락을 무시하고도 작품이 성립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조경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보크트의 논지다. 보크트는이미지 이전에 그 아래에 숨겨진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취리히와 스위스의 물리적·문화적 환경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현재 스위스 디자인의 힘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세가지 요인으로 정리했다. 첫째, 스위스의 자연 환경이다. 알다시피 스위스는 항상 알프스를 무대로 살아왔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들의 조경은 낭만적인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발전해 왔다. 이에 반해 스위스는 혹독하고 위험한 자연 환경을 다루기 위해 언제나 실질적 가치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역사가 전개됐고, 이 때문에 비교적 일찍 모더니스트 디자인의 원리를 받아들여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둘째, 스위스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정치 사회적 역사 과정이다. 스위스는 유럽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고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왕정이나 귀족 정치를 거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스위스의 각 마을에는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 전통의 무게와 굴레가 제거된 상황에서 스위스는 독자적이고 실리적인 건설과 설계 문화를 개척해 왔다. 셋째, 스위스의 독특한 장인 문화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과정이다. 학생들은 16세가 되면,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을지 아니면 도제apprenticeship 수업을 받기 위해 마스터의 견습생으로 들어갈지 결정해야한다. 대부분의 국가와는 달리 스위스는 각 전문 분야를 자격증 제도를 통해 보호하지 않는 반면, 도제 교육을 통해 이른 나이에 직업적으로 성숙한 프로페셔널을 길러냄으로써 높은 설계·시공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형으로 구성된 환경과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시달려온 역사적 상황,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인해 말소된 전통 등 한국의 사정은 귄터 보크트가 묘사하는 스위스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는 종종 ‘랜드스케이프landscape’와 ‘랜드스케이프 파크landscape park’를 구분해 말하는데, 스위스는 ‘디자인되지 않은 랜드스케이프un-designed landscape’라고 한다. 구체적인 맥락은 다르지만 빠른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의 도시 환경을 실용성 위주로 건설해 온 한국의 경관적 여건도 이와 유사하다.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처럼 우리와 국토와 문화적 여건이 다르고, 서서히 성장하고 성숙해온 나라들에 비해 스위스는 직접 참고 할만한 사실이 많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통해 귄터 보크트의 작품과 스위스 디자인은 어느 순간 이루어진 신화가 아니라 주목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 최이규[email protected]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2014년08월 / 316
  • [공간 공감] 메리츠 타워
    이번 호의 대상은 ‘걱정 인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메리츠화재 사옥의 외부 공간이다. 강남역 사거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메리츠 타워는 내년이면 준공 10년차가 되는 꽤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의외의 외부 공간이 있다는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독자들도 사진만 보고서는 외국 프로젝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잘 모르는 일차적인 이유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다. 강남대로와 면한 건물 전면에도 약간의 공공 공간이 조성되어 있지만 그곳이 건물 후면 공간의 존재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건물의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기는 하지만 멀리서 보기에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메리츠 타워의 로비에 들어서면 거대한 창의 액자 효과를 통해 비로소 후면 공간을 감상할 수 있다. 다소 까다롭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건물의 후면 진입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강남역 상업 지역의 이면도로에서 이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지만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육중한 담의 크지 않은 문을 통과해야 후면의 외부 공간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기업에 따라 사옥의 외부 공간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는 도중 경비원의 압박 수비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은 비교적 견제 없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안내판에 흡연이나 요란한 이용에 대한 자제가 당부되어 있는 정도다. 이것이 정교한 의도인지는 설계자의 설명을 듣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길은 없다. 하지만 민간이 공공에 제공한 공간이되, 아는 사람들만 조용히 사용하는 정도로 설정된 소극적 분위기를 풍긴다. 열려있으나 비밀스러운 정원이 라고 부를 만하다. 공간 자체의 완성도는 만족스럽다. 공사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쓴 듯한 고가의 재료가 말끔한 디테일로 시공되어 있고, 메인 뷰는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잡다하지는 않다. 나무가 땅을 만나는 상식적 방식에서 벗어나 있어서 (대왕참나무 입장에서) 다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공간을 지배하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는 세련되어 보이고 건축물과 담에 의한 후면 공간의 위요감도 만족스럽다. 특히 주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은 외부 공간을 밝고 생기 있게 만들고 있지만,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게 하는 적절한 선택이다. 캐스케이드cascade 방식의 물 활용은 강남역 이면 도로와의 단차를 극복하고 공간을 생동감 있게 연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적으면 차분하게 보일 텐데 많은 양의 물을 꽤 급한 경사로 쏟아붓다보니 물의 패턴도 역동적으로 보인다. 물의 질감은 건물 내에서도 흥미로운데, 소리가 소거된 상태로 물의 부서짐을 감상할 수 있다. 물에 관한 재미있는 관찰은 외부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캐스케이드 방식의 수경 시설은 후면 공간 전체를 대상으로 큰 물소리를 생산하고 있다. 캐스케이드와 외부 공간을 구획하는 옹벽 사이에 생긴 선큰 공간에는 벤치와 함께 휴게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정욱주[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4년08월 / 316
  • [칼럼] 재해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방법
    저녁이 되면서 내리던 비는 더욱 거세졌다. 폭우 속에서 처량하게 순서를 기다리던 비행기들은 모두 결항됐다. 우리는 곧 허물어질 듯 한 여관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섰고, 날씨는 더거칠어져 있었다.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덜컹거리는 창문, 펄럭이는 맥주 회사 달력, 무엇보다 지린내가 절어 있었다. 여기에 묵었던 사람들의 오줌은 훨씬 더 독한 모양이었다.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을 자는 내 동행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창문 밖 어둠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이 긴장되어 자리를 펴고 눕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갑자기 어느 깊은 외딴 구석에 격리되고 절연되고 갇힌 것이다. 풍요롭고 안락하게만 느끼던 휴가지의 공간이 갑자기 사라지고, 잠들면 어두운 수렁에 빠질 것 같은 두려운 휴전 상태로 던져졌다. 장엄한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스펙터클에 갇혀 날이 밝기를, 비바람이 잦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태풍으로 수천억 원의 재산 피해와 수백 명의 인명 피해, 그리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우리 사회는 매년 이와 비슷한 재해를 겪었고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매년 겪는 일쯤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어떻게 매번 똑같은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건축 저널리스트로 일을 막 시작할 때 이 일을 겪다보니 건축가들이 제안한 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작업을 찾아보기도 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등 자원의 과소비로 인한 자연의 위협이 커지고 있지만, 국내 건축계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했을 뿐이다. 2011년 3월 11일,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대재앙의 실체에 직면했다.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로 이어졌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재난은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내적 문제와 한계를 가장 묵시록적으로 드러냈다. 이 재앙은 일본 사회는 물론 국제 사회에 원자력에 대한 반성을 일으켰다. 일례로, 이와사부로 코소는 “지금껏 ‘인류의 진보’로 여겨지던 ‘장치’의 한 가지 도달점–에너지 공급의 효율화와 생산의 고도화, 정보·과학기술, 그것들과 복합적으로 얽힌 관료 기구와 시민사회–이 재해를 계기로 자기 붕괴”한 표시라고 이 재난을 진단했다. 건축가인 토요 이토도 “쓰나미 피해와 원전 사고라는 두가지 재해 모두가 인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사람과 공동체가 건축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을 잃은 센다이 시 미야기노로 가서 참사를 함께 이겨낼 공동체를 위한 건축 ‘모두의 집Home for All’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게루 반은 이재민을 위한 임시 거주 공간 프로그램을 꽤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정확한 상황을 공개하고 대처하기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일본 건축계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변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환경과조경』 이번 호에 소개되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도 매우 흥미로운 설계공모다. 주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12년 10월 허리케인 샌디가 강타한 뉴욕의 해변 지역을 미래의 재해에서 보호하고 거주민들에게 안전하고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기위해 시작되었다. 이를 구현하는 제안들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지역민이 참여해 만들어가고 있는데, 현재 OMA와 BIG 팀 등 건축가, 조경가, 엔지니어, 도시학자, 사회학자, 정치가 등이 한 팀으로 구성된 여섯 개의 협력적 팀을 최종 선정해 그들이 함께 이 지역의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다. 장기적 안목에서 재해를 예방하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는 공감대가 정부와 시민사회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재해 대처 능력이다. 참으로 답답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의 붕괴, 민주주의의 타락, 그리고 사회적 재앙을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망가뜨린 생태계를 복원하는데도 우리 건축, 도시, 조경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4대강의 환경 문제가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그 심각성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뒷짐을 지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그 환경 속에서 우리의 건축을 고민해야 하지만, ‘안일한 유토피아’ 담론의 종결자인 4대강 사업이나 원자력발전에 대해 새롭게 검토하자는 건축계의 적극적인 목소리와 구체적인 제안은 아직 요원하다.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Andrew Cuomo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지구상의 많은 지역은 분명 대자연의 소유다. 어느 순간, 대자연으로부터, 당신이 이곳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박성태는 중앙일보 출판국에서 잡지 에디터로 일했다. 그 후 『인서울매거진』과 『공간』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건축신문』, ‘건축학교’, ‘프로젝트 1’, ‘통의동집’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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