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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
1.
작년 가을, 박원순 서울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선포했다. “서울역 고가는 도시 인프라 이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므로 “원형을 보전하면서…하이라인 파크를 뛰어넘는 녹색 공간으로 재생시켜 시민에게 돌려드리겠다.…서울역 고가가 관광 명소가 되면 침체에 빠진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다. 산업 유산이므로 남겨서 하이라인처럼 명소로 만든다는 낭만적 논리는 국제 설계공모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졌다. 논란과 우려 속에서 강행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초청사에서 박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역 고가는 근대 서울의 얼굴을 담고 있는 역사 유산이자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서울…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추억의 공간입니다.…서울역 고가를 무조건 철거하기보다는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하고…사람 중심의 보행 거리로 탈바꿈시키고자 합니다.…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조성해 도심의 문화 유산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주변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계 지침서에 활자화된 공모의 목적은 “보존을 통해 도시 기억과 시민 공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서울역 고가는 한국의 근대사를 대표하는 산업 유산이므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공공의 보행로로 재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쟁점은 결국 서울역 고가를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볼 수 있는가로 수렴된다. 이번 공모전은 이 이슈에 대한 해석과 해법을 중심에 놓았어야 한다. 서울역 고가는 196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인구 집중과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한 서울 입체 도시화 사업의 산물이다. 그 직전에 도쿄에서 진행된 파괴적 입체 개발의 모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울역 고가를 비롯한 당시의 고가 도로들은 개발의 상징이자 근대화를 과시하는 경관적 표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교통 정체를 유발하고 안전을 위협하며 시민의 보행권과 조망권에 장애가 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서울에서만 16개의 고가가 철거되었다. 서울의 관문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서울역 고가는 철거해야 할 위험 시설로 이미 2007년에 진단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서울역 고가는 과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산업 유산인가1 옛 것이면 가치를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재활용의 ‘착한’ 이미지에 편승한 포퓰리즘적 논리는 아닌가?
공모전에 초청된 일곱 명의 조경가와 건축가에게는 바로 이 핵심 쟁점을 탐구하는 작품을 요청했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 도시 개발의 산물인 고가도로를 산업 유산의 하나로 재평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과거를 지워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쓰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디자인적 해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철거하여 기형적 경관을 바로잡고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선을 그어 기록할 수도 있다. 구조체와 재료의 일부만을 살려 전망대로 쓰는 방법도 있다. 철로로 단절된 구역의 고가만 남겨 보행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한’ 조건의 설계 지침은 설계의 창의적 스펙트럼을 좁힐 수밖에 없다. 강한 지침을 따르며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938m의 긴 고가를 본래의 선형대로 유지하면서 고가 주변의 도시 조직과 적절히 연계되는 보행 위주의 공원을 제안하는 일뿐이다. 서울역 고가―그것이 근대 산업 유산이든 아니든― 자체에 대한 해석을 봉쇄당한 디자이너, 그는 고가 상부의 미려한 포장, 시각적 부담이 없고 동시에 안전에도 문제가 없는 난간, 보행의 원활한 흐름과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장치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화장술이 관건인 것이다. 결국 서울판 하이라인이 요구된 셈인데, 역설적이게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하이라인을 재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기 쉽지 않은 설계 과제다. 다음에서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제출작들은 기초화장, 네일아트, 원더브라 정도의 제한적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데 고심했다.
2.
제목을 달지 않은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Topotek 1)의 제출작은 ‘강한’ 설계 조건에 역으로 대응해 서울역 고가를 화려한 주연보다는 충실한 조연으로 규정한다. 가장 ‘약한’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설계적 개입을 전략적으로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비움과 개방을 통해 역동적인 유연성을 꾀한 이 작품에는 아무런 구조물이 없다. 고가 전체를 하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단순한 공간미를 주고 고가 가장자리에 선형의 벤치를 겸할 수 있는 목재 데크의 선큰 플랫폼을 놓는 게 전부다. 프로그램별로 공간을 구획하지도 않는다(그림1). 거의 전 구간이 동질적이고, 그 위에서 일상적 이용과 계절별 이벤트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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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제대로 된 쇼를 하라
서울역 고가 공모, 진화인가 퇴보인가?
흔히 부정적으로 얘기할 때 쓰는 ‘쇼를 하고 있네’의 천박한 의미의 ‘쇼’가 아니다. 멋지고 유려하며 감동을 주는,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브로드웨이의 공연과 같은 ‘쇼’. 뉴욕의 더 로케츠나 파리의 물랭루즈와 같은 볼거리가 화려한 ‘쇼’. 수를 부리고 허를 찌르는, 짜임새가 탄탄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정치적 ‘쇼’. 무엇이든 간에 ‘쇼’의 핵심은 흡입력, 구성, 그리고 명분이다. 이 세 가지가 잘 갖춰지면 관객은 몰두한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는 흡입력도 없었고 구성도 빈약했으며 명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물론 멋진 쇼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역 고가는 장소적 특성으로 인해 그 이전의 마포석유비축기지, 그리고 그 이후의 세운상가 공모전보다 훨씬 더 주목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서울의 대표 프로젝트로 청계천과 한강 르네상스가 있었다면 이번 시장에게 서울역 고가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제대로 인정받는 쇼를 통해 명분도 얻고 무얼 하든 따라붙는 정치색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라인으로 갔다.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먼저 하이라인은 서울역 고가처럼 철거 논의가 많았지만 결국 공공 공간으로 지켜낸 프로젝트다. 그리고 성공 사례다. 드러내 놓고 얘기할 순 없었겠지만, 서양의 것이라면 그저 좋다고 여기는 천박한 시민 의식도 살짝 건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해도 될 것을 굳이 멀리 뉴욕까지 갔다. 파란하늘, 선명한 색감, 하이라인의 시크하면서도 야생적인 느낌, 고풍스러워 보이면서도 현대미가 물씬 풍기는,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It’s show time! 여기까지만 보면 쇼의 시작은 성공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이라인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라인의 빼어남이 서울역 고가의 잠재력을 잠식했다. 많은 논란 끝에 고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 왜 그것이 하이라인과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장소를 표방할 순 없었을까? 하이라인이 생기기 전의 성공 사례로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가 있었다. 그러나 하이라인은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냈다. 정말 쇼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면 서울역 고가에 올라가서 해야 했다. 하이라인 위에 올라 서울역 고가를 얘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본편이 아닌,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쇼를 보는 관객은 혼란스럽다. 하이라인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서울역 고가는 어떻게 된다는 건가?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이지만 실상은 정체성의 ‘카피’와 무엇이 다른가? 관객은 본 공연을 보기도 전에 김이 샌다.
크레디트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아직 공모전은 시작도 안 했다고. 재미있는 쇼는 이제부터 보여주겠지. 그런데 웬걸. 본격적인 쇼 타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또 한 번 실망한다. 주최 측은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심사숙고해 공정하게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디션이 없다. 오디션이 없었는데 어떻게 공정하게 뽑은 걸까?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디자이너들로 구성해 놓았으니 주최 측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까? 그런데 선발의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최혜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AECOM(전 EDAW)을 거쳐 West 8 뉴욕 오피스에서 거버너스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2012년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서 West 8 + 이로재 팀의 당선을 이끌면서 현재 서울과 로테르담을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 및 조성계획 수립 프로젝트 리더로 일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 친환경건축물 인증제 공인 전문가(LEED A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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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상상적 시민들의 공모전
설계 교육의 단면들
어째서 모두는 이 프로젝트의 주인을 박원순 시장으로 전제하고 있는가?
공론화는 시민의 몫이 아닌 서울시의 책임인가?
과연 서울역 고가에서 지역 전문가와 시민들의 내부 성찰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서 시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축제의 끝에서 남은 질문들
또 하나의 축제가 끝났다. 공모전 때문에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는 누군가나 당선작의 선정 결과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모전이 축제라는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모전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진지한 고민을 할 기회는 없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공모전은 우리 도시와 공간의 담론을 풍성하게 해주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축제에 누가 참여했는지 주인공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지만, 정작 축제의 성공 여부는 어떻게 축제를 기획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모전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의 방식과 절차에 대해 공모전 기획을 지휘한 김영준 전문위원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우선 굳이 소수의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는 초청공모 방식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프로젝트 특성과 작품의 질을 고려할 때, 응모작 수는 많지만 정작 좋은 안들은 소수에 그치는 공개공모보다는 초청공모 방식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지명초청 방식이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유리하다. 물론 저명한 작가의 안이 반드시 좋은 안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공개공모의 방식일 경우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들이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며, 국내의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마저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서울역 고가 공모전이 서울시가 추진하는 유일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구상의 일부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서소문밖 역사유적지’와 ‘마포석유비축기지’가 공개공모 방식으로 치러졌다. 서울역 고가에 이은 ‘세운상가 활성화’와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역시 공개공모로 진행된다. 따라서 이 많은 공모전 중에 하나쯤은 확실히 흥행을 보장할 주연 배우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으로나 화제성에 있어서나 서울역 고가를 초청공모로 진행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은 폐쇄적으로 진행된 지명 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의 구성은 꽤 흥미롭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든 작가들이 명단에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장들이 국내 무대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를 보았을 때 차라리 국내의 여건을 충분히 존중해줄 만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공모전에 참여한 국내외의 작가들이 지명도가 낮다는 말은 아니다. 선정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다는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어도 초청받은 작가들이 자격 미달이거나 특정한 분야나 국가에 편중되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지난 공모전의 참여 자격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공모전의 조건으로 건축, 조경, 구조의 협업을 전제했고, 그 때문인지 염려되었던 특정 분야의 독단과 독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간과된 성급한 진행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장황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인 논란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비판적 견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작 설계공모의 기획책임자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는 공모전의 방식과 절차 이전에 이 프로젝트의 당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의 주인
2014년 9월 미국을 순방 중이던 박원순 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을 시찰한 뒤기자간담회를 열어 서울역 고가를 재생하는 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발표 직후 호평보다는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일간지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의견이 담긴 칼럼들이 실리기 시작했으며,2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은 공원화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시 의회에서도 시장이 절차를 무시했다며 일부 의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공모전이 끝나고 당선안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역 고가 공원화는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서울역 고가는 이제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도시의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이명박 전 시장에게 청계천과 서울숲이 그러했고 오세훈 전 시장에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한강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서울역 고가는 박원순 시장의 미학적인 정치 도구라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서울역 고가에 대한 모든 평가는 아무리 신중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더라도 어떤 지점에서 반드시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함의 속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은 결국 서울시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고, 상찬 역시 박원순 시장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는 묘한 동조 현상이 나타났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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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담장에 갇힌 늙은 거인
불안감에 쌓기 시작한 담장에 스스로 갇혀 버린 사람의 얘기는 더 이상 우화가 아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거주자가 도시의 절반이 넘고 그나마 남은 골목은 주차장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행여나 뭐라도 훔쳐 갈까 집집마다 보안 시설을 설치하고 도로 곳곳에 CCTV를 단다. 서울의 아이들이 바깥공기를 맡는 시간이 하루 평균 7분이라는 통계는 담 정도에 갇힌 게 아니라 벙커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게할 정도다.
담은 궁극적으로 단절을 말하는 것인데, 도시민들이 스스로 쌓은 담은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불안감에서 기인하지만 도시의 단절은 자본의 욕망에 기인한다. ‘더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더 빨리’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철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의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려고 할때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단연 자동차다. 필자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이유로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있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걷기 힘든 도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자동차 열쇠를 찾는다. 역시 자동차가 답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교통이 좋아야 장사도 잘 됐고 집값도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세를 사는 한이 있어도 차는 꼭 샀다.
시작은 달콤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교통사고는 늘고 공기의 질은 지속적으로 나빠진 데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더 빨리’가 무색하게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기름값은 지갑을 얇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개인이 쌓은 담과 도시가 쌓은 수많은 담들에 갇힌 시민들은 급속도로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키워드는 ‘불不’이었다. 불통, 불신, 불안, 불확실 등의 단어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수준으로 다가왔고, 결국 우려했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무無’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지금의 메르스까지 우리는 무책임, 무능력, 무관심으로 인한 무기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개인화가 낳은 소외와 단절이 가져온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서울은 세계의 대도시가 다들 그랬듯이 육교와 고가를 허물고 보도를 넓히고 더 나아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보행 전용 도로나 대중교통 전용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담을 허무는 서울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 한복판에 서울역 고가가 놓여 있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이 망할 것이라고 하고, 고가 주변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과거의 경험이 주는 믿음은 견고했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있음에도 여전히 화살의 방향은 교통을 향한다. 꽉 막힌 도시에서 자본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어 소비의 물꼬를 돌렸고 더 이상 좋은 땅을 찾지 못한 현대판 지관들인 투기꾼들은 수도권 곳곳에 욕망의 신기루를 만들어 배를 불렸다. 그러는 동안, 정부와 서울시의 무책임, 시민들의 무관심, 소위 전문가 집단의 무능력은 상인들을 무기력 상태에 빠뜨렸고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서울역 고가로 향했다.
서울역 뒤편의 상황은 더 처참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의 중앙 역사의 뒤편은 허름했다. 서울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부동산 투기와 만나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 지난 30년 동안의 선거에서 모든 후보들은 개발을 약속하고 파기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요동을 친 땅값은 2008년 북부역세권 개발 계획 발표 시 평당 6천만 원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800여 명이었던 소유주는 그새 2,200여 명으로 늘었는데, 소위 딱지 거래가 성행한 결과 한 집에 소유자가 무려 20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 주민들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말기 암환자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체 의학을 찾듯 “그나마 박원순이니까…”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중이다. 늙은 도시, 600살을 넘긴 무기력한 거인의 현재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정 답은 없는 것인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에 답이 있을 것 같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쪼아주듯이 주민과 시민들이 스스로 깨려고 할 때 행정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서울의 활력은 애초부터 사람에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서울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의 활력으로 발전해 온 도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역량이 지속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야 근육이 생기고 힘이 붙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건축가인 비니 마스가 서울역에 말을 걸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시민이 할 것인가, 서울시가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설계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참여할 것인가가 이 사업의 관건이다. 앞으로 3개월 여, 고가산책단은 이 과정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er가 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역 고가의 당선 작가인 비니 마스의 인터뷰는 눈여겨볼 만하다. “도시재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제 선택은 서울 시민들에게 달렸다. 담장을 허물어주길 기다릴 것인가, 스스로 깨고 나올 것인가.
조경민이라는 이름보다는 조반장이라는 별명이 더 익숙해졌다. 지금은 사단법인 서울산책의 대표이자 고가산책단의 일원이지만 이전까지는 각종 문제 연구소장으로 불릴 정도로 얇고 넓게 그리고 복잡하게 살아왔다. 건축을 전공했으나 아직 자기 집이 없고 남자 평균수명의 절반을 넘었으나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으며 현재 가장 큰 고민의 주제는 ‘서울’과 ‘길’이다. 고가산책단은 서울역 고가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지금은 고가에 대한 시민들의 마음을 듣고 모으고 전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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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이면
예고한 대로 이달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과 출품작들을 세 편의 비평과 함께 엮은 특집을 싣는다. 너무 당연한 말이 겠지만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을 뽑는 데 있다. ‘좋은’의 자리에는 실험성이나 독창성처럼 가슴 뛰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다. 경제성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설계공모의 주인은 당선작에 따라 구현될 현실 공간의 사용자들이어야 하지만, 그들이 공모전의 실제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거의 없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주최자(또는 전문위원), 출품자, 심사위원 정도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세역할을 모두 경험하며 설계공모의 이면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게임의 주인공은 직접 뛰는 선수다. 스스로를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나 비평가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공모전에는 출품한 적이 몇 번 있다. 연합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이나 전략을 잡는 일을 했다. 설계공모에 도전한다는 건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다. 시간과 노동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안감이나 피곤함보다는 흥분감과 초조함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매우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공모전을 한번이라도 해보면 바로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된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루지오illusio”(장場의 환상)에 빠져 “인정 투쟁”을 하는 셈이다. 당선작을 내는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매번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억울한 건 아니었다.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이나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A4 한쪽 미만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어떤 상황이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당선되지 못했다고 굳게 믿으며 분루를 삼킨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냉소를 짓지만 이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기에 멈출 수 없다. PAProfessional Advisor라는 조금은 생소한 약자로도 불리는 전문위원은 설계공모 주최자의 대리인이다.설계공모의 풍년이던 2000년대 중반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제도다. 같은 학과 원로 교수를 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공원, 용산공원 등 대형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 역할을 하게 됐는데,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를 진행한다. 초청 공모인 경우에는 지명 초청자를 선정하는 일도 해야 한다.홍보, 의전, 전시 기획,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교수 몇 사람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인력 풀이 필요함을 깨닫곤 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주최자가 설계공모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설계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목적 없이, 원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바람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진행되는 공모전. 설사 좋은 작품을 뽑는다하더라도 현실로 구현되기 어렵다. 주최자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전문위원이 설계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심사위원회에 모신 내로라하는 세계적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난데없는 국가대항전이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친다. 작품 자체보다는 태도나 스타일이 심사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심사위원은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역할이다. 다른 분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겐 몇 달씩 뜬눈으로 밤을 새워 제출한 노력과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감식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이권이 걸린 설계공모에서는 심사위원간의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미명 하에 심사장의 상황이 옆방에 앉은 제출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심사위원은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아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토론을 하더라도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므로 전통적이고 한국적이다”는 수준의 주장이 난무한다. 심사위원 노릇이 난감하고 피곤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예상되거나 발표되면 선후배,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찾아오지 마시라고 간청을 해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작품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는 사람도 있고,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2015년의 서울은 때 아닌 공모전의 르네상스다. 지난 한달 동안만 하더라도 설계공모 뉴스가 줄을 이었다. ‘잠실운동장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의 참가 등록이 끝났고, ‘노들꿈섬 운영구상(1차) 공모’의 설계 지침이 발표됐으며,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국제공모’의 수상작들이 공개됐다. 세종대로의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역사문화 광장을 조성하는 설계공모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공공의 도시 공간을 재발견해 지혜롭게 고쳐 쓰는 일이야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 시점이 정치적 일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설계공모가 ‘공간 정치’의 전시적 이벤트로 동원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공모전이 많아질수록 조경, 건축, 도시 전문가의 일거리가 풍족해진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생각처럼 낭만적인 제도가 아니다. 잡지 첫 쪽에 부끄러운 개인적 경험담을 늘어놓은 건 설계공모의 관행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시 돌아보자는 뜻에서였다. 설계공모의 과정 자체를 다시 디자인하고 그 과정에 사용자(시민)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