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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3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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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2년01월 / 165
  • 중국의 도시광장Ⅲ - 상하이(上海市)의 인민광장(人民廣場)과 외탄광장(外灘廣場)
    지난 여름 중국을 다녀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발전하고 있는 그들의 도시 모습에 무엇인가 초조함을 저버릴 수 없었다. 몇년전부터 중국의 변모상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인식들은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게으르지 않게 관심을 갖고있던 필자 입장에서는 좀더 생산적인 기회 마련에 시간을 놓치고 있는 듯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지난해 11월초에 있었던 한·중 조경설계 작품전시회였다. 그들의 생각과 표현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필자가 받은 충격을 우리측 인사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우리와의 접촉에 자신감을 찾았고, 절치부심하던 올림픽 유치도 성취한 그들이지만 그래도 이제부터는 도시환경문제 개선에 아쉬워할 입장임에 착안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4개월만에 다시 북경을 찾았더니 주로 문혁세대 이후 젊은 작가들로, 작품내용도 놀라울 정도였지만 종합토론에서의 숨길 수 없는 그들의 욕구 표시는 역시 올림픽 개최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험적 정보들이었다. 그러면서도 "1998년 이후 중국 전체의 도시에서 6,000여개의 도시광장이 출현하였다"라는 은연중의 과시와 행사 마지막날 북경의 가로조경 사례지 답사에서는 충격적인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왕부정(王府井)거리 서북쪽 명·청(明·淸) 초기의 황궁 성벽자리를 발굴하여 가로 공원화 하였는데 2.8km 거리에 폭이 약 40여m 되는 구간이었다. 현 지반고에서 2m 정도 낮은 곳에 옛 성벽의 원형을 찾아 선큰광장화 하였고 높낮이의 변화에 따른 각종 수경시설과 시대상을 보여주는 환경 조형물, 섬세한 바닥 포장 등의 다양한 설계내용들이었다. 60세가 넘은 듯한 여사장의 정력적인 안내 설명에 따르면 계획수립에서 설계 기간까지 한달 보름이었고, 시공 6개월만에 마치었다하니 진위 여부에 대한 재확인을 하여야할 정도였다. 오래된 주택가의 철거 과정과 보상비는 그들 체제상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동안 인식되었던 중국, 중국인들이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야할 시간이었다. 마치 비온 후의 숲 속에 버섯이 솟아나듯 새로운 장소의 양적인 출현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질적인 내용에서도 그들의 잠재력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10여년 전 필름 속의 중국 모습과 비교하면서, 편의상 신해혁명(申亥革命)을 근대, 문화혁명 이후를 현대사의 시작점이라 가정한다면 과연 오늘의 목표는 무엇이고, 내일의 지향점은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숨가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이렇게 변모하는 배경 요인 중 변화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곳은 흔히들 광동성(廣東省) 심수라 하지만 이는 경제개발의 전략지점이었고, 정신적 중심도시는 역시 상해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는 상하이의 도시광장을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 상해시 인민광장 - 배경의 건축물들이 화려하게 반사되고 있다 정부청사 앞의 인민광장 상해는 4·5년 전 까지만 하여도 인구 1400만으로 북경, 천진과 함께 중국 3대 도시 중 인구 최대의 도시였다. 그러나 최근 중경(重慶)시가 3090만의 직할시로 분리되면서 최고의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그래도 1674만의 중앙 직할시로 중국 근대화의 간판이자 현대화의 선두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상징인 손중산(孫中山)과 사상적 지도자인 노신(魯迅)의 옛집(故居)을 기리고 있고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 제 1차 개최지로서 선진국의 근대 문명과 부닥친 역사성과 함께 개방과 변화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1824년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개항하고 나서야 도시조성이 이루어진 곳으로 그동안 협소한 가로망에 교통체증으로 인상 지워졌던 곳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마당로(馬堂路)에 위치한 망명 정부터와 노신공원 안의 윤봉길 의사 현장 등으로 망명자들이 찾아들 듯한 푸근하고 어스름한 분위기의 도시였었다. 뒷골목 그늘 밑에는 웃통벗는 노인들의 장기 두는 모습이 한가로웠고 아파트마다 내 걸린 장대 끝의 빨래들과 주택가 입구마다 내놓은 마통(馬桶)들이 신기롭기만 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도 90년대 초 였고, 그 이후에는 예원(豫園) 입구의 붉은색 상가 앞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과 강변 외탄(外灘)으로 밀려드는 인파에 상해의 변화는 예측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90년대 말이 되자 허허벌판이던 포동(浦東) 지구에 등소평(鄧小平)의 명에 의해 중국 희망의 지표로 삼았던 동방명주(東方明珠) 탑이 들어서자 이를 신호로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의 면모를 바꾸어 놓은 곳이 바로 상해시의 행정중심인 인민정부인데 동쪽으로는 서장중로(西藏中路)와 북쪽의 남경동로(南京東路)와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정부청사 주변에는 인대(人民代表會議), 정협(政治協商) 건물들과 함께 근대의 우수한 역사적 건축물들이 집중된 지역으로서 공공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중 인민광장은 정부청사 전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면적은 1,626,000m2에 이르고 시중심에서 가장 큰 open space 이기도 하다. 장 태 현 Jang, Tae Hyun·청주대학교 환경학부 조경학전공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