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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련지 ·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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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5년11월 / 211
  • 2005 청계천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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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5년11월 / 211
  • 제5회 한 · 일 조경인 축구대회
    지난 10월 1일 서울 마포구 난지천공원에 위치한 난지천축구장에서는 (사)한국조경사회 주최 제5회 한 · 일 조경인 축구대회가 개최되었다.지난 2001년 처음 개최된 한 · 일 조경인 축구대회는 올해로 5회를 맞았으며 양국을 오가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경기를 진행하여 이제는 한 · 일 양국 조경인간의 정보교류는 물론 친목도모를 위한 축제로서 명실공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먼저 양국 선수들은 월드컵공원을 둘러본 후 홍보관에서 집결하여 관리사무소에서 홍보영상물을 보고 준비된 자료와 함께 오순환 팀장으로부터 월드컵공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난지천축구장으로 자리를 옮긴 선수단은 경기에 앞서 몸풀기에 들어갔다. 매년 이동해야하는 국가의 인원이 삼십여명 정도였던 것에 비해 이번 대회에는 일본측에서 각 지역의 조경인 축구단(일본의 경우 지역별로 조경인 축구단이 활성화되어 있어 서로간 친목교류의 기회로 전국조경인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다)에서 45명의 인원이 참가해 행사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뿐만아니라 일본팀의 경우 항시 여자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었는데, 올해에는 한국팀에도 여자선수 2명이 영입되어 더욱 시선을 끌기도 했다.개최 당일 아침까지도 가을비가 촉촉하게 경기장을 적셨으나 경기시간이 다가올수록 양국 조경인의 만남을 축복이라도 하듯 비는 그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선수들이 쾌적한 느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선수들은 준비운동 후 입장하였고, 주최측인 (사)한국조경사회의 이용훈 회장의 환영사와 일본측 대표인 마사노리 데끼의 답사가 있었다(행사 전체의 통역은 TLA SEOUL의 정태열 소장이 도움을 주었다). 이용훈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5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양국 선수들의 공로를 높이 샀으며, 마사노리 데끼는 많은 준비와 함께 일본 선수단을 환영해 준 한국조경사회와 한국선수단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답사 후 양국 선수 대표들은 준비해 온 기념품을 전달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축구단 선수이기도 한 타카노랜드스케이프 소속 조경디자이너 아카미네 타키코가 디자인한 단체복을 준비해 와 한국 선수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본 경기는 전후반 각 45분씩 진행되었으며 본 경기 후 친선경기도 준비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심판의 호각소리가 울렸고, 양국 선수단은 1년간 쌓아온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선 선점은 홈그라운드의 영향인지 한국팀에서 먼저 획득했다. 첫 골을 터뜨린 후 후반전 경기가 끝날 때까지 두 팀 모두 최선을 다 했으나 3:1로 한국팀이 승리해 3승2패의 기록을 세움으로서 또다시 내년의 경기를 기약해야 했다. 본 경기가 종료되고 잠시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친선경기가 이어졌다. 친선경기에는 양국의 여자선수들이 모두 참가하여 실력을 발휘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 2005년11월 / 211
  • 방콕의 수상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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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5년11월 / 211
  • 도시환경을 개선한 교보생명의 광고와 아쉬움
    건물마다 누더기처럼 난잡亂雜하게 붙어 있는 광고물. 그런 걸 보면서 살아야 하는 시민들은 우리네 생활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는 듯해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심각한 정서 불안증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잡하고 저질적인 생활환경이 우리 후세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삭막하기만 한 우리네 도시 환경 속에서도 근래 두 개의 ‘아름다운 사건’이 눈에 띄어 필자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중 하나는 서울 충무로 신세계 본점에서 볼 수 있다. 신세계 본점이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면서 커다란 보호벽을 설치하였는데, 그 외벽에 ‘겨울비Golconde’라는 대형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겨울비’는 벨기에 태생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년)가 1953년에 제작한 유화로 원본의 크기는 80.7x100.6센티미터이다. 겨울철 스산스럽게 내리는 비처럼 멜론 모양의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하늘에서 수없이 내려오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보도 자료에 의하면 신세계는 가로 150미터, 세로 20미터 크기의 알루미늄 판에 이 작품을 프린트하여 보호 외벽에 부착하였다고 한다. 신세계 측이 1년간 작품을 사용하는 데 지불하는 저작권료는 약 1억 원이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지 않은 사용료이지만 그 앞을 지나는 수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시도가 아닌가 싶다. 다른 하나는 몇 년 전부터 광화문 네거리 교보생명빌딩에 등장했다. 아름다운 시구詩句가 담긴 대형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난잡한 도시 환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독하게 피어난 작은 야생화野生花 같다. . 이 시구에 어울리는 멋진 필체로 쓴 대형 패널(20x8미터)이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는 것을 필자는 승용차를 타고 가다 처음 봤다. 당시 그 시구가 하도 정감스럽게 느껴져 종이에 얼른 메모하기도 했다. 그 뒤론 교보빌딩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아름다운 시구를 다시 보고 속으로 읊어보게 된다. 같은 시구가 실린 현판을 강남 교보빌딩에서도 볼 수 있는데, 모르긴 해도 지방 도시에 있는 교보생명빌딩에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운 생각이 들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시구를 읽으며 마음 한 자락에 꿈을 간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보생명보험이란 기업이 사회에서 얻은 이윤의 일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일 것이다. 퍽 좋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실로 한 차원 높은 기업 이미지 관리라는 생각이 든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아름다운 구절 밑에는 이라는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다. 처음엔 저렇게 아름다운 글을 만들어내는 직원을 두고, 그러한 글을 기업 홍보물로 내놓기로 결정한 회사 최고경영진에게 조용히 감사와 경의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느 좌석에서 교보빌딩에 등장하는 그 아름다운 글귀들이 국내 유명 기성 시인의 시에서 발췌한 거라는 걸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소개된 시구는 마종기馬鍾基 시인의 것이라고 한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필자처럼 문학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는 어느 시구가 어느 시인의 것인지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현판에 쓰인 시구 끝에 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니, 마땅히 홍보팀에 감성 있는 직원이 있으려니 여길 만하다. 그런데 원작자原作者를 밝혀야 할 그 자리에 이라고 썼다면 이는 분명 표절剽竊 행위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지적재산권을 경시하는 우리 사회의 걱정스러운 풍토를 반증하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교보생명보험 같은 국내 굴지의 기업이 그런 잘못된 풍토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듯해 매우 실망스럽고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신세계 본점 보호 외벽에 장식된 대형 그림에는 작가 이름, 작품명 그리고 제작년도가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보생명보험은 국내 기업 중에서 특유한 기업 문화를 통해 깨끗한 이미지를 가꾸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국내 굴지의 대형 서점을 운영하는 기업으로도 널리 알려져 그 높은 문화성이 자연스레 부각되어 왔다고 본다. 그러기에 더욱이 아름다운 시구 밑에 시인의 이름이 명기되었다면 더 돋보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이 성 낙 ·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사)현대미술관회 이사)
  • 피라네시를 이용한 2.5차원 이미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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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5년11월 / 211
  • 일본의 문화적 경관 보호에 관하여
    지난해 일본에서는 경관법 제정을 비롯해 문화재 보호법이 개정되어, 경관에 관한 법률의 정비가 시행되었다. 특히 문화재보호법의 경우는 현재 세계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UNESCO 세계유산의 ‘문화적 경관’이라는 개념을 농림수산업과 연관 지어 반영하여 개정하였다. 반면, 국토의 약 90%가 농산어촌에 해당하는 우리나라는, 그동안 개발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농산어촌의 경관이 상당히 훼손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농산어촌의 경관에 대한 법률적 정비를 시도하였고, 농산어촌의 경관을 보전하고 이를 지역활성화와 연계시켜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따라서, 본 글은 세계적 흐름으로 떠오른 ‘문화적 경관(cultural landscape)’과 일본에서의 문화적 경관의 도입에 대해 알아보고, 그 시사점을 언급해보고자 한다.문화적 경관의 개념‘경관’에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의 landscape도 풍경 및 풍치라 불리는 토지의 외관을 의미한다. 경관은 도시경관, 농촌경관 등 대상으로도 구분되지만, 여기에 인간의 행위와 자연과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소산이라는 독특한 특성이 반영된 문화적 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 정리될 수 있다 Carl Sauer는 ‘문화경관’이라는 것을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난 물적 형태와 문화적 형태의 명백한 조합을 보유한 지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황기원, 1995, p. 122). 한편, UNESCO의 세계문화유산협약 시행을 위한 운영지침 47조의 문화적 경관을 정의한 내용에서도 인간과 자연과의 결합에 의해 나타난 산물이라고 하고 있다. 즉, 문화적 경관은 양쪽 모두 외적이고 내적인 자연환경에 의한 물리적 제약과(혹은) 기회, 그리고 연속적인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힘에 의한 영향 하에서 인간사회와 정주(定住)가 여러 시간에 걸쳐 진화한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오 민 근 · 서울대학교 경관보전 및 개발연구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보길도 곡수당 지역의 발굴유적에 대한 복원 계획
    전남문화재연구원이 2003년부터 2005년 3월 까지 보길도 곡수당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다.이지역의 발굴조사는 완도군이 보길도 윤선도 유적(사적 제368호)의 보존 정비와 활용을 위한 학술적 자료를 얻고자 함에 있었다.보길도의 곡수당지역과 낙서재 지역에 대한 문헌 기록은 윤선도의 5대손이 되는 윤위(尹偉)가 1748년 보길도를 답사하고 그의 선조 윤선도에 대한 유적을 자세히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識)가 있다.보길도지는 윤선도가 1637년 부용동에 들어와서 일곱차례나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13년간 머물다가 1671년 낙서재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난 해부터 77년이 지난 이후의 기록이 된다. 그러나 윤위는 선조의 유적에 대한 문헌자료와 윤선도 당대의 유적을 고찰하고 그 후에 변화된 사항에 대한 것까지 세세히 살펴서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윤선도가 떠난지 334년이 지난 지금 발굴조사를 통하여 들어난 유적을 문적을 참고하여 고찰해 본다.곡수당과 서재지역곡수당 지역과 서재 지역은 발굴조사된 평면도면을 중심으로 고찰해 본다. 상지(上池)의 북 서쪽에 연한 건물지가 곡수당(曲水堂)터로 볼 수 있다.보길도지에 보면 ‘한 칸 방에 사방에 퇴를 달았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取適) 서쪽은 익청(益淸)이란 편액을 달았다. 이는 모두 학관의 글씨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정사는 세연정 보다는 약간 작지만 섬돌과 주초돌을 놓은 것은 정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곡수당(曲水堂)도 세연정 처럼 한칸방 4칸퇴(一間四退)라 한 것은 가운데 방 한칸에 사방으로 마루를 설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집이었던 것으로 보길도지에 곡수당의 정사(亭?)가 세연정보다 약간 적다고 표현한 것은 세연정과 비슷한 건물 구조로 약간 적다는 표현이다. 곡수당은 세연정(1637년)보다 뒤에 건립하였다. ‘초당 뒤에는 평대(平臺)를 만들고 대의 삼면에 담장을 둘러 좌우에 작은 문을 두었으며 그 중간에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었다.’ 곡수당 뒤에 평평한 지역이 있고 동,북,서로 담장이 노출되어 있고 담 좌우에 협문터가 지금도 있다. 다만 평대에 심었던 꽃나무와 과일나무는 없어졌다. 곡수당의 남쪽 취적헌에 연하여 조성된 장방형(길이4.5m×너비2.4m)의 못이 발굴되어 있다. 이 못의 깊이는 1.8m가 넘는데 바닥은 판석의 자연 암반임으로 연(蓮)을 심을 수 없어 연지(蓮池)는 아니다.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도 연지라고 기록하지 않고 못(池)이라고 만 기록하고 있다. 이 못의 서쪽 지안(池岸)축대는 높이 약 2m쯤 수직으로 잡석으로 면이 고르게 쌓았는데 석축의 심은 강회를 채워서 콘크리트보다 단단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렇게 강회의 심을 넣은 못 축대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발달된 조영이다.이 못에 대한 보길도지의 기록은 ‘취적헌의 아래 유의교(有意橋)의 위에 못을 파놓았는데 넓이는 대와 비슷하고 깊이는 두어 칸이며 석축 한 것이 꽤 높았다. 후면에는 두어층의 작은 화계를 만들어 화초와 괴석을 열 지어 심었으며 동남쪽에 방대를 높이 축조하고 대(臺) 위에는 암석을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한길 남짓하다.’‘허리부분에는 구멍 하나를 뚫어 그 가운데에 석통(石筒)을 끼워 넣고 뒤에는 은통(隱筒)으로 물을 끌어들여 구멍을 통하여 못 속으로 물이 쏟아지게 하고 이를 비래폭(飛來瀑)이라 불렀다.’‘이 연못에 물이 차면 수통을 가산 뒤로 옮겨 작은 언덕(短阜)에 대는데 그 언덕에는 단풍나무 산다(山茶:동백)나무 소나무들이 서있다. 초당의 서남쪽 모퉁이 계단 위에는 백산다 한그루가 있는데 높이는 처마를 웃돌고 눈빛의 꽃이 연못에 비치고 있다. 산다는 곧 속명으로 동백이다.’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발굴조사된 ‘상연지’ 유적을 살펴보면 이 못의 동쪽 지안(池岸) 위에는 지금도 괴석 두덩이가 발굴조사로 노출되어 있다. 이 괴석이 있는 지역이 화계이며 화계에는 괴석과 화훼(花卉)가 열식(列植)되어 있었던 곳이다.못의 동남쪽에는 방대를 조성하여 한길 남짓한 높이의 석가산이 조성되어 있었던 곳으로 지금 방대의 유적이 노출되어 있고 석가산은 허물어져 암석들이 흩어져 있다. 괴석은 석회암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형태이다.대가 있는 지안의 허리부분에 석통(石筒)을 끼어 은통(땅에 묻은 홈통)으로 물을 끌여 들여서 못속으로 물이 쏟아지게 한 비래폭(飛來瀑)이란 폭포가 있었다. 지금 유적에서는 비래폭의 폭포시설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은통(隱筒)으로 땅밑에 나무 홈대를 묻어 곡수당 동남쪽 산속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높은 곳에서 못까지 끌어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나무 홈대를 가설하여 곡수당 동남쪽 개울물을 끌어 올 수 있게 되어 있다.(정 재 훈 ·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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